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다가온다. 올해는 설날과 주일이 겹쳤다. 교회마다 명절이 되면 성도 출석에 비상이 걸린다. 물론 오랜만에 부모님께 효도하고 고향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는 장점도 있지만 교회들마다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성도들을 볼 때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또 한편으로 명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제사 문제라는 큰 시험거리를 줄 때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 명절에 처음부터 제사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추석도 신라시대 유리왕 때 비롯된
궁중놀이의 하나였다. 신라 때부터 고려 중엽까지 명절은 하나의 감사제나 축제로 지켜왔다. 그런데 13세기께 고려 말엽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주자학(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례문화가 생겨났다. 그래서 순수한 미풍양속인 민속명절이 고려말엽 때부터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날로 변질되고 말았다.
물론 고구려와 신라시대 때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제사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늘의 신적 대상에게 종교적인 행위로 드렸다. 그리고 공자께서도 원래 영혼불멸설이나 사후의 세계를 가르친 일도 없고
조상에게 효도의 표시로 제사를 지내라고 가르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천되면서 유교도 차츰차츰 토속신앙과 혼합되면서 사후의 세계를
거론하게 되었고 제사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나뉘는데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거처를 잃고 떠돌아다닐 때,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면 조상의 혼과 백이 연합하여 사후에도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다고 공자의
제자들이 임의로 거짓 사상을 만들어 유교에 주입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모든 조상 제사는 주자가 쓴 주자가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살아생전에 하라고 강조한다. 더구나 조상들은 신이 아니다. 경배의 대상, 제사의 대상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심판과 지배 아래 있다. 그러므로 조상을 하나님 외에 신적 대상으로 숭배하는 제사제도는 효도에 대한 예의나 인륜의 도덕이 아니고
엄연히 우상숭배요 미신행위이다. 따라서 명절을 맞아 혹여 성도들이 제사의식에 참여한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을 등지는
행위이겠는가. 우리의 참된 경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을 잘 섬기는 것이 최고의 믿음의 행위요, 축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사
문제 때문에 핍박받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제사 문제로 큰 핍박을
받았지만 지금은 모든 집안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어떤 설날을 맞이하고 싶은가. 그저 인간적 교감과 즐거움으로만 끝나거나,
혹은 죄를 범하는 설날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고 모시는 설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명절보다 더 높은 주의 날을 의식하면서.
그것이 우리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영광의 가문, 축복의 명문가문을 이루는 축복의 길이 아니겠는가.
<용인
새에덴교회>
2013년 2월 4일 월요일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크리스천투데이]‘주일예배’에 급급한 교회, 그것만이 존재 이유인가?(2012.12.30)
공동체성 회복하고 성경적 교회론 논의해야 할 때
▲교회가 주일예배라는 프레임 안에만 갇히면서 교인들이 개인화되고, 구별된 교회로서의 거룩함도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상기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이 없음). ⓒ크리스천투데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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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는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동아리 모임에서 얻은 힘으로 빠듯한 학교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며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깊어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함께 모인 친구들과 매일 교제하면서 그들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K씨도 자연히 동아리와 멀어졌다. 이젠 매주일 교회 예배에만 나가고 있다. 그 외엔 모든 시간을 직장과 집에서 보낸다. 가끔 수요예배나 금요철야기도회에도 나갔지만 지금은 뜸해졌다.
그는 “대학생 때 주일예배는 한 주간 이어진 신앙생활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일예배 때만 신앙인이 된 느낌”이라며 “교인들과도 자주 만나기 힘들다 보니 그저 인사만 하는 정도다. 동아리 모임과 단순 비교하는 게 무리지만 그 때 만큼 뜨겁게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지역교회(Local Church)들은 주일예배에 모든 것을 집중시킨다. 이는 교회들이 대형화된 오늘날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로 인해 “요즘 목사들은 주일예배 설교만 잘 하면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교회 다닌다’는 말은 ‘주일예배 드린다’는 말과 같고, 예배는 으레 주일예배를 뜻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이를 빗댄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도 생겼다.
이렇다 보니 ‘교회=주일예배’라는 등식이 고착화되고 있다. 많은 평신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적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평일 교회 활동은 없거나 있어도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의 참여에서 끝난다. 평일, 교회 건물이 낭비되고 있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주일예배라는 프레임 안에만 갇히면서 교인들이 개인화되고 구별된 교회로서의 거룩함도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결대 배본철 교수(역사신학)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성도들 간 교제다. 이것을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현대 교회에서 이것이 매우 약화됐다”며 “주일예배 중심으로만 교회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교인들끼리 서로 친밀해질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어 배 교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동체”라며 “그 안에서 성도들은 사랑과 희생을 배우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성장해간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자칫 이들이 이단에 빠질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론을 하루 빨리 구현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론을 언급하며 성경 사도행전 2장 43~47절을 그 핵심 요소 중 하나로 꼽는다. 특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는 단순히 주일예배만이 교회 생활의 전부가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게 신학자들의 권면이다.
한국공동체교회협의회 김현진 목사는 그의 논문 ‘한국 기독교 공동체 운동의 역사와 현황’에서 “교회사에서 기독교 공동체운동이 나타난 것은 교회가 제도화되고 세속화됨에 따라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면서부터였다”고 밝혔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비판들 중 ‘세속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김 목사의 언급처럼 오늘날 교회가 그 만큼 공동체성을 상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공동체운동으로 가톨릭의 수도적인 모습을 차용한 동광원이나 예수원,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 등이 개신교 안에 나타났다고 설명한 김 목사는, 많은 교회들이 성장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일명 ‘셀 교회’ 역시 사실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초대교회부터 약 200년 동안 교회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며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는 점차적으로 로마의 정치 구조와 흡사하게 계급화·제도화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공동체성을 상실해갔다”고 밝혔다.
이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교회론을 보다 활발히 논의하고 이를 실제 목회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해설교자로 유명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에서 “교회론은 성경의 교리를 다루는 책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교회론이 중대한 것이 아니라면 신약 성경이 교회에 대한 진리에 그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교회에 관한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다.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가진 중요성에 깊은 관심이 있다면, 교회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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