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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5일 토요일

[O2/LIFE]나로호도 미루는데… 금연도 다음 주부터?(2013.01.05)

⊙ 영화와 심리학… ‘사랑의 블랙홀’-새해계획이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 필 코너스는 기상캐스터다. 앞날을 예측하는 직업을 가진 셈. 그러나 미래의 모든 걸 예측하게 된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진다. 동아일보DB
《 미래를 정확히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심지어 미래 예측을 직업으로 삼은 이도 많다. 타인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사주팔자, 관상, 손금, 타로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를 점친다. 여론조사를 이용해 미래의 대통령이 누구일지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수치를 근거로 세계와 한국경제의 미래를 분석한다. 미래 예측을 하는 또 한 부류가 있다. 이들은 짧게는 ‘몇 시간 후’부터 길게는 ‘일주일 후’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가끔은 한 달이나 일 년 후까지의 예측 결과를 말할 때도 있다. 아침, 점심, 저녁에 틈만 나면 텔레비전에 나오니 아주 친숙하다. 그렇다. 바로 날씨를 전해주는 기상캐스터들이다. 》

그라운드호그에게 진 기상캐스터
해럴드 래미스 감독의 1992년 작품 ‘사랑의 블랙홀’ 속 주인공 필 코너스(빌 머리)는 기상캐스터다. 참, 이 영화의 원제는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다. ‘그라운드호그’는 크기가 토끼만 하고 생김새는 다람쥐와 비슷한 동물이다. 미국에선 ‘우드척’이라고도 한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선 성촉절(聖燭節·Candlemas)인 2월 2일 그라운드호그의 행동을 통해 추운 겨울이 끝날지, 좀 더 지속될지를 점친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깨어난 그라운드호그가 굴에서 나오다 (날씨가 맑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고, 겨울이 6주나 더 길어진다고 여긴다. 반대로 날씨가 흐려 그라운드호그가 그림자를 보지 못하면 겨울이 곧 끝난다고 한다.

영화의 무대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시골마을 펑크서토니. 여기엔 ‘펑크서토니 필’이란 유명한 그라운드호그가 산다. 성촉절 행사를 취재하기로 돼 있던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이번 주 날씨가 맑다”고 예보한다. 눈이나 비 소식은 없다. 그는 동료에게 취재를 빨리 끝낸 뒤 돌아와 저녁 생방송을 진행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과학적인 예보가 틀릴 리 없다는 확신에서다. 

필의 취재 현장. 행사 진행자들은 “펑크서토니 필이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고 선언한다. 앞으로 6주간 겨울이 더 지속될 것이란 뜻이다. 필은 허무맹랑한 얘기만 지껄이는 구닥다리 축제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취재가 끝나자마자 펑크서토니를 떠나려던 필. 하지만 그의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폭설이 내려 도로가 끊긴 것이다. 필은 어쩔 수 없이 펑크서토니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된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기상캐스터 ‘필’은 틀렸고, 그라운드호그 ‘필’이 옳았다. 기상캐스터 필은 잘못된 예측을 함으로써 생방송 약속을 스스로 어기게 됐다.

모든 계획에는 오류가 따른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며 산다. 그것을 토대로 계획을 세운다. 새해가 됐으니 많은 사람들이 신년계획을 만들었을 터다. 매일 30분씩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하루에 그 정도 시간을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경험했다시피 신년계획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다.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새해 계획 중 제대로 실천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곤 ‘의지박약’이라고 자신을 비난한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완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미리 추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를 ‘계획 오류’라 한다. 하루면 끝날 일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해보면 일주일도 모자라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때 ‘일이 진행되는 전형적인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측에 수반되는 오류를 너무 작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매일 퇴근 후에 체육관에 가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퇴근 후의 시간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상가에 가야 할 일이 생기고, 상사는 무슨 새해 결심을 했는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자리를 지킨다. 덕분에 새해의 운동 결심은 바로 작심삼일이 되어버린다. 실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현실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잠깐의 방심으로 접촉사고가 날 수도 있고, 가던 길에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 필 역시 ‘평소처럼’ 자신의 예보가 맞을 것이라고 예측했기에 저녁 생방송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필의 계획은 기상이변(폭설) 탓에 물거품이 됐다.

