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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일요일

[크리스천투데이]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II)(2013.03.25)


[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8)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6. 1980년대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논구자의 상상력에 의해 “제조된 예수”(fabricated Jesus)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산타 로사(Santa Rosa, California)에 있는 “웨스타 연구소”(The Westar Institute)의 지원을 받아 1985년 로버트 펑크(Robert Funk)에 의해 창설되고, 첫 해부터 그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로마 가톨릭 사제)이 공동의장으로 운영해왔다. 첫 해는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를 비롯하여 약 30명의 신약학자들이 모였고 약 200여명에 달하는 연구 모임으로 발전했으며, 성서비평학(biblical criticism)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그룹 중 하나이다. “예수 세미나”의 주요 연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구로 특징된다. 창설자 펑크는 역사적 예수 연구란 후기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종말론적 선지자로 그려진 신화적 그리스도(mythic Christ)로부터 갈릴리의 현인을 해방시키는 노력이요, 그리고 예수에 관한 종교(the religion about Jesus)로부터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를 구분시키는 노력이라고 규정한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예수 말씀의 진실 여부에 대한 연구를 통해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독교 문헌,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가 포함된 새로운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그 결과는 『5 복음서』(Robert Funk,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 Polebridge Press, Macmillan)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예수의 행적에 대한 같은 방식의 연구를 통해 『예수의 행적』(Robert Funk, 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1998), Harper San Francisco)을 출간했다.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신학자들은 외경인 도마 복음서를 복음서 중 하나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도마의 복음서와 4복음서(마태, 누가, 요한, 마가 복음서)가 비슷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가 복음서의 겨자씨 비유설교는 도마 복음서와 Q문서(예수 어록)에도 등장한다. 또한 “예수 세미나” 학자의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선호하는 하버드, 클래몽, 밴더빌트 대학 출신이라는 점도 비판을 받았다. 젊은 세대 복음주의 신학자 크래이그 에반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들은 희랍-로마시대의 영지주의 문서에는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면서도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교 전통과 문서에 관하여는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구약의 중요성도 인지하지 않고 그들의 상상력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주로 미디어, 미국 ABC 방송사의 “예수를 찾아서”(The Search for Jesus) 를 통해서 발표함으로써 엄격한 학문보다는 저널리스트적 측면이 강한 면도 있다(Craig Evans, Fabricating Jesus. How Modern Scholars Distort the Gospels, InterVarsity Press, 2006, 성기문 역, 『만들어진 예수』, 새물결 플러스, 2011, 19-20).

이러한 전제에 의한 “예수 세미나”의 연구 결과는 예수의 처녀 탄생, 메시아 되심, 십자가 대속, 육체적 부활, 재림을 부정하는 등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회 신앙의 근간을 흔들었다. “예수 세미나”를 주도하는 학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들은 이러한 비기독교적 확신을 토대로 종교 간의 대화를 권장함으로써, 전통 기독교계와 신학계 안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 세미나”의 창시자인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 1926-2005)는 1998년에 쓴 글 「근본적 개혁을 위하여: 21개의 명제」(The Coming Radical Reformation: Twenty-one Theses)에서 전통 기독교를 부정하는 새로운 인본주의 주장을 제시하였다. “예수를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예수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은 인격적 신을 떠올리는 구태의연한 유신론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세주는 고대 신화 속에서 빌어 만든, 그들의 바람이다. 예수가 신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권능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며 하늘로 되돌아갔다는 것, 세상 끝나는 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는 것, 다 사실이 아니다. 좀 더 현실적인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http://www.westarinstitute.org/Periodicals/4R_Articles/Funk_Theses/funk_theses.htm). 펑크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리는 예수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에게 덧붙은 것이며, 예수를 종교시장에 팔기 위한 초대 기독교인들의 마케팅 전략의 결과라고 한다. 예수 상품화의 최종단계는 니케아공의회에서 칼케돈공의회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기독론이라고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예수상은 예수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 몇십 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예수 추종자들의 창작물이며 상품이라고 한다(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 한국 신학연구서, 1996, 97). 펑크는 성전이나 율법 등 성스러운 전통보다는 예수의 수사학에 집중함으로써, 예수를 상식에 반하여 기존 상징체계에 도전하는 갈릴리의 겸손한 “떠돌이 현인”(vagabond sage)으로 그린다. 펑크는 기독교 이후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유럽 세계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도 끝난 것으로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서유럽 기독교의 관점으로 개종시키고자 의도했던 선교 시대가 끝났다고 본다. 그러므로 펑크는 이제는 예수를 석가·노자·공자·간디 그밖의 다른 종교 인물들과 나란히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Honest to Jesus: Jesus for a New Millennium (1996), 김준우 역, 『예수에게 솔직히』,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115).

이처럼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발견한 역사적 예수는, 사회적인 소외자들과 함께한 떠돌이 설교자였고 현자(Sage)였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예수는 소작농을 주된 청중으로 하는 한 농민으로, “소작농 유대 견유학자”(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San Francisco: HarperCollins, 1990, 421)였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였던 정결제의(purity system)와 차별적 사회 경계(social boundaries)에 저항한 사회 예언가, 또한 초월적 영과의 접촉 하는 성(聖)의 매개자, 그리고 세상의 통념과 지혜를 깨트리는 “전복적 지혜자”였다. 미국 노트르담대 신약학 교수요 천주교 신부인 마이어(John P. Meier)에 의하면 예수는 의식적으로 선지자 엘리야를 모방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종말론적 선지자였다.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엘리야가 했던 이적을 행하는 카리스마적 선지자의 모습을 지닌 “변두리 유대인”(a marginal Jew)이다.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행위는 그 당시 유대주의의 주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는 그의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고, 사역하고, 죽었다. 마이어는 이 이상한 변두리 유대인이요, 종말론적 선지자요, 이적 행하는 자가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방법의 대상인 예수라고 본다.

“예수 세미나”가 재구성한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다양한 모습은, 4복음서가 한결같이 증언하는, 성부 하나님을 증언하시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죄인을 대속한 구세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예수는 진정한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논구자의 상상력에 따라서 제조된(fabricated),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 허구적 예수일 뿐이다.

7. 역사적 예수 논구의 바른 방법론: 역사와 신앙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19세기의 독일 괴팅엔대 조직신학자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 1835-1912)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논구를 배격하였다. 그는 마가복음이 예수의 인격을 찾아보게 되는 전기가 아니라 “긴 서론을 가진 수난 이야기”(a passion-stories with lengthy introduction)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란 바로 케리그마적 예수”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캘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발견한 “역사적 예수”란 자유주의의 비평적 방법에 의하여 재구성된 모습이며, 이러한 예수는 결코 역사 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학자들의 비평적 재구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비판하였다. 캘러는 실재적인 예수는 현대 역사비평학의 방법으로 재구성될 수 없는 성경에 묘사된 게리그마적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는 “소위 역사적 예수”(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와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der geschichtlich-biblische Christus)를 구분하였다. “소위 역사적 예수”란 사실적(史實的)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 학문적으로 재구성한 예수를 말하며, 역사적–성경적 예수란 신앙고백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의 역사란 예수를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보았다. 캘러는 이러한 “사실적(史實的) 예수와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를 구분”함으로써,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탐구 운동의 허점을 드러내는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캘러의 입장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캘러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der kerygmatische Christus)만 인정함으로써 케리그마의 근거인 역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를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속으로 융합시켜 버렸다. 그는 4복음서가 지닌 역사적 예수의 전기적 성격을 부인한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회는 역사적 근거 없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만을 믿을 수는 없다. 어느 인물에 대한 전기에 있어서 그의 업적이나 평가를 떠난 순수한 인물 자체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에 있어서는 복음서 기자들이 쓰고 있듯이 그의 삶과 사역(역사적 예수)과 그에 대한 평가(케리그마적 그리스도)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삶과 사역(역사)과 신앙과 평가(케리그마)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그에 대한 신앙고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가장 결정적인 해답을 줄 수 있는 자들은 2천년 후의 다양한 종교적인 전제와 시대사적인 이념을 가지고 예수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 예수와 더불어 생활했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가 겪었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그 시대의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자료는 그 후대에 있어서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신앙 안에서 체험한 각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의 간증과 신앙체험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대교회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거부한 영지주의의 문서들이나 예수에 대하여 전혀 신앙적인 관심을 지니지 않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복음서 기자보다 더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에 접근하는 방법적인 핵심이다.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서는 우리가 가진 4복음서와 신약서신들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신앙적으로 역사적 인물인 예수에게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자료다.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영국의 F. F. 브루스(Bruce), 하워드 마셜(Howard Marshall), 제임스 던(James Dunn), 그리고 독일의 오토 미헬(Otto Michel), 오토 베츠(Otto Betz),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 페터 스툴마허(Peter Stuhlmacher), 라이너 리스너(Rainer Riesner) 등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에모리대 신약학자 누크 존슨(Luke Timothy Johnson)이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추구한 역사적 예수 논구를 비판하면서 제안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를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의 타당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제기하는 것은 신앙과 역사를 분리시켜 성경과는 분리된 가공적 역사적 예수를 산출해내는 학문적 작업에 대한 회의주의인 것이다. 학자들이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The Real Jesus, The Misguide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aditional Gospels, 1998, New York: Harper Collins Publisher, 김혜숙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8-9). 크레이그 에반스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중하고 면밀한 연구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단지 그가 비판하는 것은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복음서 가운데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최근의 설익은 학문과 말도 안되는 이론들”에 대한 것이다(Craig A. Evans,『만들어진 예수』, 새물결 플러스, 2011, 22-23). 그러나 과거의 기록을 확인하는 역사적 방법만으로는 복음서가 증거하는 역사적 예수를 온전히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는 영역을 지닌다. 이 차원은 역사적 연구에 신앙이 연결될 때만 통찰될 수 있다. 여태까지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논구의 방법적 제한성은 바로 예수에 대한 신앙 없이 역사적 방법으로만 접근하고자 한 데 있다.

8. 신약성경, 특히 4복음서가 역사적 예수 이해에 결정적이다

영국의 덜햄(Durham)대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이 그의 저서 『예수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Jesus)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 세미나”는 기본적인 전제가 잘못되었다. 이 전제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분리시킨 것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남겨 놓은 영향(impact)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 관한 전통과 예수 신앙은 이 영향이 산출한 믿음과 체험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분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A New Perspective On Jesus: What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Missed (Acadia Studies in Bible and Theology). Grand Rapids, Mich: Baker Academic, 2005). 역사적 예수는 신앙이나 교리에 박제되어 있지 않고, 오늘도 살아 있는 인격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성경을 읽을 때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나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이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관한 권위 있는 계시가 아니라, 주관적인 종교경험과 이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모아놓은 문서라고 본다. “예수 세미나”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정경 복음서보다 월등한 가치를 정경 외 자료(특히 도마복음서 등 영지주의 문서들)에 두고 있다. 크로산은 마가의 이야기는 무시하고, 로마에 대한 유대의 반란을 반대하고 로마황제의 편에 가담하여 어용적으로 출세한 기회주의적 변절자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Craig A. Evans, 『만들어진 예수』, 213-216)에 대하여 상당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시도하는 교차문화적 연구(cross cultural study)는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기존 전통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 재구성된 예수는 설득력이 없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예수는 신자들로 하여금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확실한 인격적 존재일 수 없다. 필자가 믿고 논구하는 역사적 예수는 교회사를 통해서 기독교 신자들이 역사적인 박해(네로 치하, 스탈린 치하 등) 가운데서도 기꺼이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그러한 확실한 인격인 나사렛 예수를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앙이 2천년 기독교를 지탱해 온 것이다. 필자가 증언하는 역사적 예수는 오늘날 북한과 세계 각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생활하는 자들의 살아계시는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맺음말 :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 학문적 회의주의에 빠져서는 안 돼

최근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려고 하였으나, 이들의 연구 결과는 19세기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논구 결과와 같이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들이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는 실제의 예수가 아니라 자기들의 학문적 방법에 의하여 주도된, 만들어진 예수(fabricated Jesus)일 뿐이다. 우리는 겸허한 학문적 태도로 진정한 역사적 예수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역사적 예수는 오로지 복음서와 신구약성경과 초대교회 문서들을 통한 신앙적 논구 안에서만 접근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 근거는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념적인 상상물인 예수가 아니라, 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진정한 실재적 메시아적 예수요 진정한 신앙의 예수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인격만이 아니라 이 인격을 지칭하는 용어조차도 오늘날 시대사적 이념을 가지고 예수를 만들어내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역사적 예수 용어를 폐기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역사적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요, 인본주의적 신학에 굴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적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며 동시에 학문적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크리스천투데이]“성경의 하나님이 창조주… 과학적 검토 결과 확신”(2013.03.22)


