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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월요일

이명박 대통령 인터뷰 전문(2013.02.05)


이명박 대통령 本紙 인터뷰… 퇴임 앞두고 임기 5년의 소회 말하다

[한반도와 중국]

"北 핵실험땐 시진핑에 악영향… 中정부 주도 투자 끊어질 것
韓·中 관계, 언론보도 이상으로 좋지만 北·中은 그 이하"

오는 24일로 임기를 마치는 이명박 대통령은 4일 청와대 본관 백악실에서 본지 양상훈 편집국장, 박두식 정치부장과 2시간 10분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중국이 약 1년 전부터 우리나라와 한반도 통일 이후에 대한 이야기에 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을 막는 데 중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북·중 관계는 어떻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중국에 관한 한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한·중 관계는 언론에 보도된 것 이상으로 좋고, 북·중 관계는 언론에 보도된 것 이하다. 작년 4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패 후에 중국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김정은' '지도자' 이런 말을 안 하더라. (김정은을) '젊은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데 깜짝 놀랐다. (중국 사람들과) 사석에서 통일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건 상상할 수 없는 변화다. 중국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가 됐을 때'로 얘기한다. 이런 진지한 대화가 한·중 간에 이뤄진 건 1년 정도 된다. 그전엔 그런 비슷한 얘기만 해도 (중국 측이) 말을 돌렸었다. 중국 내에서 '대한민국 중심으로 통일이 되는 게 중국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논문이 통용되고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중 정부 차원보다는 신뢰할 만한 민간 차원에서 모여 (통일 후)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대화를 할 때가 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청와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2008년부터 임기 5년간 발생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작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패 직후인 5월 중국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김정은을 ‘지도자’ 대신 ‘젊은 사람’이라고 지칭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북한이 중국의 반대에도 3차 핵실험을 하면 북·중 관계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북 핵실험은) 처음 출발하는 시진핑 총서기에게 상당히 나쁜 영향을 줄 거다. 겉으로는 북·중 관계가 끊어진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중국은 앞으로 정부 차원의 대북 투자를 하지 않을 거다. 중국에선 정부가 투자하지 않으면 민간도 투자하지 않는다. 북한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그렇게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국과 안보 문제에서 협력은 어느 정도로 이뤄지고 있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후 합동참모본부에 가서 '우리 영토를 공격받으면 발원지는 물론이고 지원 세력까지 육·해·공으로 공격하라'고 했다. 당시 북한이 '남한이나 미국은 절대 보복을 못한다'고 믿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렸다. 이 방침을 정한 뒤 내가 중국에 통보하고, 중국 쪽에 '북한에도 통보해달라'고 했다. 이에 중국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북한에 가서 통보한 뒤 나한테 와서 북에 통보한 사실을 알려줬다. 국방부를 통해서 미국에도 이 방침을 알렸다. 그러자 미국 쪽에서 '발원지 외에 지원 세력까지 공격하면 문제가 확대되지 않겠나'라고 했으나 내가 강하게 얘기해서 미국이 이해했다. 그것이 북한의 도발 억제에 도움이 많이 됐다. 북한 같은 호전적 세력엔 협상과 구걸로 (평화를) 살 수 없고 결국 우리가 더 강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의지를 보여야 도발을 못 한다."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盧·金 대화록 봤다… 國格 떨어질 내용이라 밝히기가 참…"

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논란이 됐던 2007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의 대화록에 대해서 "안 밝혀지는 게 낫다"고 했다.
―대통령 취임 후,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나눈 대화록을 보고 분노했다는 말이 있었다. 어떤 내용이었나.
"격분하거나 화를 낸 것은 아니다. 다만 국격(國格)이 떨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안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내용은 국격이라고 하기에도 좀…. (대화록에는) 한·미 관계 얘기도 있고 남북 관계 얘기도 있다. 이제 검찰(수사 과정)에서 일부는 나왔으니까 NLL 문제는 밝혀지겠지. 취임하고 보니 '안 밝혀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엔 밝혀지면 국민에게도 안 좋을 것 같다."

[노무현 前 대통령 죽음]
"갑작스러운 死去 소식 듣고 믿기지 않아
어디 중병 걸렸나 생각해 두차례나 확인"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전임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그의 갑작스러운 사거(死去) 등에 대해서도 소회를 털어놨다.

―노 전 대통령 사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었나.

