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일 화요일

[김관선 목사의 시편]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2013.01.01)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고 또 싫어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것을 하고 싶고 좋은 것을 먹고 싶고 좋은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좋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좋음’은 절대적 의미의 ‘좋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대부분 ‘내게 좋은 것’일 뿐입니다. 상대적이란 말입니다.

즉 나는 좋지만 누군가는 좋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좋음’입니다. 많은 경우에 내게 유리하고 내가 편리하고 내 입맛에 맞아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싫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불리하거나 즐겁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싫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속에 선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고 상대적인 가치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 바람직한 것은 ‘좋고 싫음’이 아닌 ‘옳음과 그름’이라는 절대적 판단 기준이 바로 서야 합니다.

‘좋고 싫음’은 개인적 취향일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냉면을 우리 아이들은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성향이고 기호일 뿐입니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먹지 않는다고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거나’ 또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유불리를 따라 선택하고 호불호를 따라 줄서려고 하지만, 내가 손해 보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동의하고 내가 불편해지더라도 그른 일이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런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가면서 그런 경향들이 더욱 짙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선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악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막으면 아버지나 어머니조차 때론 악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거 대상으로 여기고 사람으로 도무지 할 수 없는 심각한 짓을 하기도 합니다. 절대적 가치의 상대화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가치체계를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사람이라도 옳은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취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선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객관적 검증이 필요합니다. 내게는 불리하지만 옳은 일이 있습니다. 내게는 좋지만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주관적인 ‘좋고 싫음’이 아닌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으로의 ‘옳고 그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았습니다. 좋은 일보다 옳은 일을 결심합시다. 싫은 것이 아닌 그른 것을 피합시다. 싫어도 옳은 편에 섭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아져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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