물리학자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 ‘신 존재의 과학적 증거’ 강연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가 강연을 전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美 오클라호마대학교 물리학과 마이클 스트라우스(Mike Strauss) 교수가 ‘신 존재의 과학적 증거’(Scientific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god)라는 주제로, 21일 저녁 7시 고려대학교 4.18기념관 대강당에서 공개강연을 전했다. 지적설계연구회(회장 이승엽 서강대 교수)가 주최한 이 강연회는 22일 저녁 6시 30분 서울대 26동 대형강의실에서도 진행된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전 시대의 뉴턴, 파스칼은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이었는데, 과학자로서 기독교의 신을 믿는 것이 현 시대에도 해당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됐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발견하게 됐다”고 전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우주의 기원’ ▲‘우주의 설계’ ▲‘특이한 지구’ 세 가지를 제시했으며, 스티븐 호킹이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에서의 또 다른 지구와 같은 별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한 것을 비판했다. 스티븐 호킹은 “빅뱅 이후 물 속의 거품과 같이 팽창하는 수많은 우주(다중우주)가 존재하며, 이 다중우주에서는 창조자의 개입이 없이도 우리와 같은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수없이 많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우주의 기원’과 관련, “1929년 에드윈 허블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우주의 팽창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는 우주를 시작하게 한 신적 존재가 있다는 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오늘날 ‘빅뱅’이 우주의 시작이라는 것은 명확해졌는데, 그 증거로는 ▲‘우주의 팽창’ ▲‘우주의 온도’ ▲‘우주 내의 원소들’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우주의 한 지점을 허블망원경으로 비추면 은하계가 나타나는데, 이는 엄청나게 먼 곳으로부터 우주가 팽창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우주가 빅뱅에 의해 시작됐다면, 빅뱅 상태는 굉장히 온도가 높았을 것이고, 그 열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잔열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1964년 아노 팬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의 이방향성 전자파 탐지에 의해 증명됐다. 빅뱅이론이 예측했던 원소들의 백분율 역시 그대로 관측됐다. 과학자들도 빅뱅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스티븐 호킹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하여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팽창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빅뱅은 공간만의 기원이 아니라, 시간의 기원이라는 것도 입증한 것이다. 결국 빅뱅은 폭발이라기보다는 우주 안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등 모든 것의 기원이 된다. 이는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야기했는데, “과연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우주의 시작 이전에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원인은 우주를 초월해서 존재하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주는 분명 기원이 있으며, 그 기원이 있게 한 하나님이 계시다. 과학자 로버트 제스트로우도 ‘과학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했는데 이미 신학자들이 그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이미 성경에서 오래 전에 선언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우주의 설계’와 관련, “우주의 수많은 매개변수들은 모두 인간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으로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양은 인간의 존재에 최적이다. 우주 팽창속도에 비해 물질이 적거나 많으면 은하계는 쉽게 붕괴된다”고 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물질은 원자로, 원자는 핵으로, 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이는 쿼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소가 결합될 수 있는 것은 강한 핵력의 힘 때문이다. 하지만 이 힘이 5%만 약해져도 원소주기율표에서는 결국 수소(H)만 남게 된다. 물도 형성을 못하는 것”이라며 “우주를 구성하는 조건은 인간의 생존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학자 폴 데이비스는 “우주는 짧은 시간 안에 급팽창했기 때문에 팽창하는 힘은 우주 안에 꼭 필요한 물질에 해당하는 만큼만 주어졌다”고 주장했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나선형 은하에 속해 있는데, 은하계 중심의 블랙홀에는 방사선이 강하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고등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선형 은하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나선형 은하는 은하계의 10%에 불과하다. 또 고등생명체의 생존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태양 주위에 다른 행성들이 돌며 불규칙하게 타게 되면 고등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별은 주위에 또 다른 행성이 돌고 있는데, 다행히 태양은 3세대 별로서 행성이 없다. 태양과 같은 3세대 별의 형성 기간은 140억 광년이다.

▲‘지구 같은 별’의 형성에는 수많은 매개변수가 존재하며 그 확률은 극히 작다. 사진은 매개변수의 목록들. ⓒ신태진 기자

그 외에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수많은 매개변수가 존재한다. 지구의 자전속도, 크기, 밀도, 자전축의 기울기도 생각해야 한다. 지표의 판이 계속 활동하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지구의 기울기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데는 달이 굉장히 중요하다. 목성은 중력이 강해서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이 지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수많은 매개변수들이 맞지 않으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의 이 강연은 스티븐 호킹이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질문했던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우리는 왜 존재 하는가’, ‘왜 특정한 법칙들만 있고 다른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우주의 기원’, ‘특이한 지구’, ‘인간 중심의 지구’ 등이 그것이다. 그는 “322개 이상의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지구 같은 별을 발견할 확률은 거의 없다”며 “스티븐 호킹은 ‘지구 같은 별’의 존재 가능성을 말했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스티븐 호킹이 ‘M-이론’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개수의 우주 창조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도 ‘형편없는 과학’이라며 비판했다. 이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경계상태에서 물리의 법칙이 작동한다면, 그 법칙들 또한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과학적 관찰은 우주가 기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신태진 기자

학자 폴 데이비스는 “물리학이 설계의 산물이라면 우주도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며, 현대 물리학의 증거는 그 목적 가운데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전했었다. 학자 조지 그린스타인 역시 “모든 증거를 조사해 볼 때 초자연적 존재 또는 절대적 존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고 전했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들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실존에 대한 풍성한 증거를 말해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질의응답에서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날(Day)의 의미는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의미상 ‘날’의 개념이 다양하게 쓰이듯이, 히브리 원어에도 ‘날’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아마 세상을 창조할 때 걸린 ‘오랜 기간’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새 시대, 새 시작의 선포로 여겨진다”고 했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모든 종교 중 성경만이 유일하게 우주 창조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 전하고 있다. 여러 과학적 사실들을 검토할 때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크리스천투데이][김영한 칼럼]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I)(2013.03.18)


[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6)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지난주에 나간 필자의 신학 칼럼 56회(역사적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1): 희랍, 헬레니즘 종교의 “신의 아들들”과의 차이)와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 폐기를 주장하는 독자들의 제안과 토의가 있었다. 독자들의 학문적 지식과 신앙적 열정에 감명을 받는다. 이러한 토의는 바르게 믿고자 하는 신자들의 신앙과 바른 신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본(本) 신학연재 칼럼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본래 이번 주에 다루려 했던 “유대교 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II)”에 관한 글을 잠깐 미루기로 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힌다.

역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 historical Jesus)란 “실재적으로 살았던 예수”(real Jesus)라는 뜻이다. 역사적 예수는 바로 복음서가 증거하는 나사렛 예수다. 역사적 예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이 아니고 신약학의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중요한 학문적 용어다. 역사적 예수란 복음서가 말하는대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가르치시고 저들과 같이 생활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실재적인 역사적인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말한다. 필자는 이 역사적 예수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사실이요 진실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분은 허구나 가공적 인물이 아니라 실재적인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분을 기점으로 해서 역사가 서기(西紀) 그리스도 이전(BC)과 이후(AD)로 갈라지는,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용(專用)어가 아니다.

1. 역사적 예수 논구의 방법

역사적 예수란 신약학 연구에서 줄곧 사용되어온 학문적 용어다. 자유주의자만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들도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평범한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단지 신앙의 예수만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다. 역사적 예수 용어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다. 용어란 사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 성격이 결정된다. 칼이 명의(名醫)에게 사용될 때 그것은 암환자를 살리는 치유의 도구가 되나, 살인자에 의하여 사용될 때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과 같다. 엄격성을 추구하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은 학문적 논의를 회피해서는 안 되며, 진지하게 논의에 임해야 한다. 영국 아버딘(Aberdeen)대의 복음주의 신학자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은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I Believe in the Historical Jesus, Regent College Publishing, 2001)라는 제목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여 “왜곡한다”고 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한 역사적 예수는 실재 역사 안에 존재하지 않고 비평적 재구성 안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예수(fabricated Jesus)다. 그러나 회피하는 것은 학문적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역사적 예수를 학문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문적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되도록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가 파악하는 역사적 예수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이미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증언되어 있으며,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믿는 신앙인들의 인격과의 교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었으므로, 그분은 성경이나 교리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는 구세주인 것이다.

19세기 계몽주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신앙의 그리스도와 분리된 역사적으로 실제로 살았던 예수를 찾고자 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양자를 분리시키고, 성경을 신뢰할 만한 경전으로 믿지 않았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로 고백된 그리스도를  넘어서,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찾아 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19세기 실증주의적 역사과학적 전제에 사로잡힌 시각, 즉 역사적 이성의 자율성(autonomy of historical reason)을 모든 것의 척도로 하는 그릇된 전제를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제란 인과율이라는 역사적 유추(historical analogy)에 의하여 이성적 비판이 가능한 사실만을 “역사적”이라고 간주하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계몽주의적 전제(enlightenmental hypothesis)란 기적이나 초자연적 이적(오병이어의 사건, 바다의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함, 변화산 사건, 물 위를 걸으심 등) 등 초월적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비판적 환원주의적 사고다. 그런 나머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출생, 각종 이적, 예수의 신적 기원,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 사건 등은 내재적 역사적 인과율과 유추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신화”, “허구”, “상징” 등으로 간주되었다.

2. 계몽주의 전제에 의한 논구가 가져온 실패: 역사적 예수의 허구적 구성
 
그리하여 자유주의적 역사적 예수 논구에 있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전기 중 초역사적인 기사들은 모두 신화와 전설이나 문학적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기록 가운데 이러한 초역사적인 성격을 제거한 예수는 실증과학 이성으로 축소된 예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예수”(fabricated Jesus)였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적 예수 논구에서 재구성된 예수였다. 프랑스의 신학자 에른스트 르낭(E, Renan)은 역사적 예수에게서 “달콤한 인간주의”, 독일의 신학자 리츨(A. Titschl)은 “투철한 직업의식”, 헤르만(W. Herrman)은 “종교의식”을 발견했으며,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역사적 예수를 “묵시록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망상가”로 그렸다.

20세기에 들어와 이들의 자유주의적 비판적 사고를 그대로 수용한, 독일의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예수전』(Jesus)이라는 소저서를 내었으나 그것은 역사적 예수가 없는 예수였다. 말하자면, 그가 발견한 예수는 케리그마로만 치장되어 생애 내용이 전혀 안개에 싸여 있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어떻게 살았다는 역사적 알맹이가 없는 예수였다. 불트만과 그의 학파는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오심”(das Gekommen-sein Gottes in Jesus von Nazareth)만을 인정했고, 복음서에 있는 역사적 예수 기록들은 모두 초대교회가 “종교사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것을 가져다가 치장한 것으로 보았다.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 안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 케리그마 안에 예수가 현존해 있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202).

