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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5일 월요일

[국민일보][소강석 목사의 시편] 동성애, 과연 유전자 때문인가(2013.03.25)



동성애 논란에서 가장 큰 이슈는 과연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정죄하기 전에 이해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동성애는 유전자 때문인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이슈화시킨 사람은 미국의 해머 박사다. 1993년에 해머 연구팀은 동성애자들의 염색체를 분석하여 유전자 중 다형질 유전자인 Xq28이 동성애의 본능과 욕구를 일으킨다고 발표했다. 물론 해머 박사 역시 동성애자였다. 그는 그 연구 발표로 전 세계 동성애자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언론들이 앞 다퉈 동성애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바로 이 결과로 일반인들에게 동성애자들은 유전자 때문에 본인의 의지나 감정에 관계없이 운명적으로 동성애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 연구 발표로 한때 기독교에서도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지 당황했다. 심지어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동성애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까지 하면서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1999년에 캐나다의 라이스 박사 연구팀이 해머보다 더 많은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Xq28 염색체 안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을 분석하여 해머 박사의 연구 결과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2005년에는 해머 박사를 포함한 더 확대된 연구팀이 더 많은 동성애자의 가계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동성애와 유전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과는 언론에 크게 부각이 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일반인들은 동성애가 유전적이라는 오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동성애를 선천적 유전 요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동성애에 관한 왜곡된 인식이 대중예술, 방송, 언론, 출판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바이러스처럼 번져가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할 일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교계에서 김영진 황우여 의원님, 전용태 김기현 김명규 두상달 장로님 등 의식 있고 깨어 있는 분들이 동성애 입법을 저지하고 반 흐름 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하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심각한 문제의식과 경각심을 가지고 동성애 저지와 반 흐름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순식간에 친 동성애적 흐름이 쓰나미처럼 우리 조국을 덮칠지 모른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을 무조건 정죄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교계가 그분들을 품고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긍휼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올바른 성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동성애란 어떤 경우에도 유전적 요인이 아니며 생물학적 순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성 정체성 유지와 미래 행복을 위해서라도 동성애에 관한 올바른 의식 정립과 경각심이 필요한 때다. 

<용인 새에덴교회>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크리스천투데이]한희봉, 원폭 피해자 위한 기도회 “제2의 3·1운동 펼치자”(2013.02.27)


조용기 목사, 설교에서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 희망 되자” 강조

▲3.1절을 기념해 열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새에덴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이동윤  기자

제94주년 3·1절을 기념해 일본군 ‘위안부’·원폭 피해자와 함께하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27일(수) 오전 10시 30분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에서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이하 KD)과 한일기독의원연맹(대표회장 김영진 장로) 공동주최로 개최됐다. 참석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피해자 가족의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며, 일본정부의 조속한 사죄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촉구했다.

이날 기도회는 소강석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김영진 대표회장의 기념사, 김명규 장로(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의 대표기도,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의 설교,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의 인사, 손인웅 목사(KD 법인이사장)의 환영사, 황우여 의원(새누리당 대표)의 격려사, 김정록 의원(새누리당)의 원폭특별법 취지 설명, 최희범 목사(KD 총무)의 선언문 발표, 장상 목사(전 국무총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조용기 목사가 설교를 전하고 있다. ⓒ이동윤 기자

조용기 목사는 설교에서 “3·1운동은 일제가 한국를 정신적·문화적으로 말살하려는 시기에 이 일어나, 잠들어 있던 민족을 깨운 사건”이라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이제 제2의 3·1운동을 일으켜 의식 개혁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전했다.

조 목사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이 횡행한다. 비판하고 서로 헐뜯고,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다고 낙담한다. 하지만 암울한 일제 시대 때 교회는 시대의 소망을 노래했고, 3·1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도 기독교 인사들이 다수였다”며 “하나님은 꿈과 희망을 주시는데, 불가능한 절망은 없다. 한국교회가 희망의 바이러스를 전파하자. 우리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은 긍정의 메시지를 말하는 교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김정은과 북한정권이 핵실험을 하고 좌파 세력들이 선동하고 한국교회를 공격하는 등 우리 사회가 어지럽다. 그러나 김정일도 온갖 협박과 공갈로 위협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북한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통일도 곧 올 것이고, 한국교회가 뭉쳐 통일을 대비하고 우리나라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긍정의 힘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킨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꿈을 말하면, 꿈이 우리를 이끌 것이다. 믿음은 꿈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꿈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참석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용기 목사, 김삼환 목사, 손인웅 목사, 김영진 장로. ⓒ이동윤 기자

