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누구나 신년에는 새로운 희망을 세운다. 대부분 2, 3월까지는 그 희망의 여운과 설렘을 간직한다. 그러나 3, 4월만 지나도 대부분 꿈에 부푼 열정은 식고 희망을 포기한 채 체념하고 좌절한다. 그런 사람이 많지만 소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더 집념에 불탄다.
물론 그 희망 때문에 연말에 더 좌절하는 경우도 있지만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빌리에 드 릴라당이 1883년에 쓴 단편 소설 ‘희망고문’에 보면 어느날 유대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희망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탈출구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 그는 새로운 삶을 만끽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종교재판소 소장이 다시 그를 뒤에서 붙잡아 버린다. 그 순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릴라당은 희망을 슬쩍 보여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희망고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현 시대야말로 잔인한 희망고문을 당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중산층 붕괴와 청년실업의 한파가 몰아쳤고 글로벌 경제위기 사태까지 이어지며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보다는 힐링이, 절망보다 희망이 문화 트렌드로 부상하는 ‘희망 과잉상태’를 맞고 있다.
그러나 냉철한 현실 직시와 고난과 맞서 싸우는 야성이 없는 힐링이나 희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고난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실용적 매뉴얼이나 근성을 키워주는 메시지가 아닌 감성적 힐링과 유희적 희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상품화한 문화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대중을 속이는 또 다른 기만이며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빼앗고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넣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고문을 넘어서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고난과 맞서 싸우는 야성적 믿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요셉의 삶은 희망고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값싼 힐링이나 허황된 희망의 위무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붙잡고 맞서 싸웠다. 그래서 결국 그 희망고문을 넘어 애굽의 총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마케팅에 포장된 거짓 희망은 우리의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희망고문을 넘어서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신앙이다. 올해는 경제가 더 어렵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도 험난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거짓 희망고문에 속아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올해는 더욱 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참된 희망을 노래하자.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시린 새벽길을 나서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과 꿈을 굳건한 두 팔로 붙잡고서.
<용인 새에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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