이러한 불트만 학파의 종교사적 논구의 부정적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아 나타난 것이, 바로 1999년 영국에서 출판된 토마스 프리크(Thomas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저서였다. 여기서 두 학자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 의해 ‘1999년의 책’으로 선정된 바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2001년에 동아일보사에서 번역·출판되었으나 한국 교계의 항의를 받아 폐기처분되었다.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2006)도 미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 국내에서도 출판되어 역시 베스트셀러로 팔린 바 있는,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책이다. 더욱이 이들은 2세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영지주의 문서(도마 복음서 등)들을 가져다가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다 보니, 예수는 하나의 영지적 선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 SBS 방송 등이 2007년 방송 매체를 통하여 이슬람의 마호메트와 기독교의 예수를 비교하면서, 역사적 예수를 하나의 신화나 허구로 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기독교계 방송 언론들이 기독교가 구주로 믿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 특집 보도를 하였다. 이에 여러 복음주의 학자들이 호응하여 글을 썼는데, 필자도 역사적 예수의 진실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라는 말은 자유주의 신학의 전유물이나 이들만의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이며 가장 친숙한 용어다. 이 용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주로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하여 이 용어를 저들의 것으로 넘겨주고 포기할 수는 없다. 역사적 예수란, 복음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용어가 말하는 그대로 실제로 있었던 예수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신앙하는 자의 마음 속에, 그리고 신앙의 공동체 안에,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그리고 역사와 우주의 운행 가운데 살아계시는 분이다. 이 분이 바로 역사적 예수요 바로 신앙의 예수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는 동일한 분인데 역사적 예수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3.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한 역사와 신앙의 분리

19세기 역사적 예수를 논구한 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신앙을 갖지 않은 하나의 자연종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자연종교적인 관점에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4복음서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라이마루스(Hermann Reimarus, 1694-1768)는 처음으로 자연신론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복음서 비평을 시도한 학자였다. 그는 복음서의 이적(異蹟) 사건이나 부활 사건을 하나의 “선한 동기로 인한 사기”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실제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교리 속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 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계몽주의 신학자인 헤겔 좌파 신학자 스트라우스(David Strauss, 1808-1874)는 그의 저서 『예수의 생애』(1835)에서 이적 이야기들이 예수의 속임수에 의한 제자들의 착각으로 인한 것이라는,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Heinrich Paulus, 1761-1851)의 자연주의 해석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그는 대신에 구약성서에 적용된 신화적인 해석을 복음서에 적용하였다. 그는 예수의 이적 이야기들은 현대의 개념에서 하나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당연히 종교적 신화(神話)로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신약성경의 이적이란, 메시아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라이마루스에서 시작하여 렛싱, 슈트라우스, 르낭,  슈바이처에 이르는 자유주의 계몽신학자들은 신앙적 이성이 아니라 자기들의 학문적 관념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실재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념에 의하여 채색된 예수, 즉 종말론적 세계 몰락에 대한 환상(幻想)을 지닌 허구화된 예수상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신약학자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예수를 묵시적 유대 선지자로, 그리고 세상 종말이 그의 사역 가운데 올 것(마 10:23)이라고 희망하였던 선지자로 보았다. 예수는 세상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하였으며 자살(自殺)을 재촉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간섭을 강요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았다. 마침내 예수는 실망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소리치며 죽었다. 따라서 슈바이처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계기독교인들이 매년 사순절(四旬節)에 수난을 기념하는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부정적으로 결론된 역사적 예수의 상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용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전통 기독교 신자들이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용어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상은 계몽된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상을 찾자고 하여 신앙과는 분리된 예수에게 붙은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적 예수 논구 운동은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표적 실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은 후기 불트만 학파를 거쳐 오늘날에는 미국의 “예수 세미나” 운동에 이르고 있다.

4.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시도

역사적 예수 용어는 위에서 언급한 자유주의 신학만이 아니라 독일 신학자 케제만(E. Käsemann)에서부터 시작하는 후기 불트만시대(postbultmann era) 학자들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가 갖는 역사적 기초에 대하여 논구하기 시작했다. 후기 불트만 학파의 학자들은 스승 불트만 등 전기 불트만 학파 신학자들의, 역사와 케리그마를 단절시키는 방법적 사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케리그마와 역사의 연속성을 찾고자 하였다. 불트만의 제자들의 새로운 탐구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중요한 책들과 사상들을 낳았다.

1953년에 불트만의 제자 독일 튀빙엔대 신약학 교수 케제만(Ernst Käsemann)은 “역사적 예수의 문제”(Das Problem des historischen Jesus)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예수의 높아지심이 부활 이전의 예수 속에 어떤 발판을 갖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케제만은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가 전한 케리그마는 이 역사적 인물에 의존하고 있으며 복음서에도 그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케리그마 너머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시 물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상의 예수’와 ‘부활의 주’ 사이의 연결성을 제거한다면, 초대교회의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환상설을 주장하는 가현설이나 신화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케제만은 분명히 케리그마 안에서 최소한의 진정한 예수 전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는 이 연속성을 예수의 메시지에서 발견하는데,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반대명제(Antithese) 곧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자기를 모세의 권위 위에 세우며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더욱 철저화시켰다고 본다. 케제만은 여기에서 역사적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다른 학자들도 케제만의 이러한 제의에 동의하였다.

하이델베르그대의 신약학자 본캄(Günter Bornkamm)은 케리그마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특히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와 연결성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예수에게는 유대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데, 이런 특수성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의 역사와 처음 공동체의 케리그마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지상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마르부르그대의 신약학자 푹스(E. Fuchs)는 비유를 분석함으로써, 취리히의 조직신학자 에베링(G. Ebeling)은 예수의 신앙에서 그러한 지속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벨링은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은 신앙의 예수요, 예수의 사역과 행위에 있어서 표현된 것은 예수의 신앙이요, 이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에벨링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말하기보다는, 나의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로서 예수를 말한다. 개인의 실존론적 의미성에 더 역점을 둠으로써, 메시아 예수는 신앙의 원천이고 근거로서만 인정되고, 이러한 한에 있어서만 신앙의 대상으로 타당하게 된다.

그러나 후기 불트만 학파들도 계몽주의적 전제를 수정하지 않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이적 등 초자연적 기사(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주활, 승천, 재림 등)에 대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역사적 유추적 자율성(autonomy)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등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 내지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간주됨으로써,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러한 전제가 설정한 실존론적 이념에 의하여 왜곡되게 나타난 것이다.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 복권은 불트만의 실존론적 협착성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여, 연속성의 발견은 각 학자들이 세운 기준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후기 불트만 학파가 제시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장은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의 불가지론을 극복해 보려는, 교회의 신앙에 부합하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적 예수가 사용한 기독론적 칭호(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구주 등)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사용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신앙고백으로 붙인 것이라는 불트만의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역사적 예수의 복권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5. 괴팅엔 학파와 튀빙엔 학파에 의한 역사적 예수 복권의 새로운 시도

괴팅엔 신학부의 신약학자들, 유리우스 쉬니빈트(Julius Schniewind)와 유대계 여호야킴 에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후기 불트만 학파의 길이 아닌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였다. 예레미아스는 해박한 유대언어의 정통가로서 유대문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가 말한 “바로 그대로의 어구”(ipssisima verba)는 아니더라도 “그 자신의 말”(ipssisima vox)을 찾고자 하였다. “압바”(abba)라는 말은 역사적 예수가 사용한 말로, 자기와 가장 친근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자신이 하늘의 “인자”로서 높아질 것을 기대했으며, 자신을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난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부활에서 제자들은 그가 하늘 왕좌에 취임과 종말의 도래를 의미하는 그의 재림을 기대하였다(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1964, The NT Theology, 1971). 이러한 예레미아스의 역사적 예수상은 성경이 전해주는 예수상과 일치한다.

불트만 학파가 신약학계를 주도하는 가운데서도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독자적으로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복권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튀빙겐의 신약학자들, 오토 베츠(Otto Betz), 마르틴 헹겔(Martin Hengel)와 스툴마허(Peter Stuhlmacher)에 의하여 예수를 오히려 유대교적 전통에서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신학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에버딘대 신약학 교수 하워드 마샬( Howard Marshall)도 신약의 기독론의 역사적 근원은 이미 예수의 고유한 메시아적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김영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의미, - 역사적 예수의 신화론화 비판 -”, 2005).

독일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의 영역에서도 후기 불트만 학파 신약학자들이 이루지 못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권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뮌헨대 신학부의 판넨베르그와 튀빙엔대 신학부의 몰트만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구속사건과 역사”(Heilsgechehen und Geschichte)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불트만 학파의 케리그마 신학의 굴레에서 역사적 예수를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그 후에 전개된 그의 보편사 신학은 역사적 예수를 보편사의 지평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은 1965년 “희망의 신학”(Die Theologie der Hoffnung)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1960년 대 이후의 독일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다시 현대신학의 중요한 주제도 부상한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제6장과 7장). 독일 함부르크대 신학부의 헬무트 틸리케(H. Thielicke)도 그의 성령론적 신학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가 성령 안에서의 신앙을 통하여 그 메시아적 실재와 구속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김영한, 『헬무트 틸리케. 종교개혁적인 성령론적 신학』, 살림, 2005).

이와는 대조적으로 19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예수 세미나” 운동은 인격적 신앙 없이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상과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예수 논구에 대한 회의주의를 심화시켰다. <계속>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크리스천투데이]“동성애 관련 쟁점들, 과학적·신학적 대응 준비해야”(2013.02.26)


경희대 생물학과 유정칠 교수, 기독교생명윤리협 총회서 강조

▲유정칠 교수가 특강을 전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상임공동대표 박재형 교수) 제10차 정기총회가 25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 소망관에서 개최됐다.
 
유정칠 교수(경희대 생물학과)는 총회에 앞서 ‘동성애 갈등, 환경적 요인인가, 유전적 요인인가?’라는 주제로 특강했다.

유 교수는 “오늘날 동성애 갈등의 쟁점은 동성애가 ‘환경적 요인인가, 아니면 유전적 요인인가?’에 있다”며 “이유는 만일 동성애가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면 자신의 선택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어려운 반면, 환경에 의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강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친동성애 학자들은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학자들은 동성애 유발 요인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적을 뿐 아니라, 이 연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세우는 데 긴요하다는 위기의식이 부족하다”며 “이 추세가 지속되면 동성애자들의 주장이 언론에 더 자주 소개되면서 곧 그들의 다양한 요구들이 봇물 터지듯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유 교수는 동성애 보도에 관한 언론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국민일보, 한겨레신문,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분석했는데, 국민일보의 과거 동성애 연평균 기사건수는 2.1개였으나, 홍석천 커밍아웃 이후 2000년에는 20개로 약 9.5배 증가했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기독교계에서 시청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런 파장으로 2010년 조선일보는 기사건수는 전년대비 약 100배 증가했다.

기사 유형 분석 결과, 총 461건의 기사 중 348건(75.5%)이 보도기사였으며, 기획/연재 67건(14.5%), 칼럼 및 논단 24건(5.2%), 인터뷰 12건(2.6%), 사설 7건(1.5%), 통계/설문조사 3건(0.7%) 순으로 나타났다.

기사의 관점을 살펴보면, 총 409건의 기사 중 186건(45.5%)이 ‘사회통합’ 관점으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였고, 그 뒤를 이어 ‘사회 약자’ 관점 67건(16.4%), ‘청소년 위해’ 관점 57건(13.9%), ‘성경교리’ 관점 56건(13.7%), ‘갈등/내분’ 관점 34건(8.3%), ‘과학’ 관점 9건(2.2%) 순으로 나타났다.

등장주체 유형을 살펴보면, 국민일보는 ‘교계’가 62건(50.0%), 한겨레는 동성애자를 포함한 진보 성향의 ‘인권단체’가 58건(38.4%), 조선일보는 ‘정치인’이 49건(27.1%)으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였다.

유 교수는 “언론들은 시대의 윤리를 앞세워 사회적 변화로 인한 동성애자 끌어안기, 혹은 치유받을 대상으로 동성애자 끌어안기 등 현상만을 보도하기에 급급할 뿐, 동성애자에 대한 독자들의 실질적 판단에 도움을 줄 만한 정보 제공은 못하고 있다”며 “기독교 단체와 연구자들은 동성애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입장 정리와 적극적 의견 개진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인공수정, 대리모, 체세포 복제 등을 통해 자식을 키울 수 있게 해 달라는 동성애자들의 요구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의 정립이 필요하며, 동성애자 목회자 문제도 한국에서 갈등의 쟁점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신학적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제10차 총회. ⓒ신태진 기자

총회에서는 이상원 상임운영위원장과 박천일 감사가 고문으로 추대됐으며, 신임 상임운영위원장에 이승구 직전 사무총장을, 신임 사무총장에 장보식 이사를, 신임 감사에 박상은 이사를 선출했다.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권혁승 칼럼] 열매 맺는 신앙(2013.02.21)


권혁승 교수의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44)

▲권혁승 교수.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리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1-4)
 
신앙의 다른 표현은 생명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새 생명의 경험이 신앙의 출발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성장이 뒤따른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 정상적인 신앙이다. 생명의 성장은 열매로 성숙해진다. 열매는 성장의 깊이를 드러내는, 내면의 소리 없는 자랑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들은 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며,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시다.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시는 목적은 열매를 얻으시기 위함이다. 농부에게 열매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려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열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만족을 준다. 이스라엘에서 포도 열매는 주로 포도주를 담그는 데 사용한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 104:15)가 그것이다. 모든 열매가 그러하듯이, 포도열매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에게 유익을 준다. 신앙의 새 생명은 열매로 성숙해진다. 자기만족을 위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열매이다.