김삼환 목사는 “우리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돌아보며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평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평화기도회에 참석했다”며 “어렵고 힘든 싸움을 고통 속에서 담당해 온 원폭 피해자 가족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 일본 정부는 불법적으로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의 그날까지 우리의 기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희범 목사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 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언문은 “그동안 일본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않고 있다. 오히려 일본의 국회의원·언론·정부 각료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등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은 위안부 등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와 참회를 하지 않으므로 몰염치한 국가일 수밖에 없다. 또 원폭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적절한 보상이나 복지혜택을 받고 있지 않다”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한국 정부와 국회에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인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황우여 의원(새누리당 대표)은 “이 자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와 원폭 피해자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라며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 일본이 자신들이 강제로 하지 않았다고 궤변을 하는가. 반드시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함께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자”고 했다.

김영진 장로는 일본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반성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 높은 담처럼 놓인 현안들을 하루빨리 해결해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가 오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소강석 목사의 시편] 명절 보다 높은 주의 날(2013.02.04)

설날이 다가온다. 올해는 설날과 주일이 겹쳤다. 교회마다 명절이 되면 성도 출석에 비상이 걸린다. 물론 오랜만에 부모님께 효도하고 고향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는 장점도 있지만 교회들마다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성도들을 볼 때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또 한편으로 명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제사 문제라는 큰 시험거리를 줄 때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 명절에 처음부터 제사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추석도 신라시대 유리왕 때 비롯된 궁중놀이의 하나였다. 신라 때부터 고려 중엽까지 명절은 하나의 감사제나 축제로 지켜왔다. 그런데 13세기께 고려 말엽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주자학(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례문화가 생겨났다. 그래서 순수한 미풍양속인 민속명절이 고려말엽 때부터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날로 변질되고 말았다.

물론 고구려와 신라시대 때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제사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늘의 신적 대상에게 종교적인 행위로 드렸다. 그리고 공자께서도 원래 영혼불멸설이나 사후의 세계를 가르친 일도 없고 조상에게 효도의 표시로 제사를 지내라고 가르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천되면서 유교도 차츰차츰 토속신앙과 혼합되면서 사후의 세계를 거론하게 되었고 제사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나뉘는데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거처를 잃고 떠돌아다닐 때,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면 조상의 혼과 백이 연합하여 사후에도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다고 공자의 제자들이 임의로 거짓 사상을 만들어 유교에 주입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모든 조상 제사는 주자가 쓴 주자가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살아생전에 하라고 강조한다. 더구나 조상들은 신이 아니다. 경배의 대상, 제사의 대상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심판과 지배 아래 있다. 그러므로 조상을 하나님 외에 신적 대상으로 숭배하는 제사제도는 효도에 대한 예의나 인륜의 도덕이 아니고 엄연히 우상숭배요 미신행위이다. 따라서 명절을 맞아 혹여 성도들이 제사의식에 참여한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을 등지는 행위이겠는가. 우리의 참된 경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을 잘 섬기는 것이 최고의 믿음의 행위요, 축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사 문제 때문에 핍박받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제사 문제로 큰 핍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모든 집안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어떤 설날을 맞이하고 싶은가. 그저 인간적 교감과 즐거움으로만 끝나거나, 혹은 죄를 범하는 설날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고 모시는 설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명절보다 더 높은 주의 날을 의식하면서. 그것이 우리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영광의 가문, 축복의 명문가문을 이루는 축복의 길이 아니겠는가.

<용인 새에덴교회>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소강석 목사의 시편]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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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어느 대표 기관에서 조용기 목사님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물론 조 목사님은 수백년 만에 한 명 나올 만한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지구를 115바퀴나 돌며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한 분이다.

또한 국제 구호기관인 굿피플을 세워 전 세계 기아 난민 구호에 힘쓰고 심장병 어린이 무료 수술을 통해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어 온 분이다. 북한 심장병 환자를 돕기 위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평양조용기심장병원도 건립 중에 있다. 어떤 면에서 조 목사님의 노벨상 후보 추천은 당연한 일이며 후보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와 때가 있다. 특별히 중대한 일일수록 신중하고 치밀해야 한다. 정말 조 목사님을 위해 추진하려 했다면 먼저 심도 있는 사전 분석과 전략적 로드맵을 세운 뒤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노벨상 후보 추천은 성급하고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추천하려는 단체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보면 조 목사님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또 한번 안티 기독교의 공격 대상이 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설사 후보를 추천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단체보다는 일반 사회단체를 통해 추천하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상생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보자 추천 과정에서 조 목사님 개인 의중이나 뜻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일방적 추천을 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번 논란이 빚어졌을 때 나타난 시민단체와 안티 기독교의 반대를 위한 반대와 빈정거림의 공격 행태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조 목사님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하거나 개인 신상과 인격에 흠집을 내는 조롱, 막말 행태 또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 조 목사님이 성자가 아니기에 크고 작은 흠집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한평생 다 바쳐 사랑과 평화를 실천한 지도자에게 너무 것 아닌가.

