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비인기 종목 꿈나무 4명 초청, 해외캠프 연 장미란(2012.11.10)


바벨 위서 피고 진 '장미'… 11년만의 긴 외출
"다이어트? 몸무게 늘수록 내 인생의 무게는 가벼워지더라"

반지하 체육관서 첫 역기 들어 비인기 종목의 설움 잘 알죠
체육인 공제회도 필요해요
은퇴, 고민 중이지만…
런던올림픽 바벨 떨구던 날, '끝났구나'… 하지만 아쉬움 커
연말까지 푹 쉰후 천천히 결정

    
170㎝ 114㎏의 장미란(29), 공항이건 길거리건 식당이건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스스럼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어깨를 쓰다듬고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웃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붉어지는 얼굴에선 마음 깊은 곳 수줍음이 보였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역도 훈련장으로 들어서던 수줍은 사춘기 소녀가 아직 그 모습 속에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을 만져 봤다. 전체가 두터운 굳은살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도 작은 '돌멩이'가 박여 있었다. 이 손으로 그녀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 역도 선수권대회를 3연패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선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듬해 2009년에는 자기가 세운 신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그런 그녀가 지난 8월 런던올림픽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170㎏짜리 바벨을 머리 뒤로 떨구는 모습은 많은 이에게 아쉬움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날 그녀는 무대에서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고, 자신이 떨군 바벨에 손바닥으로 가벼운 키스를 남긴 뒤 일어섰다.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야구팀 고양 원더스의 김성근 감독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패자(敗者)의 얼굴"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그날 TV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숙연함을 느꼈다.

장미란은 런던올림픽을 끝내고도 쉬지 못했다. 곧바로 전국체전 준비에 들어가 지난달 대구에서 열린 대회에서 인상·용상·합계 3분야에서 금메달을 땄다. 10년 연속 3관왕. 그제야 휴식에 들어갔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처음 태릉선수촌에 입소한 이후 단 한 번도 선수촌을 떠난 적이 없다는 그녀는 스스로를 '선수촌 장기 체류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12월까지 쉬어 볼 생각"이란다. 얼마 전에는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장미란재단이 주최한 '올림픽 꿈나무 멘토링 캠프'에 참가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11년 만의 휴가'이기도 했다. 이 휴가를 동행 취재했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지난 3일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열린 올림픽 꿈나무 멘토링 캠프에서 장미란 선수가 학생 선수들과 어울려 탁구를 치고 있다. 오 랫동안 함께했던 무거운 바벨을 내려놓고 탁구 채를 든 장미란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평화로워 보였다. 장 선수는 "어린 선수들에게 좋 은 '롤 모델'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 신동흔 기자
―런던올림픽 마지막 시기에 바벨을 떨구던 순간을 요즘도 떠올리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날 밤이 계속 생각난다.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더라.'하나님이 다는 안 주시는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의 느낌은.

"마지막 시기 바벨을 떨구며 손을 놓는 순간, '아 이렇게 끝이 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처음 바벨을 손에 잡고 14년이 흘렀다. 빨리 내려가야지 했는데 생각과 달리 천천히 나오면서 '오늘 내가 못 했지만 여기까지 도전할 수 있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응원해준 분들도 고마웠고…."

―결국 무대를 벗어나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나.

"도핑실에서도 한참을 혼자 울었다. 메달을 못 따서가 아니었다. TV에 다른 선수들 경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메달을 목에 건 중국·러시아·아르메니아 선수한테 주려고 배지를 가져왔는데 직접 주지 못하고 도핑실에 맡겨 두고 빠져나왔다."

―자신의 최고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170㎏을 떨궜는데.

"교통사고 후유증도 있고 체력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는 측면도 있고….(웃음) 마지막에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추억을 훼손시킬 것 같아 출전을 접을까 고민도 했다. 그런데 그게 다 핑계인 것 같았다. 아프다는 것도 안 될 때를 대비해 뭔가를 남겨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몸 상태에 대해선 함구했다."

―은퇴를 고민하고 있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년 대회를 나갔다. 이제 한 템포 쉬어줄 시점이다. 솔직히 좀 더 계속 하나 그만두나 고민도 한다. 하지만 지금 바로 결정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한번 충분히 쉬어보고 결정할 생각이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인가.