포도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가지는 생명의 중심이 아니다. 뿌리와 줄기가 공급하는 수액을 전달받는 통로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결실인 열매는 줄기가 아닌 가지 끝에서만 맺을 수 있다. 가지에 맺힌 열매는 우리가 맺은 것이 분명하지만, 열매의 참 주인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시다. 생명에 관한 한 우리들은 주체가 될 수 없고, 생명의 수액을 전달받는 의존체일 뿐이다.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가지인 우리는 생명의 관계이다. 성경 전체는 이런 관계의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모두가 생명에 관한 주석들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열매 맺는 신앙의 기본이다. 예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그분에게 맞추며 사는 것, 그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

예수님을 우선순위로 삼고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본문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를 잘라내신다. 그것은 나무를 깨끗케 하는 가지치기이다. 그러면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느니라”(요 15:3)라고 하셨다. 말씀의 중요한 역할은 쓸데없는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교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도 공급해 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 그것이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그분의 자원을 내 것으로 삼는 삶이다. 그것은 기도의 특별한 통로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시인하는 것이다. 곧 내가 할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공식적으로 아뢰는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내려놓은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교만함이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가장 큰 평안과 행복을 누리듯이, 기도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우리들이 영적 평안과 풍성함을 경험하는 인격적 교제이다. 그러므로 응답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과 교제이다. 그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약속은 우리의 실제가 된다.

*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 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를 제목으로 한 수필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② 성경 형성의 주체(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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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경전’화 주체, 교회냐 성령이냐

21세기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형성됐다는 입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만약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면, 성경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에서 시작해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당연히 교인들은 당황했고, 신앙의 혼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교리적 선언만 반복했다. 교회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했고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의문은 가중됐다. 오늘은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을 통해, 성경형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려 한다.

역사적 산물

교회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성경’을 결정했다는 주장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이 견해는 교회가 일정한 기준을 따라 성경을 수집했고, 교회 회의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전형성 과정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간략한 요지를 보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다. 초기 공동체는 구약과 다양한 신앙의 ‘자료들’을 예배와 신앙생활을 위해 사용했다. 신앙의 자료들은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것, 서신, 신앙고백과 같은 것으로서, 일정한 형식은 없었다. 당시는 네 복음서가 확정되지 않았고, 복음서들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다. 나중에 정경으로 분류되지 못한 자료들은 외경, 위경, 혹은 유사 복음서 등으로 분류됐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료들을 수집할 필요를 느꼈다. 교회가 자료들을 수집한 ‘기준’은 대략 네 가지다. (1)사도가 직접 저술했는지 여부 (2)사도의 저작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사도적 전승에 속하는지 여부 (3)당시 교회 공동체에서 높게 평가 받았는지 여부 (4)교회 공동체가 인정한 기존의 자료와 유사한 가치를 가지는지 여부 등이다.

교회는 이런 기준으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하다가, 일정한 기간 후에 경전으로 인정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는 397년 제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27권을 채택했다. 그 후 몇 차례 더 교회 회의를 통해 27권을 확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약의 경전화가 완료됐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성경의 경전으로서의 절대성은 상실될 가능성이 크다. 교회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 견해는 결국 성경을 수집하고 결정한 ‘주체’를 교회 혹은 인간으로 보게 된다.

성령의 인도

‘성령’이 성경기록의 주체라는 입장을 보자. 이 입장은 과거에 교회가 유지했다가 시들해진 견해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이 입장에 다시 접근할 필요가 제기된다. 최근의 역사비평학, 고고학, 문헌연구는 과거 문서들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준다.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 4세기 경 교회가 경전을 결정했다는 것에 대해 반론이 일어났고, 정경 형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그 이유를 보겠다.

(1)초기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순교로써 기독교를 수호하고 이단과 싸웠다. 그들은 복음서들과 서신들을 신앙의 규범으로 사용했다. 초기 이단들과 논쟁에서 사용한 글들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이 어떤 복음서들과 서신들을 ‘성경’으로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2)기독교 가장 초기의 중요 교부들의 저술을 보면 어떤 ‘성경’을 사용했는지가 나온다. 사도적 저술로 분류된 것은 5개였지만, 지금은 3개를 추가해 8개를 주요 초기자료로 본다. 이 저술들과 비슷한 시기인 1∼3세기에 활동한 교부들에게서 그들이 사용한 ‘성경’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나 권수가 나온다.

(3)최근에 1∼3세기 경 광범위한 지역의 신앙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복음서나 서신을 ‘성경’으로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됐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정보의 교환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 대부분의 지역은 ‘성경’을 독립적으로 결정해 사용했다. 유통되던 복음서만 해도 30개가량 있었다. 각 공동체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교부들의 글, 초기 중요 8개 저술, 다양한 지역의 초기 공동체들에서, 4세기 이전에 사용한 ‘성경’이 놀랄 만큼 유사하다.

즉 교회가 정경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일치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연구하는 스탠튼(G. Stanton)과 로제(B. Lohse)는 4세기에 교회대표들이 모여 회의에서 경전을 결정했다는 주장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즉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던 성경을 교회는 단지 받아들이고 추인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틴지역과 헬라지역의 교부들과 넓게 흩어진 여러 공동체 사이에 신약의 종류와 범위가 어떻게 이런 높은 일치도를 보일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합리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확률로 설명하기에는 가능성이 너무 낮다. 대단히 신비로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경전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경전화에 대한 주체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의미이다.

학문적 차원에서 보면, 위의 두 가지 입장은 모두 더 보완해야 한다. 두 입장 모두 학설로서 가치가 있고,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도 있다. 현재 신학계 내부에서는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전자의 입장이 팽배하다. 하지만 이 주장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견해는 여전히 하나의 가설이다. 아직 교회가 경전을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수집했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앞으로 좀 더 진전된 연구와 발굴이 진행되면, 교회가 성경을 수집하고 결정했다는 근거를 발견할지, 혹은 정경 형성과정이 더욱 신비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성령님을 향하게 될지가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성경의 내용과 경전 형성의 주체는 성령님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2013년 2월 7일 목요일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2. 성경·진리의 기준] ① 성경의 권위(20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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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권위’를 잃으면 모든걸 잃는다

근대 이후 ‘성경의 권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모든 ‘권위’는 이성의 심판 앞에 서야 했다. 이성에 대한 강조, 역사의식의 대두, 비판적 사고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사회제도와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21세기, 주어진 ‘권위’를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8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성경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받았다. 지금은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현대인은 자율적 비판의 시대에 산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도 타율적이고 맹목적인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원하고, 권위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기독교인은 그렇게 믿는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을 때 답답하지만 침묵하게 된다.

경전종교

먼저 질문을 해보자. 성경의 권위가 중요한가? 그렇다.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는 성경의 권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가 ‘경전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연종교와 구조적으로 다르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을 통해 ‘신’에게 도달한다. 이성을 통해 도달하려는 시도는 이신론으로 나타났고, 자연을 통해 도달하려는 시도는 범신론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은 철학의 형태에서 자주 보이고, 범신론은 원시종교에서부터 현대의 다양한 종교적 형태에서 발견된다. 기독교는 자기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와도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다. 불교는 인격적인 신 개념이 약하고, 모든 사람이 각성을 통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계시’에 대한 기록인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계시는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다. 즉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진리를 얻기 위해 해탈을 하거나, 각성해서 깨닫거나, 대자연의 이치를 통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이 계시를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어떤 종교든, 학문이든 각기 진리의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의존한다. 다른 어떤 기준이나 근거로 성경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구조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계시종교, 혹은 경전종교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대한 권위는 결정적이다.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는 순간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님의 메시아 됨, 성령님의 임재하심, 그리고 부활신앙도 모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만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성경 권위의 근거

성경의 권위는 기독교 초기부터 도전을 받았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매 시대는 그 시대의 도전 앞에서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교회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존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권이나 일부 성직자가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가 비롯되는 근거는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그의 선하신 섭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 성령의 은총, 새로운 공동체, 그리고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의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종교적 권위가 아니다. 교회 조직이나 교권에 의해 유지되는 강제적 권위와 다르다. 어떤 조직이나 사람이 성경을 진리하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스스로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성경되게 하라’고 했고, 칼뱅은 성경의 진리는 최종적으로 ‘성령의 증거’에 의한다고 한 것이다. 교회가 진리를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성경 안에 있고, 그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이고 기독교다.

성경의 권위와 합리성

마지막으로 성경의 권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자. 그리스도인은 자주 성경의 진리가 이성과 충돌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지성을 포기하면서 성경을 믿어야 하는지 갈등한다. 물론 성경의 진리가 언제나 합리성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이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기도 하고, 합리성과 다른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상당한 부분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믿음으로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이 두 부분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많은 학설과 주장이 있다. 이 도전들에 대해 교회는 무조건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교회의 이런 태도는 권위주의적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킨다.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우리 시대’가 자신과의 대화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성’이다. 즉 우리 시대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이 필요하다. 본 강좌에서 앞으로 세 번 더 성경과 연관된 사안을 다루겠다. 성경은 누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성경 인식의 주체는 누구인지, 그리고 성경은 무오한지 등을 보겠다. 이를 통해 여러분은 성경의 권위가 합리성을 넘어서는 독특한 면도 있고, 또 합리성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주제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성경관의 토대를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④ 신학과 신앙(201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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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없는 신학은 무미건조해지고 신학 없는 신앙은 자기주관에 빠진다”

‘신학과 신앙’에 대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는 신학무용론이다. 신학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또 신학을 하면 오히려 신앙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이런 생각은 신학을 단지 학문의 영역으로만 생각했거나, 신학의 비판적 기능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 강좌에서 저번 주에는 ‘신학의 역할’에 대해 말했고, 오늘은 신학과 신앙의 관계에 집중하려 한다.

신학과 신앙, 이원론?

한국교회는 신학과 신앙을 상충하는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근저에는 한국종교 문화에 뿌리 깊게 놓인 이원론적 사고가 자리한다. 이원론은 빛과 어두움, 성과 속, 영과 육, 이 세상과 저 세상, 교회와 세상 등을 대립적으로 보는 사고이다. 이원론적 사고는 어느 한 측면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다른 한 측면이 가지는 가치를 경시한다.

성경의 사상은 이원론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저 세상’에 대한 소망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도 중요하다. 성경은 ‘영’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의 세계’도 중요시한다. 따라서 ‘영과 육’을 대립해서 보지 않고 조화롭게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에서 영과 육의 균형이 깨지면 신앙이 극단적이 되거나 기형적이 된다.

신학과 신앙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도 이원론적인 사고와 연관이 있다. 즉 신학은 이성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추구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신앙은 감성적이며 체험적인 것으로 본다. 신앙을 강조할 때, ‘가슴으로 믿으라’고 말하는 이유다. 영과 육의 대립에서 한국교회는 언제나 ‘영’에 힘을 실었다. 마찬가지로 신학과 신앙의 대립에서는 ‘신앙’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은 신앙과 신학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양자는 자신의 역할을 가지면서 상호 보완적이다. 결국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면 신앙과 신학이 가지는 각자의 역할과 상호성을 보겠다.

신학과 신앙, 고유성

신학과 신앙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신학과 신앙은 각기 나름의 효용성과 타당성을 가진다. 신앙이 은혜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라면, 신학은 신앙과 실천에 대한 2차적인 성찰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은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선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기에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이 믿음은 우리의 인식론적 이해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는가? 부활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부활신앙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기적의 성격을 가진다.

믿음은 ‘나’를 넘어선다. 신앙에는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이 요청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을 ‘초월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체험이 점진적일 수도 있고, 뜨거울 수도 있다.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신앙에는 체험이 수반된다. 이 체험은 바로 ‘하나님-체험’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거룩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다.

신학은 학문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이해를 추구한다. 안셀름(Anselm)의 정의를 따르면,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인간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추구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알고 계실까?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린 것일까? 이런 질문은 결코 불경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마땅히 던질 수 있고, 또 던져야만 하는 질문이다.

