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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8일 금요일

[크리스천투데이]성경 속 장발장과 자베르, <레미제라블>의 ‘용서와 혁명’(2013.01.18)


[리뷰] <레미제라블>에서 만난 ‘복음’, 그리고 <배제와 포용>

▲영화 <레미제라블>. 용서받은 장발장은 어린 코제트를 구원한다.

빵 한 조각을 훔치려다 19년간 감옥에서 노역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난 남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했다. 그래서 오갈 데 없는 그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베풀어 준 주교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그의 은식기를 훔쳐 수도원에서 달아난다. 얼마 못 가 경찰에 잡힌 그는 이를 선물받았다고 거짓말해 확인차 수도원으로 끌려오고, 주교는 “왜 내가 준 선물을 다 가져가지 않고 일부만 가져갔느냐”며 은촛대를 건넨다. 주교의 거듭된 사랑은 지난 삶을 뉘우치게 했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화 <장발장>의 내용은 여기서 끝. 영화에서는 스펙터클한 화면과 함께 20분 만에 서둘러 마무리된다.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장발장과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의 차례다. 한국에서 500만여 관객을 동원하며 뮤지컬 영화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경신한 <레미제라블>은 다음과 같은 주교의 당부를 장발장이 나머지 2시간 10분간 채우는 이야기다.

‘자베르와 장발장’에서 떠오르는 ‘율법과 복음’, 그리고 성경 인물들

▲19년간 감옥에 있던 장발장(왼쪽)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돼 시장에까지 오른 장발장.
“나의 형제 장발장, 그대는 이제 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선에 속한 자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그대의 영혼을 샀습니다. 나는 그대의 영혼을 어둔 생각과 파멸의 영으로부터 건져내 하나님께 바치려고 합니다.”
 
장발장은 실제로 그렇게 됐다. 버러지 같았던 이전의 삶을 이름까지 바꾸면서 청산하고, 8년 후 시장에까지 올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생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가석방 상태에서 사라진 장발장을 계속 뒤쫓는 이는 자베르 경감. 감옥에서 태어난 그는 ‘주님의 뜻’을 좇아 정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지만,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라 믿는 그에게는 정작 주님의 뜻이 품고 있는 ‘사랑과 자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자베르와 장발장은 마치 ‘율법과 복음’, ‘죄책감과 은혜’처럼 쫓고 쫓기는 관계다. 둘은 마치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나 ‘향유옥합을 붓는 마리아’가 연상되는 팡틴, 팡틴의 딸 코제트, 성인이 된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딪친다. 어찌 보면 누가복음 15장의 용서받은 탕자와 불평하는 그의 형, 마태복음 21장의 ‘싫소이다’ 했지만 뉘우치고 갔던 둘째 아들과 ‘가겠소이다’ 하고 가지 아니한 첫째 아들 등도 오버랩된다.

장발장은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전파하고 직접 삶으로 보이신 ‘베풂과 용서’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용서받은 그는 자신과 같은 주변의 ‘레미제라블’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도우며, 살려준다. 그는 삭개오처럼, 바울처럼, 어거스틴처럼, 용서함을 받은 후 자신의 삶을 그 분께 드린다. 그가 데려다 키우는 팡틴의 딸 코제트는 주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태어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다.

▲자베르(왼쪽)와 장발장은 쫓고 쫓기며 대결을 펼친다.

장발장은 그러나 계속해서 자베르의 그림자에 쫓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이미 용서받은 자’가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아직 씻어야 할 죄’가 있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그는 선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됐지만, 과거의 유산 때문에 계속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결국 마지막 자베르와의 만남에서 이를 극복해낸다.

자베르는 ‘몽학선생’과도 같은 율법의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신이 뒤쫓던 장발장은 그를 여러 번 구해줬지만, 그는 이 ‘사랑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자베르는 “바위 같이 단단한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와 나는 세상에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가 오늘 내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내 영혼까지 죽였다”고 판단한다. 그런 그에게 장발장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너 같은 죄인”일 뿐이다. 하지만 장발장은 주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 살리신(Who am I)’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한다. 장발장의 결말은 마치 예수의 사랑과 은혜,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져 버리는 가룟 유다와 겹쳐진다.

