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김병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김병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크리스천투데이][김병태 칼럼] 성(性) 접대라니?(2013.03.25)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바울은 교회 감독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를 세우라고 권했다(딤전 3:2, 딛 1:8). 히브리서 기자 역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말한다(히 13:2).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덕이다. 더구나 가난한 자나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영적 미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접대로 언론이 달아오르고 있다. ‘성 접대’라는 게 그것이다. 건설업자가 공사를 따내기 위해 호화판 별장에서 성 접대 행위를 해왔다. 동영상까지 촬영했단다. 그 덫에 걸려든 사람들이 누구인가? 고위 공직자, 변호사, 은행 지점장, 지방 건설업체 경영인들이다. 더구나 신임 법무부 차관까지 거명되고 있다.

성 접대가 통용되는 사회가 너무 서글프고 마음 아프다. 왜 정당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부당이 합당이 되어야 하는가?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지 뭐!’라고 하기에는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로 돌아가지 않기를 갈망한다.

성 접대라니?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중한 선물로 성(性)을 주셨다. 인간은 이것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범주 내에서이다. 결혼한 배우자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자신의 배우자 외의 그 어떤 이와도 맺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기에 불타는 정욕을 절제하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죄악이다(고전 7:9).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매매하고 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성을 돈으로 산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 쉽게 돈을 벌고 싶단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성을 거래로 이용하기도 한다. 너무 불쾌하고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성을 무참하게 짓밟는 인면수심들도 많다. 그것도 어린 아이의 성을.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다. 한 아이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짓밟고, 한 가정을 파탄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몇 년 옥고를 치르고 얼굴을 뻣뻣이 쳐들고 대로를 활보한다. 아니 출옥 후에 다시 그 짓을 한다. 어디 될 법한 일인가? 이게 세상에서 돌아가는 성문화이다.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고린도 지방은 성적 타락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흐름이 고린도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낯 뜨겁고 부끄러운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불행한 일이다. 불신자들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 물론 계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이 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한다. 교만하기 그지없었다. 양심이 마비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고린도 교회는 그러한 일을 보고서도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고전 5:1-4). 죄악을 방조했다. 아니 더 큰 죄의 문을 열어준 셈이다. 어떤 이는 이걸 보고 용기를 얻어 죄를 짓는 것을 죄악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전 야곱의 가정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 그는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동침했다(창 35:22). 아무리 눈이 맞아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야곱에게 이중적인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아내의 배신이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아들의 도전이다.
최근 국회 법사위에서 차별금지법안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안이 뭔가? 성별, 나이, 신분, 장애, 언어, 인종, 지역에 대한 차별을 제한하자는 법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복음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는데, 참 잘 된 거네?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 유익한 면이 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안에는 독소조항이 숨어 있다. 만약 이 법안대로 한다면 앞으로 강단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 성차별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만들려고 하는가? 불 심판을 자처하려는가?

어디 그 뿐인가? 앞으로 강단에서 이단에 대한 강의나 설교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 역시 종교와 사상에 대한 차별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별금지법안이 갖고 있는 웃는 얼굴만 보고 박수를 쳐서는 안 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단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강력한 대처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한다(롬 16:19b). 마땅히 진리 안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선한 일에는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악한 일에는 과감하게 결별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대항하여 손을 맞잡고 강력히 싸워야 한다.

가슴 아프게도 성 문화가 원래에서 심각하게 이탈하고 있다. 이탈은 불행을 자초한다. 건전한 사회와 조직의 기강을 뒤흔든다. 속한 회귀가 필요하다.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하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려면, 바른 신학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김병태 칼럼] 목회를 한다는 것,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2013.02.18)


영양실조에 걸렸던 세 자매를 바라보며… 이제 교회가 나서야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목회를 한다는 것은 투명한 유리관 속에 살아가는 삶처럼 느껴진다. 사실 목회를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성도들이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이 있기에.
 
이런 부담을 떨쳐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인의 자리에 가 있기 때문이다. 공인으로서 져야 할 짐이기에.

부모란 존재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이 드러나는 존재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배운다. 부모를 보면서 실망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아무리 부담스러울지라도, 부모는 자녀들에게 유리관 속에 있는 모델임을 잊지 않고 조심스레 살아가야 한다.

연초부터 가슴 아프게 하는 소식이 들렸다. 세 자매가 다세대 주택 반지하 월세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극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채로.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버젓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내와 이혼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를 두었다. 그러나 새엄마는 세 자매를 키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일을 해서 새엄마에게 월 80만원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아이들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데 새엄마는 월세 23만원과 생활비 15만원만 아이들에게 보내주었다. 물론 아이들과는 따로 생활했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아이들이 사는 집에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세 자매는 돌봐줄 사람도 없이 다세대 주택 반지하 방에 방치된 셈이다. 교육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건강도 엉망진창이었다. 아이들은 전기밥솥으로 밥과 라면을 끓여 끼니를 해결했다. 반찬은 고추장 딱 하나였다. 결국 아이들은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가 되었다.

