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자들의 행보가 분주하다. 분주한 걸음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국민들이 기대하지 않는 말들도 거침없이 나온다.
며칠 전 방송토론에서 어느 후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본 일부의 사람들은 혹독하게 핀잔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네거티브 선거 전략은 어디까지 치달을까? 서로의 치부를 어디까지 파헤칠까? 어쩌면 그것 때문에 묻혀갈 불편한 진실들이 하나 둘 세상에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의 부패를 방지하는지 모른다.
요즘 검찰의 꼴이 말이 아니다. 세상을 다 집어삼킬 정도로 서슬 퍼런 그들의 눈초리에 사람들은 벌벌 떨어왔다. 그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칼에 세상은 질서를 유지하고 더 이상 부패를 방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억울하게 울어왔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어쨌든 범죄자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검사들이 요즘 몰매를 맞고 있다. 그들의 비리가 하나 둘 드러날 때마다 국민들은 분노를 토해낸다. 불편한 진실의 현실이 어디까지 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적당한 선에서 덮어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본다. 이런 불편한 진실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많았던가. 가슴 시리도록 아픈 일들이 목회자들 안에도 얼마나 많았던가. 교회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낭떠러지로 몰려와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정의 횃불을 치켜드는 것이다. 그게 교회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세상을 비난할 용기도 없다. 정치인들을 평가할 여유도 없다.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뿐, 그들을 향해 돌을 들 수가 없다. 왜? 우리 역시 공범이기 때문에. 아니 우리 역시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지적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저 사람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는가?” “어쩌면 내 안에 갖고 있는 불편한 진실은 아닐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건 아닐까?”
사실 그렇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는 그 손가락 방향을 자신에게로 조정해 볼 필요가 있다. 비난하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비난할 것들을 더 잘 보고, 더 혹독하게 질타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치기 위해 돌을 집어들고 있는가? 그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부터 한 번 돌아보면 안 될까? 다른 사람 몸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것을 보기 전에 자기 안에 흥건한 피를 한 번 쯤 돌아보면 안 될까?
세상에 다른 사람들을 극렬히 비난하고 힐난할 만큼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선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상대적인 깨끗함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 더럽고 추한 존재가 아니던가. 남들이 눈감아 주니까 그렇지, 나는 더 큰 돌로 맞아야 할 장본인이 아닌가?
이쯤 되면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게다.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하지 않은가?” 당연하다. 건설적인 비판 없이 발전과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건설적인 비판이야말로 잘못을 방지할 수 있는 중요한 안전장치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스스로의 마음을 냉철하게 점검해 보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인가? 애정 때문인가?”
다른 사람의 부도덕을 침 튀기며 질타했던 사람들을 보라. 역대 대통령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들 역시 훗날 몰매를 맞지 않았던가? 정말 깨끗한 사람은 스스로 깨끗하다 말하지 않는다. 도덕을 앞세워 다른 사람들을 후들겨 패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 빠질 수 있는 함정, 그것이 바로 부도덕이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면서 타인의 부도덕함을 공개적으로 질타하는 사람들이 그냥 곱게 보이지 않는다. 세상 앞에 자부할 수 있는 도덕적 삶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가? 자신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어느 누가 절대적 순수를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상대적인 정의, 상대적인 옮음에 불과할 뿐이다.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상대적 우월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늘 고독한 싸움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관찰은 바로 나 자신의 관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