‘베풂과 용서’ 통해 변화된 장발장… 우리의 ‘배제와 포용’은

▲볼프의 저서 <베풂과 용서>, <배제와 포용>.
‘용서’라는 문제는 극한 상황에서 더 극적일 수 있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 청소’라는 아픔을 겪고 목격하며 ‘용서’의 문제를 누구보다 실제적으로 고민했던 크로아티아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도 <베풂과 용서(복 있는 사람)>에서 장발장과 자베르 이야기를 다룬다.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되어 선행에 힘쓴다. 그는 자베르 경감의 목숨을 살려주기까지 한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범죄자로 의심하여 감옥에 넣으려던 자였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용서한다. 주교의 베풂과 용서를 통해 자신이 변화됐기 때문이다.”
 
‘장발장에게 임한 신의 은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베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용서를 경험했다 해서 누구나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베르는 용서받고 나서도, 남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에게 얽어맨 규정이 그를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용서를 거부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절대적인 정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려면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볼프는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IVP)>을 통해 이같은 생각을 신학적으로 더 깊이 전개하기도 했다. 강영안 교수(서강대)는 이 책의 해설을 통해 “눈앞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근대 철학·정치적 프로그램은 실패했으며, 포스트모던 정치철학도 대안이 아닌 지점에서 볼프의 신학은 출발한다”며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닮고 따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을, 이론적이면서도 실천적 함의를 가득 담아 풀어간다”고 했다.

▲위험에 빠진 팡틴(오른쪽)을 구하는 장발장.

상대방으로부터 해를 입을 때,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용서는 쉽지 않다. 여기에 ‘엄격한 보상적 정의’에 따른 정당한 요구를 할 권리마저 억눌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인 고통’을 통해 악인까지도 받아줄 수 있다. 그럼에도 용서만으로는 화해와 평화가 발생하지 않고, 포용(Embrace)이 필요하다.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원수와 악인의 포용을 보여주는 전형적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완전히 잊어버리기’가 필요하다.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때, 옛 것이 다 지나가고 그것에 대한 기억까지 폐기될 때에야 비로소 구속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생자의 호소는 어떻게 되는가? “아직 메시아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기에”,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가 대신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은… 용서받은 자들의 ‘사랑과 용서’ 통해

대통령 선거 후 ‘48%를 위한 힐링 무비’라는 세간의 평 때문에 가졌던 선입견은 러닝타임 2시간 30분 동안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적어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사함받은 우리가, 먼저 사함받은 내가 어떻게 하면 장발장처럼 그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혁명의 깃발 아래 다함께 바리케이트에 모여 혁명을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 용서받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되어 찬송할 날을 꿈꾸며.

이 영화는 특히 2천년 전 예수와 2백년 전 장발장이 그러했듯, 진정한 혁명은 지난해 유행했을 뿐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도 동조했던 ‘분노하라’, ‘1%대 99%’ 등의 프레임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라는 성경적 방법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고 본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들, 특히 서양의 고전들이 ‘신의 선택과 구원’에 때로는 분노하고 반항하며, 때로는 조롱하고 비웃어 왔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피와 폭력, 복수로 쟁취하는 자유와 인권보다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닦아주는 마음, 함께 아파하며 껴안아주는 은혜와 사랑, 구원의 힘을 다시금 입증한다.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한국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 또한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왼손 모르게 하던 일’을 ‘왼손도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일’에 부쩍 힘을 써 왔지만, 이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하게 남기고 간 ‘사랑의 힘’을 믿고 기억하며, 실천하는 게 먼저 아닐까. 물론 우리 주변의 ‘레미제라블’들을 품고 돕는 일, 그들이 다시 꿈꿀 수 있도록(I dreamed a dream) 하는 일에는 지금처럼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다.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최고 의무는 타인을 기억하는 것”이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김성광 칼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2013.01.13)

▲김성광 목사(강남교회 담임, 강남금식기도원 원장).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서,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와 사랑, 그 법을 거슬러 불순종한 것이 인간의 삶의 파괴와 저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인해서 질병과 저주와 고통 중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 마음을 돌이켜서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함께할 것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치료와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불순종은 불행이나 순종은 행복이다.

역대상 17:7에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한 왕조를 세울지라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했다. 그 아들 솔로몬에게 아버지 다윗의 신앙을 가르치고 축복했다.