질문은 합리성을 요구한다. 이성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 이해를 구한다. 이는 삶 속에서 이해되지 않은 사건을 마주하면 설명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신학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합당한 이해를 마련하는 작업을 한다.

또한 신학은 비판적 기능을 가진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주어진 답변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학은 언제나 타당성을 검증한다. 때로는 당연하게 여기던 신앙의 형태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성찰을 요구한다. 때로는 교회의 선포가 문제가 없는지 의문을 가진다. 때로는 교회가 사회에서 바른 역할을 하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이런 비판의 눈길이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적 기능도 신학의 한 역할이다.

신학과 신앙, 보완적

이제 질문을 해보자. 신앙과 신학,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만약 이 질문이 양자택일을 요구한다면 잘못된 질문이다. 어느 것을 우선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신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신앙이 없으면 신학은 열정을 상실한다. 신앙이 없는 신학 탐구는 신학을 종교학으로 만든다. 신학은 모든 종교를 중립적으로 대하면서 단지 지적 만족을 위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언제나 신앙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신앙 없는 신학은 학문적 이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이때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타당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반면 신학이 없는 신앙은 언제나 자신의 체험에 종속될 위험을 가진다. 성경의 세계는 넓고 하나님의 뜻은 무한하다. 신학을 통한 객관적 성찰의 기회가 없으면 각 신자는 자신의 신앙 체험의 한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신학을 통해 신앙은 개인의 주관성에 빠지지 않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신학과 신앙은 서로를 돕는다. 신학이 신앙 안에 있을 때 열정을 가진다. 신앙이 신학적 토대를 가지면 흔들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렇게 정의한다. ‘신앙이 없는 신학은 건조해지고, 신학이 없는 신앙은 자기 주관성에 빠진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크리스천투데이]“무신론자들의 실존적 종교활용, ‘전도’ 기회 될 수 있다”(2013.02.01)


김학철 교수, 동서신학평론서 <무신론자들의 종교> 비평

▲김학철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종교의 유익성을 인정하는 ‘무신론 2.0’이 등장했다는 최근 보도가 관심을 끈 가운데, ‘무신론자의 실존적 종교 활용 매뉴얼의 명암’을 분석한 글이 발표됐다. 지난 8일부로 법인화가 완료된 사단법인 동서신학포럼 발간 ‘동서신학평론’ 2집에서 김학철 교수(연세대)는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들의 종교>를 비평했다.
 
김 교수는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주창한 ‘종교가 없는 시대와 사회의 도래’는 빗나갔다고 전제했다. 북미 기독교 인구는 줄었지만 예상보다 큰 폭이 아니었고, 대신 제3세계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특히 G2로 불리는 중국 기독교인 수는 공산당원 수를 추월했다. ‘교회나 수도원 소유의 땅이 평신도에게 팔려나감’이라는 애초 ‘세속화’ 단어의 유래를 제공한 유럽에서도 물론 기독교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다른 종교 즉 이슬람 인구가 급격히 상승했다. 결국 전세계에서는 ‘세속 사회’ 대신 ‘종교의 귀환’이 이뤄지고 있다. 개개인의 ‘영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거세지고, 종교 인구 역시 한쪽에서 줄지만 다른 쪽에서 늘고 있는 등 종교에 대한 양상은 현재 매우 복잡하다.

세속 지식사회는 이를 두고 두 가지 반응으로 양분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 등 무신론적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의 귀환 또는 부흥을 냉소 또는 조롱하고 ‘인류 삶에 끼치는 해악의 근원’이라며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또다른 쪽에서는 이를 적극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주 아감벤 등의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예수와 바울 서신을 연구하는 등 기독교와 성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도킨스를 믿어야 하나”면서 “어둠과 고통,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의 기독교”에 자신들의 정신적 자원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김 교수가 분석한 알랭 드 보통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큼은 일생 동안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던” 인물이지만, 이전의 무신론자들처럼 종교를 경멸 혹은 냉소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보다 종교를 통해 배워야 할 것, 보다 정확히는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취사선택할 종교의 통찰과 유산을 점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이 깨달은,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종교의 필요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몸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고, 둘째는 직업상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에 보통은 <무신론자들의 종교>를 통해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태도와 실존주의적 논점들을 살피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신론 자연과학자들’과 다른 방법이다. 김 교수는 “종교에서 ‘영성’을 끄집어내려는 보통의 주 독자들은 현실 변혁에 나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종교를 혐오하는 자연과학자들 모두에게 동의할 수 없는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고 전했다.

보통은 교회 제의의 여러 요소들과 거기에 깃든 정신, 교회 건축물 등이 현대의 지리멸렬한 개인주의가 빚은 소외와 고독, 파편화를 넘어서는 데 훌륭한 통찰의 빛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죄)을 돌아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영웅과 달리 고난받는 사람(예수)을 명예롭게 하려 한다는 것. 여기서 나타나는 보통의 인간관은 인간이 충분히 주체적이고 성숙하여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으므로 어떤 간섭이나 도덕적 훈계 따위가 필요없다는 현대의 ‘낙관주의’에 반대한다. 사람들에게는 도덕과 악덕에 대한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들의 종교>.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비관주의적 인간관, 인간은 우주와 영원에서 볼 때 매우 작고 볼품없는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은 삶을 위한 통찰의 최소 출발점”이라며 “미술과 건축, 여러 제도 등은 보통이 제안했던 종교의 유익을 강화하고 전달하는 핵심 매체였고, 그 매체들에 담긴 메시지가 전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가치들 역시 무신론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책에서 보통은 무신론자들이 종교에서 취할 수 있는 교훈들을 체계화하는 방법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속이 종교를 활용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얻어온 사례는 드물지 않았고, 종교를 전유(專有)하는 마키아벨리와 에드워드 기븐, 어거스트 콩트 등의 방식은 하나님이나 교리, 신앙 등 자신들이 껄끄러워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서 출발했다. 김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의 종교 전유 방식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종교에 대해 마치 새로운 연인에게 호의를 보이듯 다정하지만,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며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교리’가 없는 종교이지만,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학철 교수는 “알랭 드 보통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며 “종교에 접근하면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을 그저 우회하려는 방식은 철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고, 이러한 손쉬운 우회는 도킨스 같은 자연과학자들의 나태함보다 더 비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통이 교리 등의 수용을 꺼리거나 아무런 숙고 없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그의 통념적 이해에서 비롯됐고, 이 부분에서 그의 종교 이해는 자신이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도킨스 류의 종교 이해와 하등 다를 바 없다”며 “보통 같은 세속 지식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종교의 ‘꽃과 열매’는 결코 종교의 ‘나무와 그 뿌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기독교인들 편에서 보통의 책은 ‘주 요리가 나오기 전 전채 요리에서 식사를 그치기 원하는 사람’ 혹은 ‘찐빵의 단팥 없는 부분만을 베어 물은 사람’, ‘전체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 소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되풀이하는 사람’ 혹은 ‘아버지와 사는 것은 싫어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좋아해 그의 몫을 챙기고 멀리 떠난 둘째 아들’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무신론자들의 종교>의 공헌은 뚜렷하다”고 했다. 무신론자들 혹은 비종교인들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대하는 태도의 ‘선택지’를 늘려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도킨스의 과학주의에 경도되기도 싫고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도 탐탁지 않은 이들에게, 무신론적 신념 혹은 비종교인의 자세를 지키면서도 그들의 삶을 풍성히 해줄 자원이 종교에 있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줄 수 있다”며 “이는 종교를 혐오하거나 종교적 언어를 통해 해방운동에 참여하라는 독촉 모두에서 거리를 두려는 비종교인들에게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실존적 문제들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종교가 그들의 질문을 이미 오래 전에 했고 그에 대해 여러 대답들을 함께 고민해 왔음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들 중 일부가 기독교의 대답에 긍정한다면, 이것이 ‘전도’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것.

김학철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 책은 무신론자나 비종교인 모두 종교를 침착하고 정성스레 관찰하고 다시 보게 하는 데 분명히 공헌할 것”이라며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종교의 단물만을 취하고 다른 부분은 거들떠보지 않는 비도덕적 책’이라 비판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보통의 종교 접근방법을 재치있게 역이용해 실용서적으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라고 제안했다.

이 책을 통해 현대인들의 구체적인 필요와 결핍, 갈증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느 선까지 복음의 내용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을지 등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집에 방문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빛나 보이지만 우리가 그간 소홀히 했던 항목들을 발견하고 그 위에 앉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유산에 기뻐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동서신학평론 2집에는 이외에도 김회권 교수(숭실대)가 ‘월터 브루그만의 구약신학 자세히 읽기’, ‘이규성 교수(서강대)가 도올의 책을 비평한 ‘사랑하지 말자?’,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가 김세윤 교수의 저작 <그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두란노)>을 분석한 ‘그 사람의 아들로 미로를 뚫다’를 각각 발표했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2013.01.28)


[신년특집대담]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편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편집자주

▲대담은 지난 23일 오후 4.19 공원 앞 작은 찻집에서 진행됐다. 좌측부터 김진한 편집국장과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 개인의 도덕적 악, 사회 구조적 악 나아가 자연적 악 등에 의해 고통으로 점철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사회가 아닐까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고통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하려 합니다. 하나는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 소급해 해명하려는 인과율적 해석을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겪는 고통을 수단, 즉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일 것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 해석 모두 현재 겪는 ‘고통’의 실체를 자칫 은폐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떤 것을 적용하고자 한들 인간 ‘고통’의 현실이 온전히 극복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이번 대담의 큰 주제가 신학, 종교학, 철학 세 분야에서 인생 속에 있는 고통, 고난 그리고 그것의 극점인 죽음을 주제로 한다니까 관심이 많습니다. 그 주제를 놓고 볼 때 사실 나는 신학의 영역이지만 종교학과 철학과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수신학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전 그 주제가 좋다고 본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 전체는 소위 웰빙의 바람이 불어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잘먹고 잘사는데 초점이 놓아지고 있습니다. 종교 영역까지도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메시지가 주로 축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요. 소위 삼박자 축복이 대표적으로 말하고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가 성서 메시지의 일부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 정신적, 영혼적 행복과 밝은 면만을 너무나 말을 많이 하고 실질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엄존하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 관한 설교나 메시지는 별로 하질 않고 있어요. 종교 내지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런 문제를 도리어 기피하고 도피하려는 무의식에 종교마저도 거기에 아부를 한다고 할까. 호응을 하는 것이어서 건강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주제로 생각을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까 질문에서 악이라는 말을 쓸 때, 즉,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의 근원, 어디서 악이 나오느냐고 할 때 개인적 악의 체험, 사회 속에서의 악의 체험, 자연 속의 악의 체험이란 말을 했는데 이게 전형적인 기독교적 발상이라고 봐요.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인데 선, 악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그 속에는 이미 가치와 의미가 들어있잖아요. 더 나아가서 의지적 요소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자연에서 우리가 악을 말할 수 있는가? 자연의 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화산이나 대홍수나 쓰나미를 통해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겪을 때 그것이 신의 진노나 징벌이라고 쉽게 해석을 한다 할지 이런 것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선악의 이분법이라든지 인격적인 자신의 사고습관을 자연에까지 투사해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는 악이 없어요. 자연은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일 뿐이죠. 홍수가 나거나 쓰나미가 나거나 화산이 터지면 크리스천도 무슬림도 무신론자도 다 재난에 휩쓸리니까요. 일단 자연 속에는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라고 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인간이 자연의 영역까지 관여를 해가지고 그것을 통제하고, (우리가 자연의 분노라는 표현을 쓰지만)재난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자연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악을 추구하면 결국 인간의 어떤 의지와 도덕적 책임 문제가 거기에 따르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야 이해를 할 수 있으나 일단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고 봐요. 동양 고전에서도 그래요. 천지인은 불인하다. 인간은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고 보지만, 하늘과 땅,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것이거든요. 옛날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지푸라기로 사람 형상을 따가지고 제사를 지낸 뒤 제사 끝내면 그 사람 모습의 지푸라기가 길바닥에 버려지고 태워지듯이 자연은 설혹 (지푸라기가)사람일지라도 그들과 똑같이 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여하튼 그렇습니다.

