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에게 공산권 지역은 ‘비행금지구역’이었다. 1983년 9월 1일 뉴욕 케네디공항을 떠나 태평양을 날아온 대한항공 007편이 항로를 이탈해 당시 소련 영공으로 들어감으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이 같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과거 ‘냉전시대’와는 달리 중국이나 러시아 어느 지역으로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해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는 중국과 러시아 어느 지역으로도 갈 수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과 다를 바 없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우리의 젊은이, 청소년들이 육로를 통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마음껏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을 꿈꾸어 본다.
기독교 대국으로 변하는 중국
그런데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처럼 ‘북방 통로’가 막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북방 나라들 중 특히 중국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 때부터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 관계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과 우리 민족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종교 전반에 걸쳐 크고 작은 교류를 이어왔다. 종교적인 면만 해도 그렇다. 오랜 세월 중국을 거쳐 우리 민족에게 유교, 불교, 도교뿐만 아니라 천주교까지 전해졌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알려진 이벽은 그의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해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들여온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중 양국의 종교 문화적 교류는 전면 중단됐다. 특히 1965년 가을부터 진행된 소위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종교 문화적 저변을 유물론과 계급투쟁으로 완벽하게 대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었다. 중국에 공식적으로는 2500만명, 비공식적으로는 1억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어느덧 중국은 1년에 성경을 350만권 인쇄하고도 부족할 정도로 막강한 잠재력을 지닌 기독교 대국이 되었다.
진정한 선의의 사귐이 되려면
이러한 중국에서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의 지하교회들은 물론이고 중국공산당 산하 기관인 국가종교국과 공산당의 공인을 받은 중국기독교협회가 한국 교회와 좋은 협력 관계를 갖기 원하고 있다. 필자는 2011년 상하이에 있는 중국기독교교회협의회(CCC)와 베이징에 위치한 종교국을 방문해 한·중 간 기독교 교류를 논의했고, 2012년에는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양국 기독교 지도자 모임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함께 서울에서 개최한 바 있다. 또한 바로 지난 주일에는 중국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아 항저우에 위치한 숭일당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이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하나님 말씀을 한국과 중국 교회가 함께 이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중 기독교 교류는 수천 년을 이어온 가장 깊은 의미의 정신문화적 교류가 재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이 통해야 진정한 친구이듯 한국과 중국은 이제 진정한 정신적, 영적 교류를 시작하고 있다. 한·중 교류가 이렇게 근본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까지 깊어지게 되면 마침내 북한의 문도 열리리라 소망한다. 냉정한 국제관계의 논리와 타락한 인간성만으로는 남북 관계든 한·중 관계든 진정한 선의의 사귐으로 이끌기 어렵다. 오직 우리의 화평이 되시며 둘을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는 그리스도(엡 2:14)가 중보자가 되셔서 그 안에서 연합하고 교제할 때 모든 닫힌 문은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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