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대형 증권사 중 하나인 현대증권은 올 3월 홍콩 현지법인에 대한 1억달러(약 1104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는데, 이 계획은 시작도 못한 채 좌초 상태입니다. 이 회사 노동조합이 "유상증자 과정에 회사와 상관없는 인물이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의혹을 폭로한 후 고발했는데, 검찰이 관련 수사에 착수했고 금융당국은 유상증자 승인 건을 보류했기 때문입니다. 노조의 폭로가 검찰은 물론 금융당국까지 움직인 것이죠.
더 놀라운 것은 서울 여의도 증권가의 반응입니다. "역시 현대증권 노조다" "또 한 건 했다"며 덤덤해하더군요. 현대증권 노조는 작년 11월에는 국회에 가서 "모(母)기업인 현대그룹을 지배하는 인물은 (현정은 회장이 아니라) 따로 있다"며 H씨를 지목하며 녹취 파일과 녹취록까지 공개했습니다. 노조가 내놓은 녹음 파일엔 현대그룹 금융 계열사 임원들이 작년 9월 26일 서울 강남 아셈타워에서 회의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욕설도 들리고, 노조를 비판하는 일부 임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들립니다.
노조 측은 이에대해 "임원들의 노조 파괴 공작 회의"라고 주장했고, 현대그룹 측은 "노조를 탄압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습니다. 노조의 연이은 의혹 제기로 현대그룹측이 현대증권 노조를 두려워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지난 2010년 10월 12일 저녁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 본사 앞에서 현대증권 노조원들이 현대건설 인수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자금력·조직력·정보력 등 삼박자 갖춘 노조
증권업계에서는 현대증권 노조의 특징을 ①풍부한 자금력 ②조직 장악력 ③자사 주식 보유 및 정보력으로 꼽습니다.
증권업계에서는 현대증권 노조의 특징을 ①풍부한 자금력 ②조직 장악력 ③자사 주식 보유 및 정보력으로 꼽습니다.
먼저 현대증권 노조는 기본급을 기준으로 조합비를 징수하는 여타 증권사 노조와 달리, 월 지급 총액의 1% 내외를 조합비로 거두고 있습니다. 노조에 가입한 직원의 급여에서 공제하는데, 조합원이 2000명 안팎인 점을 감안할 때 매월 1억원 정도(연 12억원)의 조합비가 징수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적립한 노조 자금은 30억원대로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여유자금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신입사원부터 과장까지는 입사와 함께 노조에 필수가입하는 '유니언숍'을, 차장 이상의 경우 노조에서 승인해 가입시키는 '오픈숍' 형태를 각각 운영해 조직 장악력이 강합니다. 조합원 규모는 약 2000명으로 가입률이 90%가 넘는데, 동종 업계의 우리투자증권(70%대), 대우증권(67%대)보다 훨씬 높습니다.
노조는 올 4월 4일 현재 자사 지분의 0.46%(109만2098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3년 현대증권 매각 반대를 위한 주식 모으기 운동을 통해 직원들로부터 동의서를 받아 자사주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노조는 주주(株主)라는 지위를 통해 회계장부열람권, 저축은행 신주발행 유지청구권 등을 사측에 행사해왔습니다. 노조 측은 "매월 1억원어치씩 자사주를 사들인다”며 “법적 테두리 안에서 회사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증권 노조는 '정보 획득'을 노조 활동의 상위 우선순위에 놓고 고급정보 수집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현대그룹 의혹 사건 역시 현대증권 노조가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모았고 여러 제보자들의 정보를 종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 녹음 파일의 경우, 익명의 내부 제보자가 여러 파일로 녹음된 회의 내용을 보내왔다는 겁니다. 이동열 수석부위원장은 "일반적으로 공식 회의에서 임원 발언을 기록하거나 녹음하지 않느냐"며 "이 파일 역시 회의록으로 쓰기 위해 녹음됐는데, 몇 번의 경로를 거쳐 우리에게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지난 2012년 11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경윤 현대증권 노조위원장이 현대그룹 관련 녹취록에 대해 기자간담회를 주관하고 있다. /현대증권 노조 제공
13년간 노조 상근하며 올해로 9년째인 현 노조위원장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핵심 인물은 민경윤 노조위원장입니다. 그룹 수뇌부의 동선(動線)을 정확하게 파악할 만큼 계열사와 그룹 내부의 인맥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90년대 중반 현대증권에 입사해 2000년부터 올해로 13년째 노조에서 상근활동 중입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핵심 인물은 민경윤 노조위원장입니다. 그룹 수뇌부의 동선(動線)을 정확하게 파악할 만큼 계열사와 그룹 내부의 인맥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90년대 중반 현대증권에 입사해 2000년부터 올해로 13년째 노조에서 상근활동 중입니다.
