安 후보의 정치 개혁안은 정치에 대한 징벌에 가깝다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말로만 쇄신 경쟁한 결과가 '안철수式 개혁' 불러
다음엔 더한 선동가 등장할지도
박두식 정치부장
그는 대선 출마 선언에서 자신을 "국민이 불러낸 후보"라고 했다. 정치인들은 주요 연설이나 성명에서 곧잘 '국민'이란 단어를 들먹인다. 그러나 스스로를 '국민이 불러낸 후보'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면 이런 주장을 하기 어렵고, 설령 자신을 '국민 후보'라고 부른다 해도 듣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허망한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안 후보는 '국민'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정말 국민 후보처럼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수사(修辭)의 반복 사용'은 선동의 기본 요소다. 그는 주요 현안에 대한 질문에 줄곧 "국민이 판단해 주실 것"이라고 답변한다. 안 후보를 돕는 선거 참모들까지 '국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안 후보 측 대변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안 후보는 국민이 만든 후보이고…"라는 구절을 되풀이한다.
그런 안 후보가 정조준한 제1번 기득권 세력은 '정치권'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국민이 저를 통해 정치 쇄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내놓은 정치 개혁안(案)은 국회의원 수(數) 줄이기, 정당에 대한 국고(國庫) 지원 축소, 중앙당 폐지 등 세 가지이다. 이어 국회의원의 월급인 세비(歲費) 삭감 등을 들고 나왔다. 안 후보가 '정치 개혁'을 출마의 일성(一聲)으로 삼았을 때 그를 통해 좀더 근본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정치 개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지 유심히 지켜봤다.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월급을 깎고, 정당에 대한 세금 지원을 줄이는 것보다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결국 개인적 기대로 끝났다.
그러나 그가 정치권을 향해 요구한 것들은 하나같이 대중의 반응을 격발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간 정치는 '검은돈'이나 받아먹고, 싸움질이나 하고, 국민 세금이나 축내는 존재쯤으로 여겨져 왔다. 정치권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안 후보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겨냥했다. '밉상'인 정치인들에게 벌(罰)을 주자는 것만큼 통쾌한 주장도 없다. 문제는 이런 징벌적 방법이 정치를 바꿔놓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안 후보의 정치권 흔들기는 대(大)성공을 거뒀다. 그와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는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는 안 후보가 낸 숙제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 새누리당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정치 개혁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비슷한 내용의 '특권 내려놓기' '권력 줄이기' 방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은 세 후보 측이 함께 모여 정치 개혁을 논의하자는 역(逆)제안까지 했다. 올해 대선 국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안철수식 선동의 힘'이다.
이런 유(類)의 정치 개혁 경쟁은 올 대선에서만 나타나는 특이 현상이 아니다. 7개월 전에 실시된 19대 총선을 앞두고도 각 당(黨)은 똑같은 주장을 폈고, 비슷한 경쟁을 벌였다. 올해 초 나온 주요 정당의 공약집을 보면 '정치를 바꾸겠다'는 약속이 맨 앞을 차지하고 있다. 그때도 국회의원 면책특권 포기, 국회가 정쟁(政爭)으로 문을 닫으면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하겠다는 자학적이고 징벌적인 개혁안이 난무했었다. 4년 전 18대 총선 때도, 5년 전 대선 때도 그랬다. 국회가 문 닫는 일이 없도록 여야 관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근본적인 해법 대신 '세비를 받지 않겠다'는 구호를 내걸고 경쟁하고, 국회에서 무책임한 폭로·비방 방지 방안이나 '검은돈'을 막는 근원적 처방보다는 문제가 되면 면책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식의 주장이 '정치 개혁'인 양 각종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런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쪽이 더 많은 국민 지지를 받았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주기적 집단 망각증상을 보여온 셈이다.
그렇다 해도 이번만큼은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등 주요 대선 후보 측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합의를 만들어냈으면 싶다. 당장 합의할 수 있는 사안들은 12월 초 정기국회 안에 처리하고, 중·장기적 과제들에 대한 시간표를 내놨으면 한다. 이번 기회마저 그냥 흘려보내면 다음엔 국회를 향해 총(銃)과 포(砲)를 겨누는 진짜 선동가가 등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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