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5일 화요일

묵직한 악극, 화려한 노래 … 그들이 곧 오페라(2013.01.16)


올해 나란히 탄생 200주년
작곡가 바그너 vs 베르디

리하르트 바그너(1813~83, 左), 주세페 베르디(1813~1901, 右)

리하르트 바그너(1813~83)와 주세페 베르디(1813~1901).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두 명으로 꼽힌다. 그들이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았다. 두 작곡가는 같은 시기에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2013년 세계 클래식 무대를 달굴 바그너와 베르디를 3가지 키워드로 풀어봤다.


① 엄친아 VS 음악신동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 극작가 겸 작곡가 바그너가 태어났다. 베토벤(1770~1827)이 전쟁교향곡으로 알려진 ‘웰링턴의 승리’를 작곡한 해다. 관리 출신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컸다. 예술적인 가풍은 바그너를 만든 자산이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리 있었다. 1833년 첫 오페라 ‘요정(Die Feen)’을 발표했지만 그가 죽고 나서 초연됐다. 두 번째 작품 ‘연애금지(Das Liebesverbot)’는 무대에 올랐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말년의 바그너는 독일의 우월함을 예찬했다. 1867년 발표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선 “신성한 독일제국이 멸망해도 독일의 예술은 계속될 것”이라고 노래했다. 그가 쓴 작품은 훗날 나치정권을 홍보하는 선전도구로 사용됐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바그너는 두 가지 과제를 남겼다. 그의 음악에 어떤 찬사를 보내고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가 하나고, 그가 쓴 혐오스런 글과 나치에게 이용당한 흔적으로부터 그의 음악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지가 다른 하나”라고 평가한 배경이다.

 베르디는 같은 해 10월 10일 이탈리아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인숙을 경영했던 그의 아버지는 문맹이었다. 그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음악에선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음악 신동이 그렇듯 10대 무렵 작곡을 했고 후원자 덕에 음악을 시작했다. 양조업자의 후원으로 1828년 밀라노 음악원에 응시했으나 “음악적 능력이 부족하다”며 퇴짜를 맞기도 했다.

 베르디는 개인교습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1839년 첫 작품 ‘오베르토(Oberto)’를 발표했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베르디는 1842년 작곡한 ‘나부코(Nabucco)’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베르디의 음악은 유럽을 휘감았다.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는 극장 3곳에서 동시에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18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오페라 공연(총87회) 중 54회가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베르디의 장례식에는 작곡가 푸치니 등 25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오페라 ‘아이다’, ‘리골레토’ 등은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베르디의 팔스타프는 현대 이탈리아 음악의 최고봉이다. 그는 오페라에서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함에 도달했다”고 극찬했다.

 ② 혁신 VS 전통

 베르디는 이탈리아 음악 전통 위에 서 있었다. 몬테베르디·벨리니 등으로 이어진 이탈리아 오페라는 성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성악가가 무대의 중심이었고 오케스트라는 반주에 그쳤다. 오케스트라 피트에 70~80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성악가 한 사람을 위해 연주했다.

 베르디는 성악가를 중심으로 작곡을 했지만 새로운 실험도 이어갔다. 독창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2중창·3중창 등을 도입했다. 무대도 중시했다. ‘오페라 백화점’이라 불리는 ‘아이다’에선 그 어떤 작품보다 화려한 무대를 시도했다. “오페라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바그너의 이상향이었다. 교향곡에 합창을 도입한 ‘합창’은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는데 바그너는 “더 이상 음악이 나아갈 자리가 없다. 9번 교향곡은 모든 예술의 종합”이라고 칭송했다.

 바그너는 혁신의 대변자였다. 그는 오페라 대신 ‘음악 드라마(music drama)’라는 자신이 만든 용어를 썼다. 그는 성악가가 주도하는 오페라 공식을 버렸다. 반복적인 음악을 통해 특정 인물이나 장소 등을 떠올리게 하는 지도동기(leading motif)를 고안했다. 오케스트라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성악가와 함께 공연을 주도한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지만 바그너의 작품에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바그너 공연엔 쉬는 시간이 없다. 관객들도 4시간 동안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작품에만 집중해야 한다. 바그너 작품의 실황 연주가 드문 이유다.