"아니다. 좌절 또는 역경을 겪은 시기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선수한테 패했을 때다. 2005년 세계선수권에서 처음 금메달을 딴 이듬해였는데, 그때 그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제 장미란은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무슨 주문에 걸린 것처럼 정체기에 빠졌다. '이제 더 이상 못하나?' 이런 생각만 했다. 165㎏에 머물러 있던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선수촌 장기체류자
2002년이후 떠난적 없어… 전국체전 10년 연속 3관왕
세계역도선수권 3연패 베이징올림픽 세계新달성
멘토는 이에리사ㆍ김성근
선수들 위해 헌신하는 뜨거운 열정 닮고싶어…
어려운 일 있을때마다 두분과 상의하면 큰 도움
책 부자책 많이 읽는 편은 아닌데 많이 볼 것 같다며
많이들 선물 해주세요 멘토되기 위해 열심히 읽죠
결혼
좋은 사람 만나면 저절로 하고싶은 생각 안들까요?
부모님도 아직까진 아무 얘길 안하네요

―어떻게 극복했나.

“주위의 관심을 잊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하다 보면 해결이 된다. 그때도 어느 순간 훈련에서 175㎏을 들면서 정체기에서 빠져나왔다.”

―세계기록을 보유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처음 기록 경신하고선 정말 신나고 좋았다. 그러나 금방 잊고 다음을 준비했다. 자부심은 오래 못 간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내 기록에 젖어 있으면 다음을 준비하는 기간이 늦어진다.”

―승부에 집착했나.

“무조건 내가 이겨야 한다는 성격이 아니다. 다만 하기로 작정했으면 최선을 다하고, 승부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고 끝나고 나서의 행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이기면 더 좋지만 졌을 때도 인정할 준비를 했다.”

―역기를 딱 잡으면 이건 내가 들 수 있다, 못 든다 느낌이 오나.

“모든 역기는 무겁다. 하지만 경기에 나가면 몸이 훨씬 각성된다. 그래서 좋은 기록이 나오곤 한다. 바를 잡을 때는 무조건 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잡는다.”

―역도란 어떤 운동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운동이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사람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운동이다.”

인상 25㎏ 용상 35㎏을 들었던 소녀

장미란의 최고 기록은 인상 140㎏, 용상 187㎏, 합계는 326㎏이다. 지난 2009년 고양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웠던 용상 세계신기록은 아직도 그녀가 보유하고 있다. 이런 그녀도 처음 시작은 미미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8년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그녀의 기록은 인상 25㎏ 용상 35㎏. 하지만 그녀는 불과 2년 뒤 열린 2000년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기록하고, 2008년 올림픽 금메달,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까지 무서운 속도로 바벨의 무게를 불려 나갔다.

―2009년까지 용상·인상·합계 부문 세계신기록을 모두 보유했지만 지금은 용상 기록만 갖고 있다. 용상에 강한 이유가 있나.

“한국 선수들이 용상에 강하다. 팔·다리가 긴 유럽 선수들이 인상에서 더 유리하다.”

―역도에 대한 첫 기억은.

“무지 하기 싫었다. 나는 스포츠에 관심도 없었고, 활동적이지도 않았다. 특히 역도는 힘만 쓰는 무식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왜 열여섯 살 꽃다운 딸에게 역도를 하라고 했을까.

“그냥 잘할 것 같았다고 한다. 활동적이진 않았지만, 달리기 멀리뛰기 하면 항상 1등 했으니 운동신경은 있었다. 아버지도 한때 역도를 했고, 나에게 역도를 권유한 감독님과 친분도 있었다.”

―첫 공식 기록이 인상 25㎏ 용상 35㎏인데, ‘장미란’에겐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여중생한테는 무척 무거운 것이다. 자세를 배우고 기술을 익히면서 기록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턱 다칠까 봐 겁도 많이 났는데 차츰 재미를 붙였다.”

―두 살 아래 여동생(장미령)도 역도 선수(53㎏급)다. 2009년에는 자매가 태릉에서 함께 훈련했다.