이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다윗은 아버지의 명령을 잘 들어서 다른 형제들하고 다르게 열심히 양을 쳤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다윗, 그는 골리앗 장군과 싸우러 나갈 때도 골리앗의 활과 창을 보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싸워 승리했다. 매사에 어려운 일을 풀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했다.

성전 건축을 위해 그는 많은 준비를 했으나, 그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으며, 사울 왕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해도 주의 기름 부음받은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며 끝까지 참았다. 사울 왕이 자살하고 왕위가 올 때까지 인내하는 그 다윗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또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의했을 때 철저하게 회개했다.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죄와 허물을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기도함을 통해서 용서받고 철저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었던 다윗, 다윗은 순종으로 축복을 받았다.

신명기 1:36에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라고 말씀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온전히 했다. 온전히 순종했다는 의미는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100%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다. 100% 순종,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지가 나무에 50%만 붙어 있으면 곧 떨어지고 벌레에게 먹힌다. 그러므로 100% 붙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적이다.

욥기 35:11에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라고 말씀했다. 순종하면 즐겁게 형통함이 나타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홍해가 갈라지며 여리고 성도 무너진다. 과부는 순종함으로 그 가뭄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식량을 허락해주셨다. 나아만 장군은 순종함으로 문둥병에서 나았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순종함으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됐다. 시몬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잡았다. 오병이어 등 성경의 그 수많은 기적과 복은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불순종으로 비참하게 죽은 사람도 많지만 순종함으로 기적적인 삶을 산 사람들도 많다. 에베소서 6:1-3에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말씀했다. 결혼 문제, 직장 문제, 인생 문제, 부모와 상의하고 부모가 도와주고 부모의 지도를 받는 것이 자기 혼자 스스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 뜻에 순종한 만큼 내게는 행복이 있었고 성공도 있었다”고 말했다. 순종한 만큼 성공과 행복이 따라오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와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순종해서 덕 본 사람도 있고 순종하지 않아서 해를 본 사람이 있는데 순종한 것만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순종한 것만큼 사랑하신다. 순종한 것만큼 은혜를 베푸신다. 순종한 것만큼 그 사람의 성공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통해서 얻는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오는 성공,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오는 재물,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오는 명예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오히려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 이것만이 진정한 축복이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과연 능력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김학중 목사의 시편] 사랑의 약속을 지키는 교회(2012.11.28)

지난 21일 세상에서 가장 오랜 기간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에드워다 오바라(59)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6세에 복용했던 인슐린이 부작용을 일으켜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는데 의식을 잃기 전 그녀의 어머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엄마, 제발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렴.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약속은 약속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이어 에드워다양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장기 입원을 권유하는 의사의 말을 거부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그녀의 부모는 그녀 곁을 항상 떠나지 않고 그녀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다. 1976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이전보다 더욱 지극한 정성을 에드워다에게 쏟았다. 한 번에 1시간30분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24시간 딸을 돌보았던 어머니는 딸을 간호한 지 38년 만인 2008년 딸의 침대 곁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딸의 약값 때문에 무려 30만 달러에 이르는 빚을 지게 되었지만 자신의 딸을 ‘짐이 아닌 축복’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간호를 맡았는데 4년 후인 지난 21일 에드워다씨도 어머니를 따라 삶을 마감했다. 지난 2001년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 박사는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이 어머니의 헌신에 감동하여 ‘약속은 약속이다: 한 어머니의 믿기 힘든 무조건적인 사랑 이야기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두 가지 기초를 보게 되는데, 바로 의지와 감사다. 즉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아울러 그 대상에 대한 한없는 감사가 뒷받침돼야 한다. 의지만 있는 사랑은 오기로 변질되기 십상이고, 감사만 있는 사랑은 쉽게 돌변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초가 있어야만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이 넘쳐나는 성탄 시즌이 또 다시 다가오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기도 하지만 가장 경험하기도 힘든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약속이 바로 사랑의 약속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 13:1)하셨다. 비록 그들이 곧 자신을 버리고 배신할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넘쳐나는 상업적이고 퇴폐적인 사랑들에 맞서 한국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대중 앞에서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성탄 시즌에만 반짝하는 ‘자선 쇼’가 아니라 에드워다씨의 어머니처럼 결연한 의지와 한없는 감사를 품고 끝까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약속을 지키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본다.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늑대소년’에서 나타난 ‘기다림’의 의미(2012.11.21)


