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중앙시평] 성숙한 지혜의 세밑(2012.12.24)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포퓰리즘·흑색선전·여론조작의 검은 안개를 걷어내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두부모 자르듯 극명하게 양분된 이념·지역·세대 간의 대립 속에서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한 걸음씩 전진해가고 있다.

 신임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공동체의 회복이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현실에서 골 깊은 내부 분열까지 안은 채로는 이 나라를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이끌어갈 수 없다. 때로는 증오 서린 저항의 촛불에 결연히 맞서는 용기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상처를 싸매고 아픔을 끌어안는 관용과 포용의 리더십이 발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치의 제1 덕목은 인사(人事)의 공정성·적합성이다. “나는 장량처럼 신묘한 계책을 알지 못한다. 소하처럼 행정을 잘 살필 줄도 모른다. 전쟁에서 이기는 일에는 한신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의 말이다.

 지난 정부들은 지역·혈연·학연에 따른 천박한 패거리 인사로 사회통합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거슬러왔다. 현대사의 아픔 때문이겠지만, 특정 지역 간의 자리 나누기는 모든 공직 인사에서 철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대개는 구색 맞추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인사를 하는 대통령도 문제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냉큼 토라져버리는 지역 민심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또는 장차관들이 왜 꼭 내 고향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가. 그런 애향심(?)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국민 모두가 부질없는 지역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대통령 자신부터 사사로운 연고와의 단절을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선거 캠프의 논공행상으로는 희망의 새 정부를 만들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대통령의 친인척과 밀실(密室)의 측근들이 검찰에 끌려가고 교도소를 들락거렸는가. “두루 사귀되 서로 견주지 말고, 함께 어울리되 파당을 짓지 말라(周而不比 群而不黨).”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총화(總和)를 이뤄가야 한다는 논어의 가르침이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1등 공신인 한신은 반역 혐의로 주살(誅殺)됐지만, 권력을 등진 장량은 장가계(張家界)로 들어가 유유자적했다. 옛사람들도 익히 알았던 권력무상을 21세기 대명천지의 5년짜리 정권이 모른다는 것은 비극이라기보다 차라리 어이없는 희극일 것이다.

 새해가 밝아오는데, 그늘진 자리엔 희망이 깃들지 않는다. 새 정부는 어둡고 소외된 자리를 찾아 따뜻한 손길을 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궁핍한 다수를 돕지 못하면, 부유한 소수 또한 지킬 수 없다.” 나눔을 외면한 성장은 분노의 쓰나미를 불러온다. 그러나 대기업 때리기만으로는 음지를 양지로 바꾸지 못한다. 기업의 성장 없이 분배와 복지를 두루 감당할 방법은 없다. 재벌들의 못된 탐욕과 불법을 엄정하게 다스리면서도 일자리를 만들어내도록 이끌어내는 채찍과 당근이 모두 필요하다.

 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북한이다.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린 북한은 머지않아 3차 핵실험 등으로 또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북의 도발이 끊이지 않는 터에, 무릎 꿇듯 평화를 구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대결상태를 지속하는 것도 현명한 정책은 아니다. 응징할 때는 응징하더라도, 대화의 통로를 이어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역시 케네디의 말이다.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는 말자. 그러나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자.”

 2013년에는 국내외 경제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는 데다 미·중의 패권다툼도 한층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 통합과 양극화 해소, 동북아 안정과 한반도 평화라는 중차대한 과제 앞에서 절체절명의 각오로 새해의 국정을 설계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보혁(保革)을 아우르는 탕평(蕩平)과 쇄신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정부도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탄식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한 해가 저무는 세밑이다. 지혜로웠던 북미 인디언의 후예(後裔)는 이렇게 읊었다. “해가 지는 서쪽은/ 성숙한 지혜의 방향이다./ 황혼녘은/ 책임과 반성의 시간/ 배우고 긍정하며/ 감사하는 시간이다.” 저녁노을에 깃드는 성숙한 지혜는 배려와 헌신과 보살핌의 여성성, 그 따뜻한 성찰이 아닐까. 첫 여성 대통령 시대를 잉태한 올 세밑도 그처럼 성숙한 지혜의 시간이 되기를….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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