“나는 동생이 보통 학생들처럼 공부하고 수학여행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본인도 역도를 하겠다고 해서 굳이 막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유명세를 탔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중국 선수가 석연찮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따고 내가 은메달을 땄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나보다 더 분개하는 분들이 계셨다. 나는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편이 아니어서 사람 없는 데를 찾아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알아보니 신기했다.”

―사람들을 피해 다녔나.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는 조금 피곤했다. 특히 식당에서 술 드신 분들, 일수 종이나 지폐에다가 사인해달라는 분들은 싫었다. 그래도 혹시 안 좋은 뒷말이 나올까 봐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그런 분들조차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인터뷰도 싫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TV에 나온 것을 봤는데 너무 못나게 나왔더라. 싫어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이왕 하려면 잘할 생각으로 그때부터 웃으며 이야기하게 됐다. 그 뒤로 성격도 활발해졌다.”

―귀찮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던데….

“그런 관심과 사랑이 있기에 역도 종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 그전에 누가 역도라는 종목을 알아주기나 했나.”

―어디선가 ‘국민 호감’이란 표현을 쓴 것을 봤다.

“주로 꼬마들이나 어르신들이 나를 좋아한다. 무거운 역기를 드는 게 안쓰러운지 만나면 고생한다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어린이들은 나를 보면 ‘장미란이다 장미란이다’ 그러면서 따라오는데, 애들이 수퍼맨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좋아하나 이런 생각도 했다.”

―외모가 주는 푸근함일까.

“내 장점은 편안하다는 점인 것 같다. 나도 외적인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예쁘고 날씬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줬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예쁘고 아름답고 멋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하지만 나에겐 그게 우선순위가 아니다. 운동선수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직후 뉴욕타임스에서 육상의 우사인 볼트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몸매’로 꼽혔다.

“그런 말 들으면 부끄럽다. 운동을 하다 보니 역도 하기 좋은 몸매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내 몸매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미(美)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역도는 힘을 쓰다 보니 카메라에도 예쁜 모습이 잡히지 않는다. 여자 역도 선수들은 경기 중계되는 것 정말 싫어한다.(웃음) 나는 이미 그런 것에는 욕심이 없다. 그래도 비행기에서 나한테 귀엽다는 승무원도 있는 것을 보면 친근한 느낌은 주는 것 같다.”

―다이어트를 할 생각이 있나.

“운동을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데 운동선수가 무슨 다이어트냐. 아, 그리고 역도 선수들이 많이 먹는다는 편견은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도 체급 경기여서 늘 체중을 조절하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다.”

―본인은 어떤가.

“또래 여자들에 비하면 많이 먹는 편이다.(웃음) 중량급이고 체중이 빠지면 안 되기 때문에 싫어도 늘 챙겨 먹는다.”

―먹기 싫은데 먹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운동을 위해 불린 체중이다 보니 안 먹으면 잘 빠진다. 그래서 늘 먹는 것이 습관이 됐다.”

―체중은 얼마나 늘었나.

“처음 시작할 때 비해 약 40㎏ 정도 몸무게가 늘었다. 그래도 내 체급에선 가벼운 축에 속한다.”

―무거운 중량을 들기 위해 몸무게를 늘리면서 평범한 삶을 희생한 것 아닌가.

“아니다. 내 삶은 좋아졌고, 몸무게가 늘고 들어 올리는 중량이 늘수록 내 인생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매사에 자신감 없고 용기도 없던 아이가 힘들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무엇이 생겼다. 경이로웠다. 내가 앞으로 은퇴해도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싶다.”