[영화 속의 진주] 늑대소년

▲극 중 한 장면.
늑대소년은 기독교 영화는 아니지만, 전하는 메시지가 깊어 기독교적 시각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늑대소년의 키워드는 ‘그리움’과 ‘기다림’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수십 년간 기다려온 늑대소년의 순수는, 온갖 이기심으로 배신을 일삼는 현 시대에 신선하고 강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던 순수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세상의 표면적 가치관 속에 잠들어 있는 우리들 내면의 순수함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움’과 ‘기다림’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죄악으로 타락한 인류가 모두 구원받기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사실 ‘기다림’이란 단어가 낯설지는 않지만, 그리 가깝게 와닿지도 않는 것 같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보다는 전권적인 주님께서 죄악된 인간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신다는 사고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기다림’은 ‘사랑’, ‘은혜’, ‘십자가’처럼 교회 내에서 주로 묵상되는 주제는 아니다. 때문에 기다림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 이 영화가 더 크게 다가온다.

요양차 가족들과 함께 한적한 마을로 이사 오게 된 소녀는 어두운 창고 속에 몸을 숨긴 채 움츠리고 있는 의문의 늑대소년을 만나게 된다. 소녀의 가족들은 늑대소년을 집으로 데려와 돌본다. 소녀는 인간 문화를 전혀 모르는 늑대소년에게 기다리는 법, 양치하는 법, 옷 입는 법, 글쓰기 등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늑대소년은 소녀가 가르쳐준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지킨다.

▲늑대소년.
늑대소년에게 소녀는 사랑과 존재 가치를 알려 준 절대적인 존재다. 늑대소년은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소녀는 병약하고 가난하여 학교도 다니지 못한다. 깊은 절망과 어둠 속에 살아가는 약한 그녀이지만, 늑대소년에게는 가장 완벽하며 위대한 존재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위험에 처하자, 늑대소년은 늑대로 변하여 소녀를 위험에서 구한다. 하지만 늑대인간의 정체가 발각되고, 온갖 음모와 위협에 시달리다가 결국 쫓겨나게 된다. 극중 늑대소년을 모함하는 지태의 모습에서 ‘누가 과연 짐승인가’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은 지식과 물질이 아닌, 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소녀 역시 늑대소년을 향한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으로 갈등을 겪게 된다. 소녀는 늑대소년과의 추억이 깃든 창고의 책상 위에 ‘올 때까지 기다려’라는 쪽지를 남기고 마을을 떠난다. 하지만 소녀는 늑대소년을 잊고 인생을 맘껏 즐기며 살아간다. 소녀는 흰 머리의 할머니가 되어 손녀와 함께 옛 집을 다시 찾아온다. 그녀는 허름한 옛집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나 창고로 향했는데, 창고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창고 안에는 잘 가꿔진 싱그러운 식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는 창고 안에서 옛 모습 그대로의 늑대소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늑대소년은 그녀에게 ‘올 때까지 기다려’라고 적힌 옛 쪽지를 건넨다. 할머니가 된 그녀와 젊은 늑대소년의 모습은 어쩌면 마음의 모습이 아닐까. 늑대소년은 옛 모습 그대로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여전히 아름다워요”라고 말한다. 그는 예전에 소녀가 가르쳐줬던 모든 것들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말하기와 글쓰기까지 배웠다. 늑대소년이 바라는 한 가지는 소녀가 아름다운 기타 연주를 해주는 것이었다.

늑대소년의 사랑은 위대하다. 그것은 변함없이 믿음으로 기다려 온 사랑이기 때문이다. 극히 현실성 없는 사랑이지만 큰 위로가 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도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인류를 사랑하셨다. 그것은 결점 많은 인간과는 달리 상대성을 띄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주님은 자신을 잊은 인류를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

늑대소년의 모습에서 신앙의 여정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는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지켜 행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늑대소년이 어두운 창고를 화원으로 가꿨듯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이 세계를 주님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잘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남에의 소망을 간직하고 성장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