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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5일 금요일

[크리스천투데이]종교인 납세정보 공개 소송, 원심 뒤집고 각하 판결(2013.01.24)


한겨레신문이 국세청장 상대로 제기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조용호)는 24일 한겨레신문이 “종교인 소득세 납부 정보를 공개하라”며 국세청장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를 판결한 원심을 깨고 각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세청이 종교인 소득세 납부 관련 정보를 별도로 보유·관리하고 있거나, 기초자료를 편집해 원고가 요청한 자료를 만들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따라서 이 사건 소송은 법률상 이익이 없어 부적합하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요청 자료는 종교인 개인의 소득세 납부에 관한 정보로, 종교단체가 근로소득세 등을 원천징수하면서 일반 근로자들과 구분해 종교인들에 대한 것만 따로 신고하지는 않고 있다”며 “세법상 규정이 있지도 않으므로 국세청에서 종교인을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재판부는 “국세청이 광범위하게 과세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할 권한을 부여받고 있긴 하지만, 종교단체로부터 종교인 명단을 받는 등 실제로 명단을 수집한 점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강조했다.

앞선 1심 재판부는 일부 자료 공개를 판결하면서 “종교인 과세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불식시키고 바람직한 과세정책을 수립하도록 공론화할 필요성이 있다”며 종교인들의 최근 2년간 소득세 납부현황과 연소득 1억원 이상 신고자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최보식 칼럼] "제 편지를 받으셨는지요?"(2012.11.29)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기로 했어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최보식 선임기자
편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될 때도 있었다. "제 엽서가 잘 전해질지 알지도 못한 채 무턱대고 씁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카뮈-그르니에 서한집(1932~ 1960)'을 읽는다면, 우리는 '쯧쯧, 저런 안타까운 시절도 있었구나' 할 것이다. 소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와 산문집 '섬'으로 국내에 알려진 장 그르니에가 주고받았던 편지 모음이다. 카뮈는 마흔넷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3년 뒤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르니에는 카뮈의 고교 시절 스승이었다.

당시 이들이 서로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일주일 이상이 필요했다. 전란 통에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는 한 달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막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손에 닿기까지 멀리 돌아온 편지였습니다'라고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우리는 손가락만으로 실시간 대화를 나눈다. 논쟁을 벌이고, 연애를 하고, 점심 먹을 식당 정보도 찾아낸다. 세상 소식에는 모르는 것이 없어졌다. "제 편지를 받으셨는지요? 선생님의 소식이 궁금합니다"라고 애타게 묻던 카뮈 시절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정보 독점으로 밥벌이하던 시대는 벌써 무너졌다. 사건 배후에 감춰진 '모종의 음모'도 금방 알아내고 전파된다. 어떤 자리에서 내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가, "정말 언론인 맞으세요?" 소릴 들은 적도 있다. 옛날에는 세상 소식이 며칠 끊겨도 별 탈 없었는데, 요즘 살아가려면 이렇게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해졌다. 시시콜콜한 연예인 가십을 놓쳐도 삶의 한쪽 기둥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됐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소식과 근거 없는 낭설, 타인의 신상정보, 막말과 독설의 수집에 유독 집착하는 부류도 생겨났다.

이런 정보의 풍요(豊饒)라면 카뮈의 시대보다 우리가 지식과 이성에서 전진해야 옳다. 27세의 카뮈는 이런 편지를 썼다. '적어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고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최소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가치들만이라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지하철로 출근하니, 삶의 가치에 고민하던 카뮈 또래의 나이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직장인은 고스톱에, 여대생은 단조로운 벽돌깨기 게임에, 또 술이 덜 깬 직장인은 어젯밤 놓친 예능 프로에 열중했다. 마치 전염처럼 한 명 예외도 없었다. 어떤 삶을 살다 가야 하는지를 요즘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인기 있는 학자나 작가들도 대부분 트윗을 날리며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만 바쁘다. 거기에 쏟는 시간과 열정으로 세상을 좀 더 깊이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잡담만 오갈 뿐 사상과 철학을 말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본질과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색은 부질없는 일처럼 됐다.

패스트푸드가 편리한 것은 분명하지만 몸에 꼭 이로운 것은 아니다. 정신의 양식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손쉽게 주울 수 있는 정보와 유희(遊戱)만으로는 결코 인간을 균형 있게 성숙시키지 못한다. 편한 맛에 중독되면, 매스컴에서 퍼뜨려놓은 대로 우르르 쫓아가고 반응할 뿐이다. 허위의 말일수록 더 화사하다. 내용이 없는 언어일수록 더 선동적이다. 금세 우리 눈을 현혹하고 입속에 침이 고이도록 한다.

