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는 동안 내 맘에 꼭 맞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한가? 나 또한 다른 사람들 마음에 어찌 꼭 맞겠는가?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이 어찌 다 좋은 말 뿐이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릴 것이니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이 세상이 어찌 내 마음에 들게 꼭 맞추어 주랴. 비록 속상하고 마땅치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세상은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살자. 살다 보면 가깝고 다정했던 사람들도 어느 날 멀어져 갈 수 있지 않던가. 온 것처럼 가기도 하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잘 안되는 일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때로는 잘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냥 그저 그럴 때도 있으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헤어지고 싶은 때도 있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피하신 적이 있으셨다는데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너무 아파하지 말자.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기쁨도 주지 않던가?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당신을 비난했다 해서 분노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격려하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도 있지 않던가?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차가운 겨울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내려 줄 때도 있지 않던가?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수평적 관계, 즉 인간 상호간 관계는 위에 언급한 마음과 자세로 대하는 게 좋다. 좀더 참고 양보하며 한 템포 늦춰 뒤따라가는 일도 귀한 것이다. 여유와 포용력이 인간관계를 윤택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식적 관계 즉 인간 대 하나님의 관계는 응용하기보다 철저히 순종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대한 인간(피조물)의 도리와 책임에 충실해야 한다. 캐나다 토론토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People’s Church”가 있는데, 325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위대한 교회라 한다. 예수님의 유언(당부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현관 입구 바닥에는 “World mission first”(제일 먼저 세계 선교부터)라는 사명 다짐이 새겨져 있어 그곳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니 멋있다.
하나님께는 철저하되 인간관계는 너그러워야 하겠다. 옛날 어느 혁명가가 있었다. 그는 30대에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40대가 되니 세계는 그만 두고 나라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50대에 이르자 나라는 그만두고 자기 가정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기도했다. “주님, 우리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60대가 되자 가정은 그만 주고 자기 자신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주님 저를 변화시킬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 기도를 거꾸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나 자신 -가정-국가-세계 순으로 변화가 확산되게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먼저 변하고 새로워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신념, 그리고 기대와 판단이 바뀌면 똑같은 환경(대상)이라도 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생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점검해 보자.
①내가 원하는 사람이나 물건들은 모두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는가? ②상황이 바뀌고 다른 사람들이 바뀌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는가? ③행복은 미래에 있고,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는가? 그냥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부담없이 느끼고 누리자. 잘 듣고 싶으면 고막에 사랑이 있게 하고 잘 보고 싶으면 눈동자에 사랑이 있게 하라. 그리고 잘 살고 싶으면 가슴에 사랑이 있게 하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런저런 조건을 정해놓고 그것이 안 된다고 자신을 들볶지 마라. 그냥 현재 모습, 있는 그대로 느끼고 누리고 기뻐하라.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수도 없고 또 내 뜻대로 되어서도 안 된다. 나만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사 짓는 사람은 비 오기를 바라고 소금 만드는 사람은 햇볕 쨍쨍 나기를 바란다. 우산 장수는 비오기를 기다리고 짚신 장수는 비오지 않기를 기다린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이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겠나?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만사를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1cm라도 더 크게 또는 작아지게 할 수 있나. 우리가 속썩는다고 흰 머리칼이 검은 머리칼로 바뀌겠는가?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신속히 변화시킬 용기를 구하고,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평화를 구하며,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인지 변화 시킬 수 없는 일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라. 이것이 신앙인의 정당한 자세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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