 ③ 신화 VS 일상

 바그너의 작품은 어렵다. 그는 작곡은 물론 대본도 직접 썼는데 대부분 신화나 전설을 기반으로 했다. 그래서 신화에 사용된 상징과 은유를 파악하지 못하면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평론·극작·작곡은 물론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니체 등 당대 철학자들과 교감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에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와 불교의 해탈(解脫) 등을 담았다.

 반면 베르디의 작품은 일명 ‘구민회관 오페라’다. 그의 마지막 작품 ‘팔스탈프’를 제외하곤 모든 작품이 비극이지만 사랑·이별·배신 등 대중이 다가가기 쉬운 감정만 추려서 담았다. 삼각 관계 등 스토리 라인도 단순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베르디는 극작가 및 무대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며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빚어냈다.

바그너는 이런 작곡가 … 

조수철
“성악에 묻혀 있던 음악을 성악과 대등한 위치로 만든 극작가.”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바그너협회 조수철(64) 회장이 보는 바그너의 진면목이다.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로 있는 조 회장은 작곡가와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학자. 1994년 ‘모차르트 이펙트’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바그너 음악의 특징은.

 “음악과 드라마(극)의 완벽한 결합을 주장했다. ‘뮤직 드라마’로 그것을 실현했다. 오페라가 현란한 성악 기교와 화려한 무대미술 등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해 음악을 강조했다. 그의 작품에서 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성악가들의 반주자가 아니었다. 철저한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많이 사용했다.”

 -바그너는 전통적인 오페라와 다르게 멜로디를 강조했다. 바그너 작품이 이전 오페라와 다른 지점은.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음악(성악+오케스트라)과 극의 결합인데 바그너는 어느 쪽에 우위를 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바그너가 혁신한 부분은.

 “성악 파트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중창을 없앴고 반복구를 제거했다.”

 -바그너 작품은 ‘인텔리’ 이미지가 강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바그너 음악은 신화를 기반을 하고 있다. 윤회사상 등 철학적 내용이 담겨 있고, 음악과 극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조금만 줄거리를 알고 오면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재미있다. 음악이 큰 역할을 하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베르디와 비교해 인기가 적었다.

 “바그너 작품은 공연 시간만 보통 4시간이다. ‘링 사이클’(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은 16시간에 이른다.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어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없다.”


베르디는 이런 작곡가 … 

박세원
“성악가를 가장 잘 이해한 작곡가.”

 박세원(66) 서울대 음대 교수는 작곡가 베르디를 이렇게 평했다.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박 교수는 성악가 출신으로 베르디 전문가로 손꼽힌다.

 -성악가로서 베르디 작품을 평가한다면.

 “베르디의 곡들은 성악가들에게 교과서 같은 곡이다. 그가 만든 작품은 노래를 하면 할수록 더욱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근육의 훈련이 된다는 얘기인데 요즘 말로 성악가들의 생리에 대해 훤하게 꿰고 있었다. 게다가 소프라노와 재혼해 같이 살았으니 성악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거다. 성악가 입장에서 베르디의 작품은 명품 중의 명품이다.”

 -베르디 음악의 특징이라면.

 “오페라가 보여줄 수 있는 장중함을 갖추면서도 지극히 서정적이었다. 난해한 화성을 되도록 쓰지 않았다. 그래서 만인이 공감하는 멜로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벼운 것도 아니다. 경쾌함이 있지만 변화무쌍한 음악이다.”

 -바그너에 비해 가볍다는 지적도 있다.

 “베르디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로애락을 예리하게 표현했다. 오페라는 당시에도 상당한 인기를 끈 장르였다. 베르디는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만들까 고민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사회적 메시지도 강했다.

“베르디는 귀족들의 특권에 대해서 풍자를 했고 인습에 대한 저항을 담아냈다. 예컨대 ‘라 트라비아타’에선 사회적인 인습에 의해 죽어가는 가련한 여인을 주목했다. 이런 의미에선 지극히 인간적인 오페라 작곡가였다. 음악을 통해 항상 약자의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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