남북한도 이념은 다르지만 올림픽 경기를 할 때는 한 마음으로 서로를 응원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도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향해 미안함을 표시했고 북한에서도 수상에 대해 폄하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하물며 같은 민족 구성원으로서 이토록 가혹한 조롱과 비난을 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음해와 시기, 분열과 이간계의 병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저 넓은 중국 대륙의 수많은 문학자들이 함께 노벨상 추천자를 흠집내고 공격했다면 어떻게 모옌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이웃나라인 일본도 극한 대립과 갈등을 하다가도 국가적 위기가 오면 민족적으로 단결하고 화합한다. 우리 민족은 왜 시기와 갈등, 분열적 사고의 고질병을 고치지 못하는가. 왜 민족적 단합이 부족한가.

앞으로도 매사에 감정적 대응을 하면 기독교계가 아닌 다른 불교계나 사회단체에서도 후보를 자유롭게 추천하겠는가. 설사 비판을 하더라도 인격 모욕적 막말과 음해성 반대가 아닌 건설적 비판을 해야 한다. 노벨 평화상 자격 문제를 개인 가족과 교회 문제로까지 연결해 공격하는 것은 균형감을 잃은 악의적 공격의 발로일 뿐이다. 논란은 그쳤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향해 머리는 뱀처럼 지혜롭고, 가슴은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는 것을.

<용인 새에덴교회>

2013년 1월 7일 월요일

[소강석 목사의 시편] 희망고문을 넘어 다시 신앙의 새벽으로(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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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누구나 신년에는 새로운 희망을 세운다. 대부분 2, 3월까지는 그 희망의 여운과 설렘을 간직한다. 그러나 3, 4월만 지나도 대부분 꿈에 부푼 열정은 식고 희망을 포기한 채 체념하고 좌절한다. 그런 사람이 많지만 소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더 집념에 불탄다.

물론 그 희망 때문에 연말에 더 좌절하는 경우도 있지만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빌리에 드 릴라당이 1883년에 쓴 단편 소설 ‘희망고문’에 보면 어느날 유대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희망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탈출구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 그는 새로운 삶을 만끽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종교재판소 소장이 다시 그를 뒤에서 붙잡아 버린다. 그 순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릴라당은 희망을 슬쩍 보여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희망고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현 시대야말로 잔인한 희망고문을 당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중산층 붕괴와 청년실업의 한파가 몰아쳤고 글로벌 경제위기 사태까지 이어지며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보다는 힐링이, 절망보다 희망이 문화 트렌드로 부상하는 ‘희망 과잉상태’를 맞고 있다.

그러나 냉철한 현실 직시와 고난과 맞서 싸우는 야성이 없는 힐링이나 희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고난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실용적 매뉴얼이나 근성을 키워주는 메시지가 아닌 감성적 힐링과 유희적 희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상품화한 문화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대중을 속이는 또 다른 기만이며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빼앗고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넣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고문을 넘어서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고난과 맞서 싸우는 야성적 믿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요셉의 삶은 희망고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값싼 힐링이나 허황된 희망의 위무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붙잡고 맞서 싸웠다. 그래서 결국 그 희망고문을 넘어 애굽의 총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마케팅에 포장된 거짓 희망은 우리의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희망고문을 넘어서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신앙이다. 올해는 경제가 더 어렵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도 험난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거짓 희망고문에 속아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올해는 더욱 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참된 희망을 노래하자.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시린 새벽길을 나서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과 꿈을 굳건한 두 팔로 붙잡고서.