신이 아닌 이상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확히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똑같은 일을 이전에 수없이 반복했던 사람들조차 계획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만든 나로호가 아직 우주로 날아오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계획 오류는 너무나 강력해 쉽게 줄이기 힘들다고 한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시나리오를 짜도 오류는 발생한다. 그러니 신년계획을 지키지 못했다고 무조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많은 실패나 지연은 자신의 의지박약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오류, 즉 계획 오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없는 삶의 가치
그렇다면 계획 오류가 없는 삶은 행복할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펑크서토니에서 하룻밤을 묵었지만, 필에게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된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모든 것이 똑같이 재생된다. 덕분에 필은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하게 된 순간 필은 절망에 빠진다.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할 때만 가치가 있다. 불확실성은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인 동시에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미래 예측의 오류가 사라지면 미래의 희망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 수많은 계획을 수정하고 포기해야 한다. 작심삼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가끔 희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가슴 설레게 만드는 이유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wooyoung@cnu.ac.kr

2013년 1월 1일 화요일

[김관선 목사의 시편]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2013.01.01)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고 또 싫어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것을 하고 싶고 좋은 것을 먹고 싶고 좋은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좋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좋음’은 절대적 의미의 ‘좋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대부분 ‘내게 좋은 것’일 뿐입니다. 상대적이란 말입니다.

즉 나는 좋지만 누군가는 좋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좋음’입니다. 많은 경우에 내게 유리하고 내가 편리하고 내 입맛에 맞아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싫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불리하거나 즐겁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싫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속에 선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고 상대적인 가치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 바람직한 것은 ‘좋고 싫음’이 아닌 ‘옳음과 그름’이라는 절대적 판단 기준이 바로 서야 합니다.

‘좋고 싫음’은 개인적 취향일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냉면을 우리 아이들은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성향이고 기호일 뿐입니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먹지 않는다고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거나’ 또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유불리를 따라 선택하고 호불호를 따라 줄서려고 하지만, 내가 손해 보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동의하고 내가 불편해지더라도 그른 일이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런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가면서 그런 경향들이 더욱 짙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선으로,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악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막으면 아버지나 어머니조차 때론 악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거 대상으로 여기고 사람으로 도무지 할 수 없는 심각한 짓을 하기도 합니다. 절대적 가치의 상대화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가치체계를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사람이라도 옳은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취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선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객관적 검증이 필요합니다. 내게는 불리하지만 옳은 일이 있습니다. 내게는 좋지만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주관적인 ‘좋고 싫음’이 아닌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으로의 ‘옳고 그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았습니다. 좋은 일보다 옳은 일을 결심합시다. 싫은 것이 아닌 그른 것을 피합시다. 싫어도 옳은 편에 섭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아져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분수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올 한 해 생각대로 사셨습니까(2012.12.28)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연말이다. 새해 달력을 챙기고, 내년치 수첩도 새로 구해 식구들 생일이나 각종 아이디·비밀번호, 은행 계좌번호 따위를 틈틈이 옮겨 적고 있다. 나는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는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해왔는가. 연초부터 지금까지 온갖 메모로 빽빽해진 올해 수첩을 보면 그저 휘둘리며 살았을 뿐 나 스스로의 생각대로 신선하게 지낸 날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시절 성경을 읽다가 눈에 꽂혀 자계(自戒)의 문구로 삼은 구절이 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거듭 행하느니라’(잠언 26장 11절). 무언가 목표를 세워도 대부분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고, 나쁜 습관은 반대로 고칠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경계였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토한 것을 도로 먹는’ 한심한 행태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이제는 성경 구절의 효용이 자계인지 자조(自嘲)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흡연 습관만 해도 그렇다. 매년 1월 1일 금연 결심을 했다가 곧 무너지고, 이어서 설날, 내 생일, 무슨 기념일 하는 식으로 퇴각만 거듭하다 한 해가 저문다. 어쩌다 석 달간 금연한 적이 있지만 100일을 못 채우고 동굴에서 뛰쳐나간 의지 약한 호랑이 꼬락서니이긴 마찬가지다.

 사실 습관은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본능에 따른 것이다. 미로 끝에 먹이를 두고 쥐에게 길을 찾아가게 하면 처음엔 뇌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러나 길 찾는 데 익숙해지면 뇌의 움직임도 줄어든다. 굳이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련의 행동이 기계적인 습관으로 바뀌는 과정을 학자들은 청킹(chunking·덩이 짓기)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은 대부분 신호-반복행동-보상의 3단계를 거쳐 형성된 행동 덩어리, 즉 습관이 지배하고 있다(찰스 두히그, 『습관의 힘』).

 문제는 뇌가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공기를, 물고기가 물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듯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 일쑤다. 행동만 그럴까. 생각에도 습관이 스며든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면 머리가 편하다. 편한 데 익숙해지면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을 점차 꺼리게 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기조차 싫어진다. 사서 피곤해질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지배한 집단사고 간의 격렬한 대립의 배경에도 생각을 습관에 맡겨버리는 몰(沒)지성, 몰성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다투는 주제마다 합의점을 찾기는커녕 지루한 동어반복 싸움만 되풀이됐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