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모두가 우리 경제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재벌 개혁을 거론하고 있다. 구체적인 대책은 약간씩 달리하고 있지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양극화와 소득 격차 같은 우리 경제의 모순을 낳았다는 인식은 같다. 재벌 개혁만 하면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어지고 균형 잡힌 경제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 후보는 일자리 나누기를 거부하고, 생산성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데도 해마다 월급과 수당의 인상을 요구하며 태업·파업을 위협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우리 사회를 양극화 절벽으로 밀고 가는 원인 제공자의 한 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안철수 후보가 정치 쇄신을 주장하는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정규직 노동자가 양보해달라는 요청을 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한마디 한 게 유일하다. 세 후보는 현실을 외면하고 청년 고용 할당제와 정년(停年) 60세 의무화 등 노동계의 구미를 맞추는 공약 경쟁만 벌이고 있다.
우리 경제의 환부(患部)는 재벌과 대기업 노조가 합작(合作)한 결과다. 겉으론 대결하는 척하다가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우와 작업 환경을 희생시켜가며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해온 게 재벌과 대기업 노조다. 대기업 노조는 한국 사회의 특권층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장악한 한국 노동운동은 근로자 간의 형제애(兄弟愛)와는 거리가 먼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들의 기득권 지키기 수단으로 타락한 지 오래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바로 그 집약판(集約版)이다. 한진중공업이 작년 초 경영 악화로 정리해고에 나서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좌파 단체들은 고공 크레인 농성과 원정(遠征) 시위를 벌였다. 정치권이 기업주를 국회에 불러내 압박을 가하자 회사는 작업 물량을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들을 재고용하겠다고 두 손 번쩍 들었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9일 약속대로 92명을 복직(復職)시켰지만 이들은 나흘 후부터 무기한 휴직에 들어간다. 회사가 2008년 9월 이후 배를 한 척도 수주하지 못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한진중공업 근로자 700여명 중 410여명이 통상임금과 자녀학자금·의료비 등 한 달 400만원 정도를 받으며 휴직 중이다.
좌파 단체와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 사태를 대신 떠맡고 무한투쟁에 나선 이후 일감을 받지 못한 협력업체 직원 300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좌파 단체는 중소기업들에 떠넘겨진 덤터기를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장악한 노동운동은 자기들보다 약한 비정규직과 하도급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희생을 밟고 서 있는 것이다.
대기업 노조는 자기들만의 특권을 지키려고 근로시간제 변경, 생산라인 조정, 근로자 전환 배치 같은 주요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기업 경영의 숨통을 죄기도 한다.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은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14.6시간인 데 비해 국내 공장은 31.3시간이나 된다. 그런데도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들은 앨라배마 공장 근로자나 비정규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임금·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기업들은 정규직 고용에 따르는 이런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비정규직 채용을 크게 늘려왔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 회복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재벌을 개혁해야 노조를 개혁할 수 있지만 역(逆)으로 노조를 개혁해야 재벌을 개혁할 수 있는 동력(動力)이 생긴다. 어느 한쪽만 개혁하겠다고 하면 그 한쪽의 거센 반발을 부를 수 있고, 그만큼 개혁에 실패할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들은 대기업 노조의 표를 의식해 노동 개혁 문제에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대통령이 돼 국정(國政)을 책임지겠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이렇게 진실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한국 경제의 앞날을 열어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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