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기자실에는 모두 21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가 배포됐다. 올해 세법 시행령 개정안이었다. 혹시나 해서 빠르게 뒤적여봤지만 역시나였다. 이번 시행령에 반드시 담을 것처럼 되풀이해 온 종교인 과세 항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론의 관심을 의식한 탓인지 백운찬 세제실장은 기자들이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해명’에 나섰다. “사회적 공감대 확산을 위한 협의와 과세 기술상 방법 및 시기 등에 대한 검토가 더 필요해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종교인의 소득에 대해 과세하기로 한 원칙은 확정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재완 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초부터 여러 차례 종교인 과세 방침을 언급해왔다. 종교인들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무조건 반대는 없었다. 하지만 각론에 대해서는 “글쎄”라는 반응이 많았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전날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회적 요구와 분위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수행자인 스님들에게는 임금 지급을 전제로 성립하는 고용관계가 없다. 정부도 구체적인 절차나 방식을 밝힌 바가 없다”고 말했다. 자승 스님 말처럼 종교인들은 “우리도 국민인 만큼 제도만 정비되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천주교는 이미 1994년부터 소득세를 원천징수하고 있다.
종교계 스스로 당위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는데도 정부가 선뜻 시행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불충분한 과세 인프라 구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인들이 세금을 내려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기보다는 재정부의 준비 부족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부는 이날 스스로 “소규모 종교시설의 경우 납세를 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준비가 필요하고, 과세 방식과 시기 등에 대해 종교인들과 좀 더 협의하고 외국의 사례도 살펴봐야 한다”고 털어놨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재정부는 과세에 필요한 체계적인 조사와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재정부는 최근 이런 사정을 청와대에도 보고했다.
이왕 늦춰지게 된 만큼 정부는 차제에 종교인 과세에 필요한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사회의 귀감이다. 이들의 납세의식이 높아지면 파급 효과가 적지 않을 것이다. 종교단체에서 발급하는 연말정산용 허위 기부금 영수증도 사라질 수 있다. 애드벌룬 띄우기로는 종교인들의 반발만 살 뿐이다. 종교인을 대상으로 공청회를 열고 소득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론몰이로 압박하면 자칫 종교인들은 세금을 내기 싫어하는 집단이란 부정적 이미지만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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