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삼위일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삼위일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1월 3일 목요일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① 신학이란(2013.01.03)


기사이미지

국민일보는 평신도 독자들의 신학적 훈련과 교육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를 새로 연재합니다. 베스트셀러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의 저자인 김동건 영남신학대 교수가 집필하는 이번 강좌는 모두 11개의 큰 주제로 구성됩니다. 각 주제는 기독교의 정통적 주제이면서 평신도들도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신학입문에서부터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등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이번 강좌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주제들을 이해하고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믿음 단련 위한 신학 대장정 나선다

‘신학’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가장 오래된 분야 중 하나이다. 기독교 신학은 약 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학’은 2000년 동안 다양하게 사용됐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게 됐다. 현재에도 신학은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게다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더욱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오늘은 신학에 대한 간략한 정의와 역사에 대해 말하려 한다.

먼저 신학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자. 신학(theology)은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그리스어 결합으로 이뤄졌다. 문자적 의미는 ‘신에 대한 이론’이며 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의미한다. 신에 대한 논리적인 연구,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인 시도를 지칭한다. 즉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 것을 학문적 체계로 서술한 것이다. 물론 이 정의는 사전적인 규정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이제 ‘신학’이 시대별로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살펴보겠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역사 초기인 교부시대부터 사용됐다. 기독교가 형성되던 로마제국은 강력한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 문화는 주변국에 비해 군사와 경제적 우위뿐 아니라 철학, 법, 예술, 종교 등에서 높은 수준의 업적을 이뤘다. 종교적으로는 신플라톤주의, 스토아학파, 페르시아의 밀의종교, 영지주의 등이 경합을 벌이며 활발한 다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강력한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신학은 무엇보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변증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과 섭리에 대해, 신앙과 삶에 대해,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기독교가 공인받기 전 박해의 시기 동안 신학은 비교적 덜 체계적이었다. 비록 신학 작업이 조직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에 제시한 신학의 방향은 그 후 기독교 역사에 결정적인 토대가 됐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학은 공개적인 연구와 논의를 시작했다. 4세기부터 시작된 중세기에 신학은 체계화되고 교리적으로 안정됐다. 이 시기에 신학은 이론적이 되고 학문적으로 발전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과 같은 신학의 핵심 주제들이 모양을 갖추고 여러 교리들이 교회의 공적인 입장에 따라 제정됐다. 12세기까지 로마제국의 용인 아래 신학은 어려움 없이 교회와 학문의 영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졌다.

12세기 이후 유럽의 오래된 대학들은 대체로 교양, 의학, 법학, 신학이라는 네 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입문과정인 교양을 마치면 상위과정인 나머지 세 분야를 공부했는데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의 분야’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신학이 학문으로 굳건한 위치를 확보했지만 신앙공동체와 직결된 실천적 성격은 약화됐다. 신학은 철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이론적 특징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경향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까지 지속됐다.

종교개혁가들은 신학을 단순히 이론이나 학문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삶과 분리된 교회, 삶과 분리된 신학을 비판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삶 속에서 살아있는 방법으로 매개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판에 박힌 교리를 거부하고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으며 이것이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신학은 삶과 역사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실천적 성격을 가졌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신학의 개념이 많이 달라진다. 계몽주의를 거치며 근대사회가 형성됐다. 이때가 되면 다양한 학문의 분과가 생기고 사회구조의 변화,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발전,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과 우주관이 형성된다. 많은 대학이 설립되고 교회의 간섭 없이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 시대가 되면서 신학은 다른 학문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상실한다. 신학은 일반 대학에서 많은 분야 중 한 분야로 위축된다. 이런 추세 속에서 교회는 직접적인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을 위해 자신의 교파에 맞는 신학교를 세운다. 이 시기에 신학은 대학에 속하는 학문의 한 영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목회자가 되기 위한 일정한 교육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20세기 들어 ‘신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의미, 학문적 작업, 교리와 교파가 지향하는 신앙의 이론 작업, 목회자가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의 의미 등으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신학’을 명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신학하다(theologize)’라는 동사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학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필자는 이번 호에서 ‘신학’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았으나 다음 주부터 신학의 분야, 신학의 역할, 신학과 신앙, 신학과 교회 등을 매주 한 주제씩 다룰 계획이다. 이 주제들을 통해 독자들은 신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신학을 통해 신앙이 굳건해지며 활기를 얻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김동건 교수는