▲김경재 교수는 본격적인 대담을 진행 함에 있어 대전제를 깔고 시작했다. 전제인 즉,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가 썼던 명제인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일단 말씀하신 것 속에서는 두 부분이 중요하네요. 사회적, 개인적 악이 어디서 왜 발생했느냐 하는 원인을 캐내서 그것이 인과응보적 사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 원인을 캐들어가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악을 극복하려는 입장과 미래지향적인 것을 얘기하셨는데 그것도 악을 극복하고 해석하려는 하나의 인간적인 종교적인 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인간이 악과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나의 목회 경험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납득할 수 없다는 데서 제일 큰 고통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적으로라도 설명이 되면 좀 고통이 덜해요. 아무런 설명과 이해가 안되는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이 겪는 고통의 아픔은 배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율적인 과거 원인 규명적인 고난과 고통의 극복이나 미래지향적 사고나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인 통찰이고 지혜죠. 전 그 점에 있어서 동전의 앞, 뒤와 같이 둘다 다 귀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겠지만, 언어에 있어서 고통과 고난이란 말이 혼재가 되는데 나는 고통보다는 고난이 종교적으로 더 적절한 말이라고 봐요. 고통은 글자 그대로 고가 올때 우리가 느끼는 통증을 말하는 것이고. 굉장히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고난은 고가 올때 난처한, 험난한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니까요. 가령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는 이렇게 대명제를 설정했어요. "생명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 이것이 오늘 나의 대담 전체의 제1명제로 받아들여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탐욕과 욕심과 개인적인 집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고 그것이 폭력으로 변할 수 있지만 하여튼 생명으로 존재를 하려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고난이나 고통이란게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대전제로 하고서 둘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봐요.

일부 기독교인들 고난의 책임 신에게로 돌려
고통·고난에 대한 도피주의 행태 지적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먼저 고통과 고난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선의 힘과 악의 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으로 말하자면 선신과 악신이 있어서 사탄의 파워와 성령적 파워의 아마겟돈적인 전쟁의 결과로 악과 고통이 우리 개인과 사회 속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 책임과 공동체 책임을 못 보는 결론에 떨어지게 됩니다. 또 고통과 고난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가벼운 사고는 고난, 고통 도피주의를 발생시킬 수 있고, 외부에 신에게 운명에게 역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그저 내 책임은 없고,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고난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라는 무의식적인 자기 도피를 일으키게 한다고 봐요.

또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한 것은 왜 그러냐고 할 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난이 발생한다고 봐요. 우선 인간이 인격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데 있어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증식하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되 진, 선, 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보다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그것이 좌절되는 어떤 힘 앞에서 고통과 고난을 느끼는 게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생물학적 고통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반 동물하고 똑같겠죠. 일반 동물도 병에 걸리면 통증을 느끼듯이 인간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통증을 느낄 수 있죠. 물론 그런 고통도 고통이죠. 근데 그런 고통 이외에 고통을 안당해도 될만한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고, 고통이 타자에 가해져서 받는 고통과 고난이 있는데 여하튼 고난과 고통은 단순한 인간이 단순한 생물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발돋움 때문에 거기에 부딪히는 역풍이 고난으로, 고통으로 감지된다는 것이에요. 공기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치는 것은 공기의 이동 때문에 내가 공기를 저항해서 힘있게 앞으로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공기의 저항을 받듯이 생명 혹은 창조 질서 속에는 우리가 신앙고백적으로 말하면 본래적인 창조 질서 혹은 생명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혹은 누적된 역사에 의해서 그것이 뒤틀려지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 가운데서 오는 고통, 그것의 누적이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고통. 이런 것이 인간의 고통사 속에서 훨씬 더 크다고 봅니다.

가령 근대사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해 위대한 삶을 살아왔던 모든 분들도 편안하게 자연에 순응해서 살려고 작정했더라면, 그 분들이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되죠. 그 분들이 민족이네 나라네 독립이네 국가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뜻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저항하고 극복하고 보다 바람직한 생명 질서로 회복을 하려는 몸부림 때문에 고난이 그들에게 오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은 그런 인간의 가치와 의미 추구, 뜻 추구, 의지적 결단 문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인간은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일 수 있는 양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말이죠. 그것을 봐야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말로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으로는 고통은 중립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엄존해 있는 고통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가 연꽃 위 평화로운 미소의 고다마 붓다와 십자가에서의 일그러진 얼굴의 예수상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고난·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의 말을 빌려 "이 두 상징이 고난을 대하는 종교의 두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거기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불교가 말하는 불국토(佛國土)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불교의 근본 종지를 꿰뚫고 보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인간의 아집과 집착 때문에 생긴다고 봐요. 불교가 말하는 삼라만물의 인과연에 인해서 모든 만물이 관계되고 발생하고 생기는 인연생기법을 꿰뚫어 직시하면 그것이 해탈인데 해탈을 해버리면 사회 속의 불의한 구조나 제도나 악의 현실이 있더라도 그것에 매여서 좌지우지 당하지 아니하고 초탈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쪽으로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불교쪽에서는 말이죠. 불교를 나타내는 상징 중 연꽃이 있습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마치 연꽃이 뿌리를 내리는 더러운 오물 밑바닥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기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요. 또 물결이 출렁이는 역사의 시간의 소요와 요동에도 물들지 말고,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로 수중을 뚫고 나와서 수면 위로 연꽃을 피우란 말이거든요. 인간의 삶은 그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면을 존경하면서도 연꽃이라는게 뿌리가 건강하지 못하고 줄기가 통과하는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꽃도 아름답게 필 수 없으니까 연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우지 못하게 하는 병든 토양, 병든 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죠. 고통과 고난의 현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고요한 명상과 선적 수행을 통해서 고난과 고난의 현실을 도리어 터득함으로써 일체의 소요로부터 자유로워라 하는 마음의 평정, 마음의 해탈 못지 않게 고통의 현실을 일으키는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악의 요소를 제거해서 지금 고통 당하고 있는 생명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내 마음의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는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표현을 해요. 늘 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위 샬롬적인,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생명 현실을 지향해서 노력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보죠. 그래야 할 당위적인 세상, 당위적인 생명 상태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쪽이 더 강한셈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해나가는 속에서 더욱 고통과 고난이 증폭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하죠. 이야기가 너무 형이상학적 쪽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불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고다마 붓다는 연꽃 위에서 고요하게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미소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불국사의 불교의 상징이 연 위에 앉아있는 해탈하는 고요한 평화의 모습이죠. 반면 기독교는 33세의 젊은이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고 고통당하는 십자가 고상을 종교적 상징으로 삼았단 말이에요.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런 표현을 썼어요. 고다마 붓다의 연 위에 앉아 있는 미소의 포즈,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고난의 포즈. 두 포즈는 인간의 종교의 두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여하튼 기독교는 고난의 현실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적인 창조의 축복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악에 의해서 축적되고 형성된 비생명적 폭력과 억압 앞에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종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뚜렷해요.

얼마 전 폴 니터가 와서 불교 대표와 대담을 했는데 거기서도 분명히 드러났거든요. 양쪽에서 서로 존경하고 배울 것은 배우지만 서로간 특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한국 기독교는 대단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라고 말은 많이 하는데 한국인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교육현실, 생계현실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난 극복의 노력, 고난을 유발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집단적 폭력과 은폐된 악에 대한 저항의식이 대단히 약화된 개신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종교가 소위 부르주아화 해 가고 우리만 행복하고 축복 받으면 됐지 하는 것에 머물러서 입니다. 삶 속에, 생명 속에 고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려는 성서적인, 예언자적인 정신을 소홀히 한게 아닌가 합니다.”

- 숙명론을 조장하여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 종교적 가르침을 말하자면 통상 사장되었다고 보는 카스트제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도에 가서 절감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는 위대한 종교 국가요, 철학의 국가로 아는데 현실적으로 인도를 가보면 불교를 탄생시킨 나라에 불교는 거의 없구요. 통속적인 힌두교와 전통적인 일종의 무속종교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종교 속에서 (이미 헌법이나 지성사에 의해서는 극복되었다 정복되었다고 말하는)고대 브라만족의 카스트제도가 생활 속에 너무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려가지고 인도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려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들은 굉장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데 인도 인구 10억 중 3,4억은 사실 너무나 비참해요. 그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오늘날 인도 사회 뉴스를 보자면 버스 속에서 여학생을 겁탈하는 강간 사건이 자꾸 터져서 인도 사회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명 국가라는 나라에서 왜 그러는 것일까요? 사회 구조적인 인간악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거든요. 인도 사회를 그렇게 만든 근본을 보니까 카스트제도의 업보설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더라구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업보의 결과를 통해 윤회하는 과정이니까. 내가 오늘 카스트제도 맨 밑바닥의 가정에 태어나서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모든 이런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은 자기 생애의 과거가 그랬든지 지난 조상들이 그랬든지 그런 업보 때문에 지금은 이 시대에는 그것을 감내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어요. 말하자면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죠.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

▲김경재 교수는 과거가 현재를 완전히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을 끊어내는 힘이 바로 “복음의 힘”임을 역설했다.
그래서 종교가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되어버려요. 아시아 종교들 중 상당수가 현재 인간의 개인과 가정과 집단에 내리 덮이는 소위 악의 힘, 고통과 고난을 운명과 숙명론으로, 조상의 탓으로, 종교적 업보설로 그것을 그저 인내하도록 가르치는 그런 요소가 없지 않아 있는데 나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깨트려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그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정적 요소가 창조 질서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돼요. 조금 있다가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이나 집단적 지배 욕망 등이 증폭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김으로써 타자에게 고통과 악을 가중시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이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초대 우리 한국 기독교의 태도가 옳았다고 봐요. 사주팔자도 부정하고, 아무튼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역사를 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가 현재를 완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그것을 끊어내는 힘이 복음의 힘이라고 말이죠. 새로운 생명 질서를 창조해야 하고 악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뚜렷하게 자각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봅니다.”

- 지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뿌리깊은 업보설, 인과응보적 사고를 끊어내는 것이 복음의 힘이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성서에서 소개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제3의 답변을 주십니다. 현재 겪는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적 해석을 폐지하신 것으로 봐도 될까요? 

“중요한 점인데 소위 도덕 세계나 윤리학이나 종교학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이 인과응보설인데 모든 종교 속에 그것이 있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을 제공하는 행동과 생각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과가 생기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인과응보의 사상 속에는 인간의 도덕적인 선악 행위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절대자 신, 브라만, 부처님, 염라대왕이 있어서 그런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마치 판검사가 다 조사를 해서 기록에 남겼다가 죽은 다음 사후에 그에 대한 죄값을 선고를 내린다. 이런 관점에서 인과응보란 그에 응하는 보답 혹은 보복을 한다는 의미로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 신구약 성경을 보면 인과응보적인 요소에서 살려야 할 점은 살리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서 전통 신앙에서는 쭉 흘러 내려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이 문제를 가장 고민한 것이 지혜문학 욥기죠. 욥기서의 핵심은 왜 선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과 행복을 보장하는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대로 철저하게 준행해서 사는 사람이 더 비극과 고통을 겪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없는 것 같이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 더 잘먹고 잘사느냐는 것에 대한 질문이거든요.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욥이라고 하는 가정의 파산을 통해 드라마로 희곡화 한 것이죠. 욥의 세 친구가 나타나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욥 너 자신이 깨끗한지 모르지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자녀들이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은게 있지 않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네가 자신만만하고 깨끗하다고 절대 선하고 옳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다. 뭔가 네 가족이나 자녀 속에, 오늘 네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말하자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란 합니다. 끝까지 인과응보론을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 논리를 가지고 추궁해 들어가는 거에요.

