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예수와 소크라테스’
한국 키에르케고어학회(회장 황종환 교수) 주최 공개강좌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24일 오후 4시 서울 잠원동 신반포중앙교회(담임 김성봉 목사)에서 개최됐다.
학회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유명한 덴마크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키에르케고어, 1813. 5. 5-1855. 11. 11)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그가 태어난 봄과 사망한 가을마다 일반인들을 위한 공개강의를 열고 있다. 지난 봄에는 ‘키에르케고어와 자끄 엘룰’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강영안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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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한길사)>,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강대출판부)>, <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이상 IVP)> 등을 쓴 철학자 강영안 교수(서강대)가 강사로 나섰다. 최근 한국철학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강영안 교수는 대표적인 기독 철학자 중 한 사람이며, 칸트를 전공하고 한국 칸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강영안 교수는 표재명 교수(고려대)가 번역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의 부스러기>를 바탕으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철학적 단편>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책은 키에르케고르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필명으로 쓴 세 권의 책 중 가장 먼저 쓴 글이며,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비교하면서 ‘지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3가지 차이점: 죽음에 대한 태도, 가르침의 방식, 공감의 능력
강 교수는 먼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삶에 나타난 3가지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번째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 또는 방식이었다. 그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처절하게 힘들어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죽어갔다”며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가 70대였던 반면, 예수님은 30대 청년이셨다는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관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두 인물의 차이는 ‘죽음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봤는데,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 사건’으로, 그 자유는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영혼이 육신의 오염에서 정화돼 본래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카타르시스’로 여겼다.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단순히 모든 삶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영혼이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사건으로 봤다”며 “이러한 사상은 서양 기독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구약성경에서 육신은 전혀 비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같았지만, 서양 기독교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육신을 비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이같은 태도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앞두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칠 정도로 굉장히 괴로워하는 등 ‘죽음’이라는 현실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음을 ’마지막 원수’라고 했고, 예수의 부활로 마지막 그 원수를 이겼다고 표현했다”며 “예수님에게 죽음은 철저히 악한 현실과의 싸움이자 하나님의 창조와 대립되는 현상이었고, 부딪치고 싸워서 결국 부활이라는 승리를 얻어냈다”고 비교했다.
두번째는 ‘가르치고 관계하는 방식’에 있었다. 강 교수는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해답을 주신 분이라 질문하거나 문제를 따지고 깊이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의 승천까지 예수님은 겹치는 것까지 쳐서 305가지를 질문하셨다”며 “이렇게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 바로 ‘질문의 명수’ 소크라테스”라고 전했다.
둘 모두 지식을 통해 사람을 바꾸고 싶어했지만, 질문의 방식이나 내용은 달랐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사물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발견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정확한 정의를 구한다기보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비유를 통해 현실을 드러내 직시하게 했다.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수학적·연역적 방식으로 정확히 정의를 내리면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앎은 단순한 정보 획득이 아니라 변화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며 “그러나 자전거를 앞에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타야 탈 수 있듯, 행함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번째로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은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을 느끼거나 하는 감정이 풍부하지 못했다는 것.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큰 전쟁을 세 번이나 치른 일종의 ‘전쟁 영웅’일 만큼 체력이 강했고, 누구에게 유혹당하거나 남을 돕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술에 취하는 일도 없었다”며 “이에 반해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셨다’는 성경구절이 여러 번 나올 정도로 사람들과 공감하셨다”고 설명했다.