새엄마는 세 자매에게 1시간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날이 추울 때에는 난방도 하지 못하게 했다. 세 자매 중 간질을 앓던 18살 둘째와 15살 막내는 발작으로 넘어져 허리뼈와 대퇴부에 금이 간 상태로 방치됐다.

큰 언니는 굶주림과 질환으로 고통당하는 동생들을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마침 어느 목사 부부가 경영하고 있는 인근 공장을 찾게 되었다. 목사 부부는 얼굴에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큰 언니의 모습을 보고서 심상찮게 여겼다. 그래서 실태 파악에 나섰다. 결국 세 자매의 실상이 사회에 드러나게 되었다.

가슴 아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부모로서 그 책임을 다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았다고 부모로서 역할이 끝나는 건 아니다. 자식에게 울타리를 쳐주고,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한다.

자식에게 부모는 최고의 모델이다. 자식들은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본다. 그래서 가정 분위기는 교육 자체이다. 많은 부모들이 착각하고 있다. 의도된 교육을 통해서 자식들이 만들어져갈 거라고. 그런데 자식들은 의도되지 않은 교육환경을 통해서 배운다. 부모가 생활하는 모습. 가정 분위기. 부모가 말하는 모습 등.

‘부모 노릇하기 힘들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게다. 부모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부모 노릇을 하기는 어렵다. 자식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뒷바라지를 해 주는 것. 공부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다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주시해 주는 것. 인격과 성품이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사랑과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하루 종일 공부에 지쳤다가도 쉼을 누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는 부모의 품을 제공하는 것.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영적으로 돌봐주는 것. 이런 것들이 부모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도리이다. 그런데 이런 도리를 박차버리는 부모들이 많다.

자기들끼리 좋아서 만나 결혼했다가 귀찮아지고 마음이 변하면 쉽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어쩌고?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헤어지면 안 된다. 부부가 깨어지면 가정이 깨어진다. 부부가 흔들리면 가정이 휘청거린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든든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 부부가 걸어야 할 길을 지키기로.

가정이 흔들리면 자녀들은 자연스레 흔들린다. 마음 둘 곳 없는 자녀들의 앞날은 뻔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부모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녀들의 인생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자녀들이 돌아올 곳이 있도록. 자녀들이 마음을 둘 곳이 있도록.

2013년 1월 7일 월요일

[김병태 칼럼] 황수관 박사의 죽음을 보며(2013.01.07)


사명 위해 건강을 챙길 겨를도 없었던… 행복한 삶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목사님, 황수관 박사가 급성 패혈증으로 죽었대요.”

“무슨 소리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도 세미나에서 함께 강의를 했는데.”

2012년 12월 30일.

올해 마지막 주일 3부 예배를 마치고 목양실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때 부목사님이 들려준 비보였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웃으면 행복해진다.’ 

평소에 그가 늘 하던 말이다. 건강을 얼마나 챙기던 분이었던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건강과 행복을 안겨주던 분.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면 신바람이 난다. 그래서 신바람 전도사라 부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바람 건강법을 역설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황 박사님과 나는 국민일보에서 주최하는 ‘2012 행복한 전도세미나’에서 함께 섬겼다. 그가 강의를 할 때마다 ‘역시 프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가 사인해 준 책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데, 이렇게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고 말다니….

향년 67세. 아직은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가 아닌가? 그런데 갑작스레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심장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오후 1시에 숨졌다. 사인은 급성 패혈증이다.

그에게 붙여진 직함은 다양하다. 한일월드컵 자문위원, APEC 정상회담 홍보대사, 대구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 홍보대사, 대한적십자사와 한국 국제 협력단 홍보대사,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에 이어, 북한 기아 어린이와 동남아 쓰나미, 미국 허리케인, 아이티 지진 등 각종 재난 구호에도 앞장섰다.

황 박사님은 12월 행복한 전도 세미나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대통령 선거활동 때문이다. 그는 어느 후보의 대선 후보 대외협력특보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게 개인적으로 마지막 접한 소식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분주했다. 분주한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는 죽음이다. 그는 건강을 챙길 겨를도 없이 바빴다. 돈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 사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의 비밀을 알기에 나누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행복 꾸러미가 있기에,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웃음과 건강이라는 선물이 있기에, 그래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쉼표 없이 뛰어다녔다. ‘좀 쉬어가면서 뛰지’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자신만 행복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 레시피를 선물했다. 그런데 그 행복에도 ‘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행복에도 끝이 있고, 불행에도 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끝을 장식하기 위해. 끝을 바라보기에 결코 아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실망하고 절망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끝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뒤에는 ‘또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누르시는 시작 버튼이 있다. 그 새로운 시작을 영원이라 하던가? 그곳에서 누리는 행복은 이곳에서 누리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이 땅의 행복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으려 애쓰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이 땅에서의 ‘끝’이라는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웃으면서 불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걸어갔고, 굶주린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원형경기장에서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죽어갔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향해. 영원한 행복을 꿈꾸면서. 당당하게.

앞서소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의 세계로.
누리소서. 사랑하는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받으소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상급을.
편히 쉬소서. 주님이 닦아주시는 땀과 눈물을 식히면서.
사명 다하는 그 날,
나 역시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웃으며 그 길을 따라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