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의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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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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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다른 표현은 생명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새 생명의 경험이 신앙의 출발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성장이 뒤따른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 정상적인 신앙이다. 생명의 성장은 열매로 성숙해진다. 열매는 성장의 깊이를 드러내는, 내면의 소리 없는 자랑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들은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며,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시다.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시는 목적은 열매를 얻으시기 위함이다. 농부에게 열매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려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열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만족을 준다. 이스라엘에서 포도 열매는 주로 포도주를 담그는 데 사용한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 104:15)가 그것이다. 모든 열매가 그러하듯이, 포도열매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에게 유익을 준다. 신앙의 새 생명은 열매로 성숙해진다. 자기만족을 위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열매이다.
포도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가지는 생명의 중심이 아니다. 뿌리와 줄기가 공급하는 수액을 전달받는 통로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결실인 열매는 줄기가 아닌 가지 끝에서만 맺을 수 있다. 가지에 맺힌 열매는 우리가 맺은 것이 분명하지만, 열매의 참 주인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시다. 생명에 관한 한 우리들은 주체가 될 수 없고, 생명의 수액을 전달받는 의존체일 뿐이다.
포도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가지는 생명의 중심이 아니다. 뿌리와 줄기가 공급하는 수액을 전달받는 통로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결실인 열매는 줄기가 아닌 가지 끝에서만 맺을 수 있다. 가지에 맺힌 열매는 우리가 맺은 것이 분명하지만, 열매의 참 주인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시다. 생명에 관한 한 우리들은 주체가 될 수 없고, 생명의 수액을 전달받는 의존체일 뿐이다.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가지인 우리는 생명의 관계이다. 성경 전체는 이런 관계의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두가 생명에 관한 주석들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열매 맺는 신앙의 기본이다. 예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그분에게 맞추며 사는 것, 그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
예수님을 우선순위로 삼고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본문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를 잘라내신다. 그것은 나무를 깨끗케 하는 가지치기이다. 그러면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느니라”(요 15:3)라고 하셨다. 말씀의 중요한 역할은 쓸데없는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교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도 공급해 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 그것이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그분의 자원을 내 것으로 삼는 삶이다. 그것은 기도의 특별한 통로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시인하는 것이다. 곧 내가 할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공식적으로 아뢰는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내려놓은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교만함이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가장 큰 평안과 행복을 누리듯이, 기도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들이 영적 평안과 풍성함을 경험하는 인격적 교제이다. 그러므로 응답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과 교제이다. 그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은 우리의 실제가 된다.
*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 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를 제목으로 한 수필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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