영남대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를 거쳐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석사 및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영남신학대와 장신대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현대인을 위한 신학강의’ 등 10여권이 있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이장식 칼럼] 삼위일체 신앙과 그 흔적(2012.12.04)


이장식·한신대 명예교수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신앙인에게는 신앙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의 말에서 배운다. 그는 누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기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말했다.(갈 6:17) 그 흔적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아 알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일 수 있다. 중세기 성자로 꼽히는 성 프란시스코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흔적이 그가 죽을 때 그의 손바닥에 나타났다고 한다. 반드시 가시적인 흔적만이 흔적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앙을 믿고 있다. 그런데 신앙은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삶과 행위에서 믿는 증거나 표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흔적이란 말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천지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니 거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사람의 사랑의 행위를 들어서 그것이 사람의 지(知), 정(精), 의(意)의 일체의 행위라고 설명한 것이 사람에게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으로 생각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을 할려면 사랑의 대상에 대한 지식과 그를 사랑하려는 정과 그리고 사랑하겠다는 의지(뜻)가 하나가 되어 행동해야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랑의 성육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사랑하려는 그의 의지력이 그의 성령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지, 정, 의 일치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태양을 비유를 말하자면 태양은 하나이지만 그 안이 빛과 열이 있어서 태양이 비취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열과 빛이 같이 하는 것과 같다.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라고 해서 그 흔적을 이것 또는 저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한 때 한국 신학계에서 기독교의 토착화론이 토론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신학자가 한국의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천부인(天符印) 곧 풍백과 우사와 운사 셋을 들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흔적인 것처럼 말한 것이 있다.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의 교리 문제로 이단 논쟁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이해 곧 지식의 문제였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갖맞은 신앙행위와 삶이다. 그 교리를 단순히 신앙과 이해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 인식일 뿐이고 그 신앙의 흔적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 지식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므로 사람은 지, 정, 의를 가진 존재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믿는다면 사람도 지, 정, 의가 일체가 되게 살고 행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삼위일체 신앙의 흔적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 정, 의의 일체적인 삶과 행위를 하지 못해 우리 몸에서나 삶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대로(신앙의 지식) 살거나 행동할 수 없거나 또는 마음은 원(정)이지만 의지력이 없거나 부족해서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알고 있는 것을 아는대로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경우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답게 즉 지, 정, 의가 하나가 되게 살거나 행동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몰라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고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지, 정, 의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힘 있는 것인가? 사람에 따라 그것이 다를 수 있지만 요즘은 자유의지라는 것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의지가 올바른 지식과 순수한 열정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의지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틴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낙관할 수 없다면서 그것은 노예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비유하자면 자유의지는 말(馬)과도 같아서 그 위에 천사가 타면 천사가 가자는 데로 갈 것이고, 만일 악마가 타면 악마가 가자는 데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등 위에 누가 올라 타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고 믿고 있는데 그 신앙의 흔적이 오늘 한국교회 신도들이나 목회자들이나 특히 교계의 여러 단체와 조직체의 지도자들에게 없어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세상적인 정욕이나 물욕이나 명예욕에 대한 잘못과 의지의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의지란 말은 현대 인문주의의 표어가 되고 있고 세속주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세속주의적인 욕망은 배설물로서 버리지 않는 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혀상이나 그리스도의 흔적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언제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은 하는데 우리의 뜻(의지)를 접거나 끊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본 받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but)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그 "다만"이라는 reflection(반성)이 매사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