소크라테스 “진리는 내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
예수님 “진리가 내 속에 없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
예수님 “진리가 내 속에 없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
이같은 전제를 놓고, 강영안 교수는 키에르케고르가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대비하면서 ‘지식’과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 교수는 “키에르케고르가 활동하던 19세기는 계몽주의 시기로, 이성을 통한 삶의 길 찾기가 유행했고 어떤 전통보다는 인간 이성의 판단에 따라 삶의 길을 찾으려 했다”며 “그래서 역사학이 시작됐고, 신학에서도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등 철저히 계몽주의적으로 따지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신적 존재보다는 나사렛에 살았던 한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강 교수는 “이성은 한 마디로 하나의 ‘체계’이고, 현실을 파악하는 통로인데, 칸트는 이러한 이성이 ‘쌓기를 좋아하는’ 체계적 존재이지만 충분한 자료가 없으면서도 쌓아가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며 “이성으로 보면 개개의 신자들도 하나의 체계 속에서 한 부분 가운데 이해될 수 있을 뿐 단독자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의미에서 체계가 아닌 ‘부스러기’로서의 철학을 이야기했고 이러한 의도로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들여다봤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여기서 이성과 관련해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두 가지 삶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우리 영혼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지만, ‘레테의 강’을 건너오면서 이를 잊어버렸으므로 이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강조한다. 강 교수는 “페스탈로치 등이 말하는 현대 교육에 깔린 생각도 이것으로, 진리는 이미 그 사람 안에 갖춰져 있으니 잘 알 수 있도록 깨우치고 회상하도록 ‘산파술’, 즉 대화와 담론을 강조한다”며 “진리나 참된 지식은 존재하고, 이미 우리 속에 내재된 이것을 대화로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기독교적 출발점’이다. 이는 몇 단계로 나뉘는데, 먼저 ‘비진리’다. 그는 “진리는 내 속에 없고, 참된 앎은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며 “그 다음에는 내가 비진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 ‘비진리’는 내게 있는 ‘죄’이고 그 죄에 대해 인식하는 ‘카이로스’의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은 ‘믿음’, ‘신앙’이다. 이를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변화가 바로 ‘회개’, ‘회심’, ‘전환’이고 이어서 ‘뉘우침’이 일어나며, ‘다시 태어남’, ‘거듭남’, ‘중생’이 이뤄진다.
▲이승구 교수(국제신대) 사회로 열린 이날 강연회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과 강영안 교수의 강연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이 참석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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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교수는 “이러한 배움은 ‘앎과 진리는 이미 내 안에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전혀 다르다”며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은 ‘구주로서의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고, 소크라테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인 점도 소크라테스와 다르고, 이는 불교와 도교 등 동양 사상들과도 틀리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왕과 하녀>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왕이 한 시골 처녀를 사랑하게 됐는데, 그녀와 결혼하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궁으로 불러들이는 (신분) ‘상승’인데, 이는 주고 받는 참된 사랑이 되기 힘들다. 그렇다면 왕이 시골 처녀처럼 평민이 돼 나타나는 ‘하강’만 남는데, 이를 그는 ‘종’이라 표현하고, 이는 ‘종으로 오신 하나님’과 연결된다. 강 교수는 “옛 교부신학 용어로 이는 ‘하나님이 사람 된 것은 사람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해’이다”며 “이성적으로는 무한자가 유한자가 된다는 것으로 논리적 모순인데, 이것이 역설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믿음’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믿음은 일종의 비약이 포함돼 있는데, 나의 지적 능력을 유보하고 오직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 그 분과 관계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며 “키에르케고르는 신뢰하고 수용하며 받아들임을 통해 제자가 되는 것이지, 예수와 가까이 있었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참된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답했다”고 했다.
예수와 소크라테스… 신앙과 지식, 그리고 역사
이제 긴 논의를 마치고 결론에 다다를 때다. 강영안 교수는 “그리스도의 길, 신앙을 통해 역설을 역설로 받아들이는 길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그 안에 소크라테스의 길이 내포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앙과 지식의 문제를 놓고, ‘자신의 내적 진리를 일깨우는 길’과 ‘바깥에서 진리를 배우는 길’이 서로 반목하거나 배척·대립하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신앙과 지식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없고, 오직 지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선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신앙’과 ‘믿음’이다. 그러나 이를 역설로서 받아들이고 예수와 관계를 형성했다 해서 ‘지식’이 아무 소용 없는 것인가. 강 교수는 “첫번째 단계에서는 둘 사이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이럴 때 비로소 우리가 추구하고 갖고 있던 이 지식을 그 속에 포함시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다. 강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방식에서는 사실상 역사가 중요하지 않고, ‘순간(카이로스)’은 의미가 없이 모든 것은 동일하게 발생한다”면서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삶의 역사는 항상 새롭고,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울 뿐 아니라 오늘, 현재를 항상 새로운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예수에 대해 알기 위해 모든 역사적 자료를 다 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태어나셨고 가르치셨고 돌아가셨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사람 되심’의 역설을 알 수 있다는 ‘역사적 최소주의’를 설파했다.
그럼에도 이 ‘역사’는 중요하다. 강영안 교수는 “기독교에서는 이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교사가 중요하다”며 “믿음의 대상은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로, ‘교설(敎說)이 아니라 교사(敎師)’가 중요하다”고 정리했다. 어떤 원리나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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