사무국장과 부위원장을 거쳐 2005년 9대 현대증권 노조위원장을 맡았는데, 올 3월 4번째 연임에 성공해 2016년 7월까지 위원장을 맡게 됐습니다.
현대증권 노조에는 매일 노조 사무실로 출근해 노조 업무만 하는 상근자가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정책실장, 기획실장 등 6명입니다. 증권가에서는 2004년 현대증권내 콜센터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화와 계약직 입사자의 1년 후 정규직화 등이 노조의 노력 덕분이라고 봅니다. 직원들의 임금이나 복지 수준 등도 증권사 중 상위 수준으로 꼽힙니다.
민 위원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직원들이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는 것은 노조 보다는 회사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 회사 측이 노조의 주장을 받아준 데 대해 상당한 고마움을 느낀다. 서로 입장을 이해해주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현대증권이 강성 노조라는 지적에 대해, “우리는 법 테두리 안에서 노조 활동을 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어 강성 노조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강성노조는 법과 원칙을 어길 때 적용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는 "다른 증권사들의 노조 활동이 워낙 미미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우리가 부각되는 것"이라며 "일부 노조들은 회사측으로부터 승용차도 받고, 골프도 치러 다니지만 우리는 당당하다. 사측에서 과일 한 박스를 보내도 반드시 돌려보낸다"고 말했습니다.
노조 위원장으로 너무 오래 장기 집권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민 위원장은 "(위원장을) 그만두려던 때 터진 회사 비리 때문"이라며 "2009년 현대상선 주가 조작 등이 그런 사례"라고 했습니다. 회사의 비리를 막아야 직원들이 맘 놓고 회사에 다니는 데, 막상 떠나려는 시점에 (회사의) 문제가 터졌다는 거죠.
“최근 H씨에 대한 폭로 건도 '고(故) 정몽헌 회장 때는 좋았던 회사가 H씨라는 외부인에게 자꾸 의존하고 있어 누군가 견제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졌어요.”
서울 여의도 현대증권 본사에 있는 노동조합 사무실. /현대증권 노조 제공
화이트칼라 노조의 변신 모델? 양보하며 접점 찾을 수 없나?
노동계에서는 현대증권 케이스를 회사 측과 맞부딪치지 않으면서 법 테두리 안에서 정보를 무기로 위력을 극대화하는 '화이트칼라' 노조의 변신 사례로 평가합니다.
노동계에서는 현대증권 케이스를 회사 측과 맞부딪치지 않으면서 법 테두리 안에서 정보를 무기로 위력을 극대화하는 '화이트칼라' 노조의 변신 사례로 평가합니다.
과거 현대차나 기아차 등 제조업 기반의 노조가 보여줬던 장기 파업이나 철탑 농성, 폭력 시위 등이 아니라 정보력으로 사측과 이해 관계자를 설득하고 투쟁을 벌인다는 겁니다. 현대그룹이 속수무책인 것은 정보력에서 크게 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물론 현대증권 노조가 반드시 정의롭다고는 보기 힘든 측면도 많습니다.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시장경제 체제 사회에서 노조가 경영권 문제, 그것도 모(母)기업 문제에 깊숙하게 간여하고 '폭로'까지 하는 모습은 볼썽사납기 때문입니다. 주요 경영진을 무더기로 고소하고, 추진 중인 사업까지 좌초시키는 것은 기업 활동과 성장에 마이너스 요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사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장이 힘이 없고 외부인이 그룹을 좌지우지한다는)폭로가 정말로 기업에 이득이 되겠느냐”며 “특히 경영권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고, 노조의 문제제기가 갈등만 심화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그룹 인사들의 비밀스런 회의 녹음 파일이 자(子)회사 노조에까지 흘러갈 정도가 됐다는 사실은 그 만큼 내부 불만과 갈등이 심각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그룹측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노조의 주장과 활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비밀 파일이 전달되고, 일개 계열사 노조가 그룹 전체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이미 줄줄이 경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현대아산은 대북관련 사업 중단으로, 현대상선은 해운업 장기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현대엘리베이터는 외국업체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고 있지요. 유일하게 버텨온 현대증권도 최근 증권업 장기 불황으로 만만찮습니다.
안팎의 어려운 상황에서 현대그룹과 현대증권 노조가 서로 양보하며 접점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갈등과 반목을 넘어 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개척과 도전의 기업가정신을 한번 되새겨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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