<용인 새에덴교회>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소강석 목사의 시편] 누가 대한민국을 잘 섬길 것인가(2012.12.17)

드디어, 모레는 18대 대선 투표일이다. 이번 대선은 마지막까지 그 판세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초박빙 승부를 펼쳤다. 대선 열기가 고조되다 보니까 각종 네거티브와 마타도어가 난무하며 난타전을 벌이기도 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돌파할 창조적 미래 해법과 복지와 교육, 통일에 관한 밀도 있는 토론과 정책은 실종되고 추상적 구호와 음해성 네거티브, 이미지 선거에만 매몰된 것은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과 선거 문화를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숙제를 남겼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우리는 내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대선은 종교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고 나갈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연, 지연, 계층을 떠나 후보자들의 정책을 면밀하게 살피며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더 낳은 후보인가를 평가해야 한다. 특별히 크리스천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민족의 역사를 책임지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투표해야 한다. 정치적 색깔이 진보냐 보수냐 네거티브냐 포지티브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은 어떤 후보가 더 조국을 잘 섬기며 국민의 미래를 희망으로 인도하고 한국교회와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이 될 것인가를 묵상하고 투표해야 한다.

한국교회 내부도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결코 교회는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 편에 서면 안 된다. 좌파나 우파의 정치적 구호와 포퓰리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좌우의 이념과 시류적 흐름을 초월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중심을 잡고 민족의 미래를 위한 창조적 비전과 사랑과 화해, 통합의 정신을 제시하며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 정파적 친밀감이나 성향보다는 누가 대한민국을 잘 섬기고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하며 안정적인 경제발전과 통일로 가는 길을 잘 마련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민족의 정신적 기초와 닻이 되어 시대정신을 주도하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꽃을 피울 것인가는 내일 결정된다. 이제 민주주의의 꽃씨를 심는 마음으로 투표장으로 향하자. 꽃씨를 뿌리지 않고서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값싼 감성적 투표, 정파적 투표, 포퓰리즘적 투표를 하면 안 된다. 또 대선 후보들에게도 바란다. 그동안 얼마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힘든 싸움을 하여 왔는가. 그러나 당락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추운 겨울 거리에서 만났던 눈동자들, 따뜻한 손들, 환호성들, 그 모든 기억을 가슴에 담고 잊지 않아야 한다. 왜냐면 그 속에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염원을 기억하며 민족의 화합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 꼭 당선이 되어야만 조국을 섬기고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는가. 낙선자들도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고 조국의 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감정적이고 정파적 친밀감을 넘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잘 섬길 국민의 지도자를 뽑는 것이다.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소강석 목사의 시편] 그대 심장이 뛰고 있는가(2012.11.26)

외환위기(IMF)를 졸업하던 90년대 후반, 우리 사회는 활기와 열정이 넘쳤다. 벤처 사업 열풍, 사상 초유 저금리 시대, 디지털 산업의 진보, 대형할인 마트, 온라인 홈쇼핑의 인기는 소비 심리를 자극하며 경제 활황을 이끌었다. 현대인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스펙과 실력만 잘 갖추면 성공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2003년에 카드대란 사태가 터졌다. 무차별적인 카드 공급 과잉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카드대란이 사회 분위기를 한순간에 냉정하게 가라앉혀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인생 2막이나 인생 하프 타임을 두려워하며 꿈의 보폭을 좁혔다.

그러다 2008년에 미국 월가에서부터 시작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인간이 지닌 휘장을 모두 벗겨 버렸다. 그때 사람들은 개인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 상황과 맞물리며 스스로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론다 번의 ‘시크릿’이 열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 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자리, 소득, 내 집 마련, 결혼, 자녀교육,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하나하나 포기하며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경제 위기의 파고가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불안과 냉소에 지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항우울제와 같은 위무의 책과 강연이었다.

특히 최근엔 불교계 승려들의 저술들이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진입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 현상은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저술들이 항우울제와 같이 환경에 수동적인 순응과 이해를 가르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인생, 사랑, 관계, 만남 등 삶과 아주 친숙한 소재들을 가지고 들려주는 솜사탕 같은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까지에 불과하다.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목회자의 설교도 고난과 맞서 싸우는 야성의 신앙을 가르치기보다는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마사지 설교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며 오히려 성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선지자적 사상을 가지고 시대 마인드와 사회적 흐름을 바꿔야 한다. 무력한 현실 순응이나 모르핀 같은 위무의

메시지를 거부해야 한다. 이럴수록 우리는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역설적 믿음의 본질과 야성의 신앙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심리학의 외피를 두른 항우울제와 같은 마사지 설교가 아니라 고난에 순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믿음의 야성과 역설적 본질을 더 외쳐야 한다. 그럴 때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연어처럼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오히려 역류하는 꿈틀거리는 야성의 생명력으로 고난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그대는 항우울제와 같은 메시지에 마비되어 있는가, 아니면 시류에 역류하는 야성과 본질로 심장이 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