―사춘기를 역도로 극복한 셈인가.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하지는 않았다. 사춘기도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친구가 ‘미란아, 비 오면 너무 슬프지 않니?’ 하면, ‘왜? 나는 안 슬픈데’ 이런 식이었다. 고1 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3개를 따면 90만원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집이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엄마한테 그 돈 갖다 드리면 좋겠다 싶어 열심히 했다. 그리고 다음 해 금메달 3개를 따버렸다. 단순한 아이였다. 하하하.”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열린 장미란 재단의 '올림픽 꿈나무 멘토링 캠프'에 참가한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청소년 선수들이 열대 지방의 해변에서 자라는 나무 아래에서 포즈를 취했다. 청 소년들은 성인 선수들보다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앉았다. 뒷줄 왼쪽부터 박진현(역도) 박기량(펜싱) 박의도(태권도) 홍현근(펜싱). 앞줄 왼쪽부터 최병철 장미란 장미령 정진선 선수. / 코타키나발루=신동흔 기자
청소년들의 멘토로 나선 11년 만의 휴가

장미란은 11월 1~4일 말레이시아의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에 머물렀다. ‘올림픽 꿈나무’들과 함께 한 이번 여행에는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최병철(펜싱 플뢰레)·정진선(펜싱 에페) 선수와 동생 장미령 선수가 각 분야에서 추천한 청소년들을 데리고 함께 참가했다. 파랑풍선 여행사와 이스타항공, 수트라하버 호텔이 이들을 후원했다.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한 학생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과 쉬고 운동하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자신들의 ‘롤 모델’들이 바로 코앞에서 들려주는 “내가 꿈을 이루면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된다”(최병철) 같은 한마디에 학생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캠프에 참여한 박진현(역도)군은 “언젠가 나도 다른 선수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을 해외로 데려와 캠프를 열었다.

“캠프에 온 아이들은 대부분 처음 해외에 나가보는 학생들이다. 나중에 국제대회 참가할 때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것보다 출국 경험을 미리 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재단은 어떻게 만들었나.

“운동선수들은 사랑과 격려만 받다가 자칫 받는 것에만 익숙해질 수 있다. 나는 기회가 되면 봉사활동 다녀야지 생각해왔다. 먼 미래로만 생각했는데 덜컥 재단을 만들게 됐다. 부끄럽기도 하다. 혼자만 생각하다 협력하고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나타나 올해 초에 만들었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후원을 주로 할 생각이다. 박태환 김재범 이용대 남현희 등 20여명이 멘토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비인기 종목 위주로 후원하는 이유는.

“프로 스포츠가 있는 종목과 달리 태릉에 있는 선수들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나도 한때 야구장에 딸린 반지하 연습실에서 역기를 들었다. 선수촌에서 20대를 꼬박 바쳐 그나마 메달을 따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선수가 더 많다. 처음 태릉에 들어왔을 때 은퇴를 앞둔 다른 종목의 32세 언니가 피부미용을 배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대를 모두 바친 것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전직 프로그램도 필요하고 체육인 공제회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멘토는 누구인가.

“이에리사 전 선수촌장께 많은 것을 배웠다. 매사가 정확하고 선수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닮고 싶다. 김성근 감독님한테도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분을 지도자로 만날 수 있다면 선수로서 행운이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은 두 분께 많이 상의한다.”

―주로 어떤 것을 상의하나.

“선수들 사이에서는 내가 선배지만 그분들이 보시기에 나는 아직 어리다. 나도 경험이 많지 않아 판단이 서지 않는 일이 많다. 부상을 입거나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질 때도 찾아가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멘토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많은 분이 나더러 ‘말 잘한다, 책도 많이 볼 것 같다’고 하는데 사실 책 많이 안 읽는다. 다만,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편이다. 책 선물을 많이 받아 책은 많다.”

―캠프에서 올림픽 꿈나무들에게 학교 폭력이나 ‘왕따’(집단 따돌림)에 연루되지 말라고 당부하더라.

“내 학창 시절은 학교에서 까불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운동하거나 놀이를 했다. 축구를 하거나 고무줄을 하거나 배구를 하거나 늘 운동하면서 반 친구들과 두루 친했다. 지금 학교에서 체육 활동이 점점 사라지는 것과 ‘왕따’는 분명 연관이 있다. 체육인들이 그런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

―결혼은.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지 않을까. 부모님도 아직 별말씀이 없다.”

훈련장을 벗어난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분명 선수로서 그녀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내 전성기는 2008~2009년”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선뜻 바벨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경기장에 선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우리의 욕심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속 깊은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재단을 만들고 체육인의 복지를 걱정하고 스포츠 꿈나무를 키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또 다른 인생의 전성기를 맞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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