카뮈는 22세 때 공산당 입당(入黨)을 제안받고 편지를 썼다. '제게는 인간을 괴롭히는 불행과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명철한 의식을 유지할 것이며 절대 맹목적이 돼 넘어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카뮈 때보다 지금이 더 '명철한 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맹목적이거나 속기 쉬운 대상이 된다. 가령 대선 후보마다 자신을 뽑아야 '세상이 바뀐다'고 하지만, 이는 후보나 그 주변에 들러붙은 '파리 떼'의 위세만 바뀔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뀐 적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 아마 다음 정권에서는 세금은 늘고 수입은 줄고 빚은 늘어나는 것만 예정돼 있을 것이다.

진정 세상이 바뀌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우리 개인들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 자신의 휩쓸리는 모습을 냉정하게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젊어서 가끔은 어려운 책도 읽고,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도 참아내면서 말이다. 21세의 애송이 카뮈도 '제 자존심은 대부분의 경우 속 빈 허영이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 자신을 명철하게 판단해보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한낱 매스컴 스타를 '메시아'인 양 맹목적인 추종을 반복하면, 조작된 이미지에서 제대로 본질을 보지 못하면, 허위와 진실을 구분해내는 힘이 부족하면, 우리에게는 늘 그런 수준의 세상만 주어질 것이다.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청사초롱-김기태] 책을 버리는 사람들(2012.11.25)

초겨울인데도 도심 아파트 여기저기 이사 차량이 자주 눈에 띈다. 새집으로 옮기는 사람들의 넉넉함과 들뜬 기분은 아마 모든 이들의 소망이자 미덕이리라. 소유에 관한 최대 즐거움이 의식주일진대 그중에서도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주(住)’일 테이니까. 그런데 이사를 오고 가는 풍경의 뒤끝에는 으레 남는 것들이 있다. 한 무더기씩 방치되곤 하는 쓰레기가 그것이다. 특히 아파트 단지에서 이사를 간 후 남은 쓰레기 더미를 살피다 보면 쓸 만한데도 버리고 가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책이다. “옮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너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듯이 한 무더기씩 버려진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출판계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자못 우울하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간에서부터 지난 학기에 썼던 교과용 도서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몇 십 권짜리 전집류에다 저자의 서명이 아직도 선명한 증정본조차 버려져 있다. 누군가 가져다가 유용하게 쓴다면 또 모를까, 그대로 둔다면 필시 폐지로 전락하고 말 책들이기에 나는 주위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책들을 챙기느라 부산해지곤 한다. 곁에 두고 보면 그것은 분명 ‘책’이지만, 폐지로 분류되어 재생공장으로 간다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한낱 종이 재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더 좋은 책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필요한 곳에 보내주면 될 것을

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책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 여겨서 샀다기보다는 한순간의 호기심이나 과시욕 때문에, 아니면 남들도 다 보는 책이라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샀다가는 그 효용성이 없어지고 나니 귀찮은 쓰레기로만 여겨진 것은 아닐까. 기왕 버릴 바에는 차라리 떠나기 전에 이웃에게 물려주거나 책을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려주면 좋으련만.

사람이란 선입견의 동물이다. 직접 체험하지도 않았으면서 남의 말만 믿고,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에 의지하여 배운 그대로를 진실이라 믿는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책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도달한 사람들이 순간의 안락에 빠져 책을 경시하는 세상. 그러면서 툭 하면 잘못된 세상을 탓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어디에도 내 잘못은 없다. 다 남들이 잘못한 것일 뿐. 그렇다 보니 내가 만들지 않은,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했던 책에 대해 증오심만 쌓인 것일까. 사람들은 한결같이 책을 외면한다. 더 나아가 책을 버린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내 글이 실려 있는 책을,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 내팽개치는 장면을 봤다면, 하다못해 그런 책을 누군가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봤다면 내 마음은 과연 어떨 것인가. 반대로 내가 만든 책을, 내가 쓴 책을 누군가 진지하게 읽고 있는 장면을 봤다면 내 마음은 또한 어떨 것인가. 편집자 시절 나는 하마터면 그 앞으로 불쑥 나서 내가 바로 그 책과 이러저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소리 높여 고백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물며 홀대받는 순간의 기분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든 사람의 정성 생각해봐야

책은, 그것이 어떤 책이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정성이 배어 있는 지식과 정보의 보고(寶庫)이다. 수많은 전문가의 손길이 거친 끝에 비로소 태어나는 것이 한 권의 책이다. 내가 보고 배웠듯이 우리 자식들이, 우리 후손들이 대를 이어 옳고 그른 것을 간접 체험할 스승이 바로 책이다. 그런 책을 멸시하고 박대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과거를 부정하는 정체성 상실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나쁜 책이라면 애초부터 사 보지 말아야 했을 것이고, 필요해서 사 보았다면 그것을 길이 간직하려는 최소한의 양심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기태(세명대 교수·미디어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