‘고통’에 대한 인과율적 해석 폐지해야 하는가?!
조건 지어진 인간의 특수성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

그런데 욥이 저항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돌아가신 문익환 선생에게 구약신학을 배운 것 중 사실 그거 하나만 남아요. 욥은 친구들의 비난을 거절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내가 깨끗하고 선하고 내 자손들이 흠없는 데도 고통을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차원은 한 단계 높은데 가정의 고통과 고난을 과거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라요. 그게 묘한 면이 있죠. 뒤집어서 말하면 욥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과거의 죄를 꼬박꼬박 다 기억해 가지고 아주 엄정한 대심문관처럼 판검사처럼 연약한 피조물들의 죗값을 꼬장꼬장 묻고 따지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다른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를 지금 당장은 모르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 가죽의 옷을 벗어버린 다음에라도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겠다는 것이 욥기의 핵심이란 말이죠. 다시 말하면 인과응보설을 완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한계를 설정하고 고난이 인간 삶 속에 있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인과응보 이상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예수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이야기 말하고자 함 아니겠어요.
문익환 목사는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지막에 욥이 종교적 신비체험을 하는 찰나의 순간에 왜 나의 가문에 납득이 안되는, 도덕적 합리주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오니까 그의 항변과 질문이 더 이상 질문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이제까지는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어왔고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하나님께 대들고 따졌는데 내가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오니 내가 참회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잖아요. 소위 인과응보라는 것을 오늘로 말하면 인과율입니다. 물리학에서의 원인과 결과에서처럼 도덕적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 인과론이거든요. 종교와 기독교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고난과 악을 인과율적으로 풀어서 해결할 것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 축적된 악, 신의 이름을 가지고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에 대해 보다 인간적 삶을 위한 제도적 실현을 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니까 프랑스 혁명 일어날 당시 루이 14,15세 잘먹고 잘 살았더만. 베르사유 궁전에서 무도회나 열고. 왕권신수설에 근거해서 말이죠. 거기에 성직자들도 야합을 했지요. 신의 이름으로 그 시대 농노들과 대부분의 시민들의 고통과 악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사회 모순으로 터져나온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던 것이죠.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율법이 아닌 은혜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잘 봐야 하는데 너희가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얘기도 있어요. 악을 심는 자는 사망의 열매를, 성령 안에서 심는 자는 생명을 거둔다. 심는대로 거둔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인과응보적 사고가 있다는 것이에요. 예수께서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다 같은 이해죠. 인과응보론의 양면을 봐야 한다고 봐요. 그것은 종교에서 중요한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아까 말한 힌두교의 인과응보가 이상하게 종교적 억압 기제, 이념으로까지 둔갑을 해서 숙명론적으로 카스트 제도란 관념의 이론으로 변질해 버리면 안되겠지만 인간적 사회적 삶 속에서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문명 속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비극에 있어서는 유효한 것이거든요. 예를들면 원시 시대는 자연이 주는 고통이 90%였다면 지금 시대는 거꾸로죠. 인간 역사와 사회가 주는 고통이 90%고 자연 재난은 10%에 불과합니다. 90%의 인간이 저지르고 증폭되어가는 고통의 원인, 악의 원인은 인과적 원인을 살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사회적, 제도적 바른 질서 수립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 속에 정의(justice)라는 요소가 기독교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나 신학에서는 그런 문제만 다 해결이 되면 인간의 삶 속에 고난과 고통이란 것이 없어지느냐. 대표적으로 질병 같은 것이지. 사고사나 말이죠. 자연히 죽음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결론은 그래요. 어제도 나는 설교에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가 스무살 때 넌크리스천 가정에서 갑자기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6.25 직후에 10살 전후로 해서 광주 집에서 머무른 기억이 있습니다. 늦 여름 초가을이 되면 섬돌 아래서 귀뚜라미가 울곤 했는데 우는 귀뚜라미의 처량한 초가을의 소리를 듣던 10살 먹은 소년이 귀뚜라미에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귀뚜라미야. 내가 너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너보다 몸도 크고 머리도 발달하고 지식도 있는데 너는 내가 쳐다 보는 이것을 아느냐" 귀뚜라미가 알리가 없잖아요. 귀뚜라미도 하나의 생명체고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명체가 갖는 생명의 매카니즘의 공통요소가 있지만 소위 진화곡선에서 인간이 도달하는 정신의 자기초월 능력이나 자기성찰 능력 그리고 진·선·미 추구 능력이나 이런 것은 귀뚜라미는 모른단 말이야. 내가 비록 어리지만 인간으로서 도달해 버리는 정신적인 한 단계, 두 단계 높은 차원을 같은 1미터 내지 2미터 안의 동일 시공간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야. 귀뚜라미는 모르죠. 내가 10살때 느낀 것을 70살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그동안 학문을 하고 성인이 되고 자연과학의 지식을 얻게 되고 등등 다해서 10살때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지식을 쌓았죠. 그러나 현재적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과 우리 삶의 그 구조틀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틀 안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을 하려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나 성경 外 이야기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릴 때도 많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지금 이해하고 규정하고 설명하는 소위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혹은 도덕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그것보다 더 크고 넓고, (차원적으로 말하자면)다차원적인 세계인 것 같아요. 귀뚜라미는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 밖에 모르듯이 인간은 날고 뛰어도 시공 4차원의 세계와 인과율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계속)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정리= 이서진 기자]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고려대 교수도 소설가 이외수 비난 기고문(2013.01.24)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이기식 교수./사진=이 교수 제공
소설가 이외수(67)씨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 마광수 연세대 교수가 과거 이외수 소설가를 비난한 글이 공개된 가운데, 고려대 교수까지 함께 비난에 나선 것이다.

이기식(57)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23일 한국경제연구원에 ‘감성마을, 예술 감성이 아닌 이익 감성의 산물’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이 교수는 “감성마을은 좌·우파의 대립 문제가 아니라 돈을 매개로 예술과 정치가 서로 결탁한 것에 불과하다. 즉 이외수는 경제적 이익을, 화천군수는 정치적 이익을 나누기 위해 감성마을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작동한 것은 예술을 위한 감성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이익 감성’ 뿐이다”라며 글을 시작했다.

이 교수는 서양에서 권력자가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은 이미 18세기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권력자에게 의존하여 예술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점차 강해졌고, 또 예술가들은 새로 생겨난 예술 시장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라며 “이때부터 예술가는 예술의 자유를 누리려면 스스로 돈벌이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작가와 정갑철 화천군수’의 관계를 ‘제라르 드 파르디외와 푸틴 대통령’의 관계에 비유했다. 그는 두 관계 모두 “예술가는 경제적 이득을, 정치가는 예술가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제라르 드 파르디외는 지난해 12월 “많은 세금 내고 모욕받느니 망명하겠다”며 러시아로 건너간 프랑스 배우이다.

그는 먼저 이 작가를 향해 “무릉도원 같은 환경에서 살면서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실 정치에도 관여한다.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교육감선거에서는 야당 후보를 지원하다가, 자기 거주지의 국회의원은 여당 후보를 지원했다”며 “이외수가 이런 ‘정치적 자유’를 계속 누리려면 그 집에서 나와 사저로 돌아가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화천군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화천군수는 서양 근대 초기의 교황도 군주도 메디치가 사람도 아니다. 그는 자기 돈이 아니라 세금으로 이외수를 후원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대로 80억을 투자해 100억 투자 효과를 보았다면 증거를 보여줘야 한다. 그 투자 효과가 어떻게 주민들에게 돌아갔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민을 위해서 세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홍보를 위해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예술가와 정치가가 현실 정치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면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는 현실 정치로부터 유혹이 오더라도 예술 본연의 원칙에 충실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또 화천 군수는 국민 세금을 아껴 잘 쓰는 것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법적 정치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글을 맺었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이장식 칼럼] 목사직과 생존권(2013.01.21)


이장식·한신대 명예교수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인권운동은 서양에서 왕권의 남용을 막고 시민의 인권을 자유와 평등권과 함께 쟁취하는 정치운동이었으나 개인의 재산권과 함께 행복추구의 권리를 보장하는 생존권 운동으로 되어가서 직업은 생존권에 속하는 것이 되었다.
 
최근 한국의 헌법재판소에서 매춘부로서 정죄를 받고 있는 여성의 인신매매를 개인의 인권에 속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합헌’으로 판정을 내렸다. 즉 살아가기 위한 한 직업의 선택으로서 개인의 생존권 행위라는 해석이다. 인신매매 여성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도적질하거나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살아가기 위해 자기들의 몸을 파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이 자기들이 선택한 직업이며 그것은 자기들의 생존권이라는 말이다.

인신매매의 여성의 직업이 생존권의 문제라고 한다면 한 나라의 기관이나 사업체나 상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먹고 입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지식과 기술을 팔고 또는 주먹의 힘이나 손발의 힘과 재주를 팔아서 살아가는 것이니 국회의원이나 관공서나 교육기관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UN이 「인권선언」의 조항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한 조항은 인권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직업이 개인의 생존권의 인권이라 하지만 인류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은 정죄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직업인이 생존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것 없이 부폐와 타락과 부정을 행하면 여성이 그 몸을 파는 인신매매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사실 오늘 우리 한국에는 매춘하는 여성들보다 더 혐오를 받아야 할 직업인들이 많아 우리나라를 온통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 목사직은 어떤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목사직이 한갖 행복추구의 생존권 행위 방식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과거 교회가 가난해서 목사의 생활이 가난하고 어려웠을 때 목사의 자식들이 목사직을 기피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세습할만한 직업이 되었다.

또 옛날 가난한 시대에는 신학교 지원생이 많지 않았으나 교회 목사직의 생활이 유족하게 되자 일류대학교 졸업생들이 신학교에 모여들었고 돈 있는 장로들은 목사 사위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 모여대생들이 신랑감의 직업을 고르는 여론조사(?)에서 목사직은 이발사 직업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목사들이 국회의원이나 정부장관급의 직업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대우를 잘 받는 목사들 중에는 교회와 교계에서 성직의 의무를 바로 행사하지 못하여 교계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사람들이 교계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성경지식이나 신학지식이나 경험이나 명예를 팔아서 살아간다면 그들의 목사 직업이 어떤 직업 범주에 들어갈 것인지 숙고해 볼만하다.

예수님이 매춘부 막달라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을뻔 하였을 때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정죄하지 않았으나 다시는 매춘 행위의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녀가 살아가기 위해 자기 몸 밖에 팔 것이 없었던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정죄하기 보다 그녀를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해 용서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직업을 선택할 때 각자가 가진 것, 가장 값이 나갈만한 것을 내어놓고 자본주의적 자유시장에서 경쟁해 가면서 생존권을 보장받고 있는데 성(性)을 상품으로 내어놓는 여성의 인신매매 행위가 사회에 해를 끼쳐서 정죄를 받아야 한다면 다른 모든 직업인들에게도 마땅히 해당되는 것이고 물론 목사직에도 해당이 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성매매 행위를 합헌으로 판결한 것을 보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이고 특히 기독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같이 분개할지 모르지만 그 판결이 인권에 따르는 의무를 묻지 않는 것에 대한 분개를 한국사회의 모든 직장의 직업인들이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하여 봄으로써 한국사회와 정계와 교계가 정화되었으면 한다. 한국에는 생존권도 보장 못받고 목사직을 수행하는 목사들도 많고 또 목사직을 아예 그만둔 무임목사도 많다. 농어촌의 가난한 교회를 회피하고 떠돌아 다니는 신학교 졸업생들도 많다. 목사직이 생존권 문제인가.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1. 입문:신학과 신앙] ③ 신학의 역할 : 평신도가 신학을?(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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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토대 없으면 신앙과 삶이 분리돼

평신도가 왜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가. 성경대로 살면 되고, 신앙대로 살면 되지, 웬 신학 타령인가. 요즘은 신학을 전문하는 목회자도 신학공부를 멀리하는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은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평신도라면 다시 반문할 것이다. 정말 일반 신자도 신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신학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신학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답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신학의 역할을 세 가지로 말해보려 한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답변해 보시라.

성경을 통일성 있게

신학은 성경의 내용을 ‘통일성’ 있게 보는 토대를 제공한다. 성경의 내용과 표현 방법은 다양하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만나면 누구나 당황한다. 또 성경의 표현에는 역사적 문헌의 성격, 문학적 성격, 종교적 성격, 수사학적 성격 등이 섞여 있다. 때로는 역사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때로는 시적인 상징과 은유를 사용한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쉽게 이해되지만, 어떤 구절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 뒤에 원래의 뜻이 숨어있다.

신학적 기초가 없으면 성경에 대한 지식이 모자이크식이 된다. 성경 전체를 통일성 있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성경 각 구절의 충돌되는 부분이나 다양한 표현 밑에 들어있는 의미를 조화롭게 볼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전체적이고 조화 있게 보지 못하면 많은 교리적 의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예를 들어보자. 세례를 받은 후 죄를 지으면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이혼은 어떤 경우에 허용되는가. 죽은 후에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 신자들은 수도 없이 많은 교리적 질문을 가진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 모두 있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신학의 첫 번째 역할이 여기에 있다.

