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장하준 "재벌해체가 경제민주화? 순진한 생각"(2012.12.24)


“세금 올리고 복지 늘려야 성장 온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50)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에게 박근혜 시대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그는 대선 이틀 뒤인 21일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나눈 네 시간의 대화 내내 복지, 사회적 대통합, 국가적 산업 전략을 강조했다. 정부의 기술 개발 투자와 특정 산업 육성, 복지 제도의 확립으로 다시 한국 경제를 성장의 발판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후보의 당선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심정이 복잡했다. 당선인이 과거사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자식이 아버지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인정했어야 했다. 아버지가 너무나 확연히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남겼기 때문에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긍정·부정 요소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다. 산업 고도화 정책이 이룬 엄청난 업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재하고, 필요 이상으로 노동자를 탄압했다. 큰 잘못이다.”

 -박 당선인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지지하지 않은 48%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반대 진영 사람 좀 데려다 쓰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 제도를 만들어 모든 국민이 마음 편하게 살고, 일하는 나라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선거판에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장 교수도 올봄에 낸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경제민주화를 얘기했다. 도대체 경제민주화가 뭔가.

 “전 세계에서 다이어트 약을 연구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말라리아 퇴치 연구비의 약 20배다. 말라리아로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지만 말라리아 약이 필요한 사람은 가난해서 수익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잘못된 시장의 현상을 막는 게 경제민주화다. 정치의 ‘1인 1표주의’로 경제의 ‘1원 1표주의’를 바로잡는 것, 즉 정부가 시장에 규제를 가해 사회적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 더 공평한 사회의 구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경제민주화’ 논의는 재벌의 지배구조나 계열사 간 순환출자의 문제에 집중됐다. 박 당선인도 순환출자를 더 이상 못하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소액 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순환출자를 막는 게 경제민주화가 아니다. 그것은 주주 간의 싸움일 뿐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과 상관없나.

 “물론 경제민주화에 재벌 개혁도 포함된다. 노동권 인정 안 하고, 규제 빠져나갈 궁리하고, 하청기업 쥐어짜는 것 고쳐야 한다. 그런데 진짜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는 대량 해고, 골목상권 위협, 고용 불안, 비정규직 확대 이런 것들이다.”

 -통합진보당 등에서는 재벌 해체하면 이런 문제 해결된다고 하는데.

 “순진한 생각이다. 재벌이 아닌 KT·포스코에는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없나. 중소기업 중에도 얼마나 나쁜 곳이 많나. 재벌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 아니다.”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쪽은 주식 보유 비율에 따라 의결권을 가지는 이른바 ‘주주 자본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투자자의 이익 때문에 단기 이윤에 급급하고, 재투자 안 하고, 노동자 교육 안 시켜서 망하면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본다. 이건희·정몽구 회장 쫓아내고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주주들이 정말 그런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게 된다는 보장이 있나. 미국과 영국의 금융권에서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만 충실히 보장해줄 인물로 삼성전자의 경영인을 선택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21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연구실에서 본지 이상언 런던 특파원(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하준 교수. 이날 인터뷰는 4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주주 자본주의’가 확산되면 해외 자본이 우리 경제를 망칠 수도 있나.

 “이미 여러 사례에서 보지 않았나. 해외자본이 KT&G에 영향력 행사해 있는 자산까지 팔아서 이윤보다 더 많이 배당하도록 했다. 전문 경영인이 주주를 무서워해 재투자 못하게 된다. 단기 이윤 많이 내기 위해 되도록 비정규직 많이 쓰고, 직원 교육도 못한다.”

 -이번 대선에선 모든 후보가 복지를 앞세웠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의 사회 변화가 만든 일이다. 고용 안정성이 사라지고, 자본시장 개방되면서 투기성 행위로 빈부격차 커졌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확산하면서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돈 못 버는 게 개인의 책임이 됐다. 그래서 과외 받고 ‘스펙’ 쌓아서 좋은 데 취직하고, 토익 공부해서 승진하고, 빚 얻어서 재테크 하는 데 몰두했다. 한때 ‘부자 되세요’가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되지 않았나. 온 국민이 그 길로 갔다. 그래서 잘살게 해주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다. 그런데 더 나빠졌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재테크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복지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뭘 잘못했나. 기업들 잘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규제 풀고 세금 줄인다고 기업이 저절로 잘되는 게 아니다. 지금의 경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부의 기술 혁신 유도, 신기술 투자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장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이런 일을 안 했다. 교육·복지·재교육·재취업·연구개발·사회간접자본 확충이 다 맞물려 돌아가야 성장이 이뤄진다.”

 -박 당선인은 양극화 해소와 복지 확대를 약속했다. 세금 안 올리고 할 수 있나.

 “복지국가를 약속하면서 세금은 안 올리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탄탄한 복지국가 만들려면 세금을 늘려야 한다. 세금 낸다고 내 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국민이 개별적으로 보험을 드는 대신에 대한민국이라는 보험회사에 보험료를 내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박 당선인의 경제 분야 공약을 봤나.

 “온갖 대증요법은 다 모아놓았을 뿐 경제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큰 그림이 없었다.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한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선진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도 복지 규모를 줄인다는데.

 “비만 환자가 다이어트 하니까 영양실조 걸린 사람도 밥 굶겠다고 하는 꼴이다. 우리는 ‘복지병’보다 ‘복지실조’를 걱정할 때다.”

 -북유럽 복지 제도는 인구 규모나 경제 구조 면에서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포항제철과 현대조선소 만들 때 국내외 경제학자들 모두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당시 우리 수준엔 라디오 조립하고 인형이나 가발 만드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새 대통령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일단 본인이 내세운 복지 공약을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면 반대론자들의 저항이 커질 수 있다. 그 다음엔 기업가·노동자·전문가 등을 모아 치열하게 논쟁하도록 하면서 경제정책의 큰 틀을 짜야 한다.”

 -일자리는 어떻게 늘릴 수 있나.

 “복지 제도를 잘 만들어야 고용 창출이 된다. 예전엔 봉제공장 노동자가 몇 주 교육 받으면 전자공장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동차 회사에서 정보통신 업체로 가려면 6개월에서 2년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복지 제도가 있어야 그런 교육이 가능해진다.”

◆ 장하준 교수는

27세 때인 1990년 한국인 최초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가 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 1년 전이었다. 국가 개발정책을 정치경제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전공이다.

 그는 학자·관료·정치인이 두루 있는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장병상)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고, 부친은 장재식(77)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다. 동생 장하석(45)씨는 케임브리지대의 과학사·과학철학과 교수다. 장충식(83) 전 하이닉스 회장이 큰아버지, 장영식(73) 전 한국전력 사장이 작은아버지다. 장하진(61) 전 여성부 장관, 안철수 대선 후보 캠프에 합류했던 대표적 재벌개혁론자 장하성(59·경영학) 고려대 교수와는 사촌 사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자유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책을 내왔다. 그의 책은 한국에서 150만 부가량 팔렸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 리스트에 올라 더욱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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