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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일 목요일

20대때 독일 간 간호사 "가족 울까 편지도 참아,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2013.01.04)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2] 50년전 독일로 떠난 딸들

獨 병원측이 '동백아가씨' 틀어주며 한식 차린 날
양배추 김치에 목메어 부둥켜 안고 눈물만…
라인江 기적 독일인도 '야근 악바리'에 놀라더라
그 눈물젖은 외화가 내 부모·형제·조국을 일으켜

파독 간호보조원(현 간호조무사) 출신의 재독 화가 노은님(67)씨의 작업실은 독일 남서부 2만명이 사는 작은 도시 미헬슈타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성(城)이었다. 250년 된 성에서 화가는 올해 미국에서 열리는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새와 물고기 그림이 집안 곳곳 가득했다.

노씨는 24세 때인 1970년 독일로 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어디로든 멀리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연히 '파독 간호원(간호사) 모집'이란 신문 광고를 보고 주저 없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외항 선원 사고가 많은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시립외과병원이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선원들이 거의 매일 들이닥쳤다. 일은 고되고, 낯선 나라에서 홀로 지내는 하루하루는 외로웠다. 그 힘든 날들을 견디기 위해 고향 전주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씨가 어느 날 몸이 아파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 그동안 그린 그림 수십점을 보게 됐다. 간호부장은 "병원에서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노씨는 "전시회를 열었더니 그림이 팔렸다. 내 1~2년치 연봉을 내고 그림을 사간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전시회가 끝나자 이번엔 병원장이 추천서를 써줘 함부르크 국립 조형예술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모교 교수가 됐고 동료 독일인 교수와 결혼했다. 1982년 고(故) 백남준의 주선으로 고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화가 노은님씨와 남편 게르하르트 바치씨. 노 화가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남편은 이 대학의 동료 교수였다. /미헬슈타트(독일)=양모듬 특파원
파독 간호사 사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됐다. 광부 파견과 비슷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부족한 간호 인력을 한국에서 충당하길 원했고 우리 정부는 간호사들이 송금한 외화를 경제 발전에 투입하려 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사업이 본격 시작하기 전 민간 차원에서 떠난 간호사까지 포함해 1만1057명이 당시 독일로 갔다. 현직 간호사를 비롯해 단기 교육을 받은 간호조무사들이 독일 각급 병원에서 일했다. 간호사는 야근이 많아 독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힘든 직업으로 통했다.
 정부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인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야근을 자청하며 돈을 벌어 조국의 부모 형제들 생활비와 학비로 보냈다. 사진은 1960년대 한복을 차려입고 독일의 한 공항에 내린 파독 간호사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독일로 간 한국 여성 간호사들은 부지런히, 악착같이 일했다. 수당이 많은 야간 근무를 도맡아 했고, 쉬는 날에도 다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69년부터 3년간 듀스부르크시립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했던 윤기복(67)씨는 "그땐 정말 수도 없이 야근을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신생아 병동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목욕을 시켰다. 15일간 야근하면 10일을 쉴 수 있었다. 남들이 한 달 700마르크 벌 때 윤씨는 병원 두 곳에서 야간 근무를 하며 1200마르크를 벌었다.

4남매의 장녀인 윤씨는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다가 진 빚을 갚아야 했고, 동생들 학비도 대야 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화가 노은님씨도 "김치 담그기 위해 양배추 사는 돈을 제외하곤 거의 전액을 부모님께 보냈다"고 했다. 노씨는 "돈을 보내면서 외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가족이 내 편지 읽으며 운다는 걸 알고는 돈만 보냈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처음엔 "한국 간호사들은 돈 욕심이 많은가보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간호사들이 죽기 살기로 일하며 번 돈을 가족들 생활비로 보내거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독일의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인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의사·간호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파독 간호사들의 근면한 모습은 독일인들에게도 감동을 줬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꽃다운 20대, 타향살이의 설움이 터져 나올 때면 간호사들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윤기복씨는 병원 측이 한국인 간호사를 위해 마련해준 한식을 먹으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베트남 쌀로 지은 푸슬푸슬 한 밥에 양배추 김치를 보니 목이 메었다. 그는 "우리를 위한다고 병원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틀어줬는데 그걸 들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한 설움은 없었다.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간 백정신(68)씨는 "파독 간호사는 독일인 간호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외국인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했다. 베스트팔렌 소아과병원에서 근무했던 황보수자(71)씨는 "독일 간호사보다 인간적으로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2013년 1월 1일 화요일

[여의도포럼-이성낙] 가짜 派獨광부 손톱에 낀 석탄가루(2012.12.31)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선 젊은이들의 도전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2013년은 우리나라가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이라는 낯선 외지로 파견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1960년대 열악하던 우리 사회상을 떠올릴 때면 파독 광부·간호사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곤 한다.

반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낯선 땅에 첫발을 디딘 당시 광부·간호사들이 이젠 백발의 노인이 되어 지난날의 고생스럽던 일들을 초연(超然)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이는 마치 메마른 땅에 내리는 봄비와 같이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그러나 한편 필자의 마음속에 있는 한 학우의 얼굴을 떠올리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흘려듣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1960년대 초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무렵 파독 광부라는 이름으로 독일 땅을 밟은 옛 학우가 멀리 떨어진 광산지역에 왔다는 사연의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외지에서 옛 학우와의 만남이라 그저 반가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만난 지 몇 시간이 지나자 차츰 국내 명문대를 졸업한 그 학우가 자신의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부로 왔다는 사실, 그리고 함께 온 동료들 중에는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당시 국내 저명한 일간지 현역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광부로 온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그곳에서 만난 이들 중 어느 한 명도 ‘진짜 광부’는 없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1960년대 국내 사정이 열악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더욱 마음 아픈 기억이 있다. 그 학우는 필자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톱에 낀 석탄가루를 보이고 싶지 않아 닦아내려고 며칠 동안 수없이 비누로, 칫솔로 문지르고 또 문질렀지만 미세한 석탄가루를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며 허탈해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보여준 손가락에는 손톱 주변으로 까만 실이 박혀 있는 듯했고, 석탄가루가 문신처럼 박혀 있었으며, 손톱 주위를 얼마나 세게 문질렀는지 핏자국이 보이는 미세한 상처 또한 있었다. 순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가슴에서 일렁거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당시 그들은 국내에서는 별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없어 과감하게 파독 광부라는 탈출 기회에 올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불굴의 정신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약 기간이 끝나자 적지 않은 수가 독일 대학에 입학해 전공 학위를 취득했고, 일부는 독일 사회에서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일부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는 당시 우리 ‘가짜’ 파독 광부들이 얼마나 우수한 인재들이었는지, 그들이 광부라는 멍에를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얼마나 과감하게 도전했는지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파독 광부·간호사 이야기가 나오면 1964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그들과의 만남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대통령 내외를 국빈으로 초청한 서독의 뤼프케 대통령은 박 대통령 내외가 파독 광부·간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 동행했다가 실로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박 대통령 내외가 자리한 단상은 물론 행사장 전체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뤼프케 대통령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감동의 순간이 연출된 것이다. 이는 즉시 서독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그 소식을 접하며 눈시울 붉히던 기억이 필자에게는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손톱에 낀 석탄가루를 며칠 동안 비누로, 칫솔로 씻어내려고 고생하고 고민하던, 우리 시대가 낳은 ‘가짜’ 광부의 얼굴들이 떠오르면서 그들이 남긴 50년의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오늘 우리 삶의 많은 뿌리에는 파독 광부·간호사의 뚜렷한 발자취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