설교의 내용, 삶과 연결

신학은 설교의 ‘내용’을 충실하게 만들어 주고, 설교를 삶과 ‘연결’시켜준다. 개신교에서 예배의 중심에는 설교가 있다. 설교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는 제한된 시간에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성경을 삶과 충분히 연결시키지 못할 때가 많다. 설교는 주로 ‘믿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결신을 선포한다. 어떤 설교는 내용은 없으면서, ‘믿어라!’는 결신의 요청만 반복한다.

물론 상당수 신자들은 설교를 듣고 ‘믿음대로 살겠다’는 결신에 이른다. 그러나 교회의 문을 떠나 삶으로 돌아오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들었던 설교에 내용이 없거나 삶과 믿음을 구체적으로 연결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가 삶과 연결되지 못하면 신앙은 활기를 잃고 만다.

만약 어떤 신자가 ‘내용 없는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게 된다면 매우 답답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 믿기로 결단을 했지. 나도 믿음대로 살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지?’ 한국교회에서 내용 없는 설교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힘들어한다. 신학은 설교의 내용을 채워주고, 설교를 삶과 연결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자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아가 신학은 삶과 연관된 많은 문제들에 답한다. 낙태를 해도 되는가. 안락사는 어떤 경우에 허용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의 직업관은 무엇인가. 정치에 관여해도 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면 결국 신앙과 삶은 분리된다. 신학의 두 번째 역할이다.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다

신학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신앙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특정한 시대 속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떠나 구름 위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시대 사이의 ‘긴장’을 가진다.

각 시대는 그 문화가 주는 가치관, 세계관,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인간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큰 ‘틀’이다. 누구도 그 시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성경의 가치관과 괴리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혼란에 빠진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운다. 진화론은 과학적 세계관의 일부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진화론과 창조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모르기 때문에 혼란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가 주는 세계관이나 우주관으로 인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산다. 인간복제가 가능하다면 창조신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녀교육에서 성경의 가치관과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치관 중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신학은 이런 주제들에 답변을 준다. 각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답변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와 우리가 속한 세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신학의 세 번째 역할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어느 시대이건 평신도가 신학적으로 탄탄할 때 교회가 건강하였다. 평신도가 신학적 토대가 없으면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상실하며, 이단에 쉽게 휩쓸리면서 교회가 약해진다.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판단하라. 필자는 한 가지 당부를 하는 것으로 오늘 강좌를 마치겠다. 많은 신자들이 위에서 필자가 제기한 그런 질문들에 답을 얻지 못하고 답답해하며 교회를 떠난다. 독자 여러분, 쉽게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 쉽게 교회를 떠나지 말라. 여러분이 고민하는 대부분의 질문에 이미 신학적 대답이 있다.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공허한 것이 아니다.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 교수>

[바이블시론-차정식] 약속과 사과의 수사학(2013.01.17)

‘약속’이란 말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사과’라는 말도 그 실체가 모호한 상태에서 겉돌며 천시당하고 있다. 대선의 후유증이 그 발화지점이다. 양대 정당 모두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겠다는 말로 국민들의 귓전을 간질이곤 했다. 누가 봐도 황당하게 입안된 국회의원 연금법을 폐지 또는 대폭 손질하겠다는 공약이 그 가운데 있었다. 민주당에서는 의원들의 세비를 30% 삭감하겠다고 화끈하게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약속의 현주소가 실종되면서 슬슬 망각의 저편으로 돌려버리려는 꼼수가 엿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한 노인기초연금의 증액과 4대 중증질환에 대한 전폭적인 의료보험금 지원 등과 같은 복지 공약도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다가 핵심 공약에서 새 정권의 책임자들이 슬슬 손을 빼면서 오리발을 내미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사과 투어’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는데 이건 너무 빤한 메뉴라 식상해하는 반응이 많다.

국가지도자 약속은 엄중해야

약속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특히 한 공동체나 국가 지도자의 약속은 엄중해야 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혹여 판단 착오와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그것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정직하게 국민 앞에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뼈를 깎는 사과가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그 사과는 책임을 지는 ‘회개의 열매’를 포함해야 한다.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들의 실망과 좌절이 엄연한데 공인의 사과가 단순히 미안한 심정을 외교적 겉치레 형태로 내비치는 것은 누가 봐도 파렴치한 짓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언약의 신으로 등장하신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의 충실한 준수를 요구하신다. 약속의 무시나 불이행에 대한 하나님의 추궁은 실로 엄중했다. 단순히 말의 사과가 아니라 철저한 참회로 온전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그 잘못에 대한 징벌의 감수를 의미했다.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답게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관대한 용서의 기회도 숱하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 단호하게 약속의 파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 당사자들을 멸절시키다시피 하면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는 특히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지도자들의 책임에 대해 매우 혹독한 처분을 내렸다. 예수 역시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처신이 그 허황된 말의 약속에 있음을 간파하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게다가 그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장차 심판의 자리에서 심문을 받으리라고 경고했다. 함부로 약속을 남발하고 그 허방에 대해서는 편리한 사과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습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으리라는 준엄한 선언이었다.

국민 기망하려는 행태 멈춰라

국회의원과 대통령, 국가와 공기관의 대표 지도자들은 더 이상 헛된 약속으로 국민을 기망하려는 행태를 멈추어야 한다. 이미 한 약속은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성실하게 이행하되 그 한계에 대해서는 정직한 해명을 통해 신뢰할 만한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약속과 사과가 말의 번지르르한 수사로 겉도는 모습을 국민들은 지금까지 볼 만큼 봐왔다. 무엇보다 모든 말의 약속을 섬세하게 기억하는 언약의 하나님 앞에 떨리는 심정으로 최후의 기회를 선용해야 한다. 진지한 회개의 열매로 제 말의 후과를 책임지고자 하지 않는 이들, 허황된 기만의 말로 국민을 무시하는 지도자들은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을 통렬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크리스천투데이]‘일상부터 일생까지’ 기독 철학자 강영안 교수의 ‘응답’(2013.01.15)


‘르네상스적 지식인’을 눈앞에서 만난 <묻고 답하다>

▲<묻고 답하다>.
묻고 답하다

강영안·양희송 | 홍성사 | 264쪽 | 13,000원

대표적인 기독 철학자인 강영안 교수(서강대)가 삶과 죽음, 그 너머의 온갖 질문들에 답했다. 철학자의 말과 글이지만 난해하지 않은 대담집 <묻고 답하다(홍성사)>는 그 결과물이다.

문답의 주제는 ‘죽음’에서 시작하여 고통과 웃음, 일상과 종교 등 우리 삶과 관련된 것들로 이어지고, 교회와 개인·공동체, 십자가와 한국교회 등 이 시대 영성이 가진 여러 문제점들을 파헤친 후, 지성과 과학, 의심과 윤리 등 신앙과 이성의 관계로까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책과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까지, 무려 15개 분야의 이야기가 종횡무진 이어진다.

첫 주제인 ‘죽음’에 대해서는 지난해 11월 ‘키에르케고어 학회 공개강좌’에서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비교했던 그의 강연 내용이 비슷하게 제시된다. 소크라테스 뿐 아니라 동양의 공자나 장자까지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심지어 ‘해방’으로까지 받아들이는데, 예수는 죽음을 ‘끔찍한 사건’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부활을 ‘마지막 원수를 이긴 사건’으로 표현하면서 죽음을 ‘마지막 원수’로 보고 있다.

강 교수는 이같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죽음이라는 어두움과 음각을 통해 그만큼 삶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고, 우리 자신이 누구나 그러한 타자(他者)의 내어줌이나 희생 덕분에 존재하는 ‘빚진 자’임을 알게 된다”며 “이는 후회나 죄책감보다는 내 존재가 타자로부터 지탱된다는 ‘감사 의식’을 불러온다”고 답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사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죽음에 직면에 있다는 현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우리 삶에 드리워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더 많아지고 커질 수밖에 없다”며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과학기술도, 문학도, 철학도 아닌 오직 사랑(아 8:6)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그는 덧붙인다.

‘고통’에 대해서는 자신이 활동을 쉬면서 병마와 싸웠던 1-2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월이 지날수록 무엇이 되거나(Becoming)  무엇을 하려고(Doing) 하지 말고 어떠한 존재가 될지(Being)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등에 나오는 ‘웃음’을 살피면서는 “우리가 가진 허식이나 가식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 자신을 웃음에  맡긴다는 건 타인을 내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타인과 손을 잡는 것이고, 타인과 만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며 “웃을 수 있는 것, 웃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자 진정성 있는 삶의 모습”이라고 풀이한다.

▲‘묻고 답하는’ 강영안 교수와 양희송 대표(왼쪽부터). ⓒ홍성사 제공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장소인 ‘일상’의 중요성도 설파했다. 종교도 일상을 벗어날 수 없고, 세속을 초월한 수도원적 삶만을 ‘거룩한 영성’이라 부르는 영성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도 식사와 잠, 성관계와 직업 등을 거룩하게 생각했듯 기독교인들도 이제 거대담론으로서의 ‘비전’만을 꿈꾸지 말고,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리는 민감하고 섬세한 현실의 ‘하나님 나라’를 논할 때라고도 했다.

나아가 참된 ‘종교’도 결국 성과 속, 영과 육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일상의 회복’에서 찾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부터 설교나 예배 중심의 교육체제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과 지식을 얻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성경신학·조직신학·역사신학·실천신학이라는 전통적 네 가지 신학 분류의 확립은 불과 2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고, 이는 본지 신년대담에서 은준관 총장(실천신대)이 지적했듯 학문적 분류일 뿐 목회자 양성에는 맞지 않다고도 했다. “신학 교육의 목적·방법·과정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키만큼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엡 4:13)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도록 훈련할 수 없습니다.”

6-10장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개인인지 공동체인지를 논하고, 활동적이고 성공 지향적인 현재 한국교회에 상대적으로 부족해진 ‘낮춤과 비움의 기독론’, ‘내세 중심적·삶으로 열매맺는 신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서는 앞 부분에서 길지 않던 질문자의 목소리가 늘어나고, 반론도 제기된다. 강영안 교수는 “이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 중심의 신앙에서 훨씬 확장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전도 뿐 아니라 이 세계를 가꾸고 회복하는 일이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고, 이렇게 본다면 목회의 기본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하고, 목회자가 바뀌어야 하고, 교회의 근본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2박 3일간 양평 모새골에서 강 교수와 함께하며 ‘질문’을 맡은 양희송 대표(청어람아카데미)는 강 교수에 대해 “검토해야 할 문제의 핵심을 즉각 분별해 내고, 그 논의에 필요한 동서양 고전과 사상가를 바로바로 인용하면서 대답했다”며 “그것은 백과사전과도 같은 지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을 눈앞에서 만나는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총평한다.

강영안 교수는 대담을 마무리하는 글에서 “이것은 해답(answer)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내가 한 답은 해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던져졌으니 질문에 대해 내가 보여야 할 응답(reponses)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가 한 반응, 응답은 나의 지적·인격적 책임에서 나온 것이다. 나에게 답은 없지만 내가 믿고, 읽고,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을 바탕으로 나는 타인에게 반응을 보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담을 나누면서, 여기 다룬 주제들을 좀더 깊이 탐구하고 치밀하게 다루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라는 평을 얻은 강영안 교수가 지난해 강연하는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원전주의자’라는 별명답게 강 교수는 원문으로 읽지 않으면 인용하지 않는 엄격함을 지녔지만, 그 ‘응답’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동서양 철학과 신학이 가득했다. 고신대 재학 중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외대로 옮겨 네덜란드어와 철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1978년 벨기에에서 철학학사·석사 학위를, 198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네덜란드 레이든대 철학과 전임강사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맡아 강의하다 귀국 후 계명대를 거쳐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체는 죽었는가>,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등을 썼다.

그는 ‘먹는다는 것’, ‘잔다는 것’, ‘집 짓고 산다는 것’, ‘일한다는 것’, ‘쉰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 등 일상의 주제를 묵상하는 글을 최근 써 왔다며 이를 학문적 논리와 깊이, 내용을 가진 글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도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사랑받는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한국 기독교판’도 곧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