"난 믿기지 않았다. 혹시 뭐 아파서 어디 중병에 걸렸나 생각해서 확인을 두 차례나 했다. '어떻게 돌아가셨나?' 하니까 '떨어졌다'고 하더라. 믿지 못하겠더라."

―지금 생각할 때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해 후회되는 점은 없나.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노 전 대통령을 서울로 불러서 조사한다고 해서 내가 민정수석에게 '방문 조사를 하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내가 검찰에 명령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때는 전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있을 때였다. 내가 수사를 중지하라고 하면 자칫 대통령이 초법적으로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못 했다. 민정수석에게 (봉하마을로) 방문 조사를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했었다. 전날까지 (그런 권유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 노 전 대통령 본인이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 기차를 쓰라고 했더니 (노 전 대통령이) 버스를 타겠다고 해서 청와대 버스를 보내줬다."  

[세종시]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선일보 양상훈(오른쪽) 편집국장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이 대통령은 당초 예정된 시간보다 40분을 넘긴 2시간10분 동안 인터뷰에 응했다. /이진한 기자
―대통령은 세종시 이전에 반대했다. 지금 이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보면 어떤가.

"그 문제는 (이미 착수한 이상) 어떻게 생각한다 하는 게 이제 의미가 없다. 지금 여러가지 문제가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빨리 (세종시를) 안정시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최근에 한 번 가봤다. 가보니까 정말 공직자는 공직자대로 불편하고 그렇더라. 또 그런 (불편)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업무 효율 문제다. 행정도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 점이 제일 걱정이다. 총리도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왔다갔다 한다는데 5일 근무하면 그중에 실제 근무하는 건 왕복하는 시간 빼면 한 3일 근무하는 정도 아닌가.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예 내려가질 않는다고 하더라."

―김황식 총리도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이걸 어떻게 정상화시키느냐로 생각해야지 지나간 이야기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 (반대할 당시에) 내 생각에는 남북통일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봤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남북통일이 되겠구나라고 생각됐다. 통일이 된다고 하면 개성 쪽 가까운 북한 땅에 하면 국유지니까 돈이 안 들지 않느냐. 그리고 거기에선 서울에 오는데도, 평양에 가는 데도, 그리고 인천공항을 가는 데도 몇십분씩밖에 안 걸린다. 그래서 내가 그때 '통일수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던 거다."

[퇴임 후 계획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돼 대단한 보람
나라에 부담은 안주면서 도움될 일 할 것"

오는 24일로 5년 임기를 마치는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후 구상에 대해 "나라에 부담은 안 주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아주 조용하게 하며 지내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해외 굴지의 컨설팅 회사가 (퇴임 후에) 이런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계획서를 만들어서 보내주기도 하더라"며 "어떤 정상은 '재임 중에 휴가를 같이 못 갔으니 퇴임 후에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단정적으로 딱 뭘 하겠다고 결정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서 "대한민국은 참 위대한 나라이고 이런 위대한 나라의 대통령이 됐다는 것에 나도 대단한 보람을 느낀다"며 "우리 국민이 때로는 시끄럽고 말이 많은 것 같아도 참으로 대단한 국민"이라고 했다. 이날 인터뷰에는 청와대에서 최금락 홍보수석과 박정하 대변인이 배석했다.

[국민 평가 낮은데…]
"난 세계서 가장 열심히 한 대통령… 억울하단 생각안해
대기업을 바꾸려면 총수 문화부터 바꾸는게 매우 중요"

이명박 대통령은 4일 자신의 재임 기간에 대한 평가에 대해 "두 번의 경제위기를 극복해 세계적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국내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 스스로 억울하다 생각하지 않고, 나 스스로 평가할 때 경제위기를 맞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한 대통령이라는 자부를 갖고 있다"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먼저 극복했고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의 우리나라에 대한 신용등급도 일본과 같거나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섰다. 국내에선 이런 부분을 평가받지 못하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취임했을 때는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던 시점이었다. 우리 정부에서 빈부 격차 개선 성과가 가장 좋고 중산층도 줄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중산층이 계속 무너졌다고 주장한다(이 대목에서 이 대통령은 중산층 관련 수치와 도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결국 이건 정치적·이념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됐지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지난해 말 중소기업중앙회가 주최한 모임에 가서 예상치 못한 큰 환대를 받았다. 500명 정도가 모여서 정말 반기더라. 지금은 아니더라도 세상의 판단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재임 중 '부자 정권'이라는 말이 계속 따라다녔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정책을 훨씬 더 신경 쓰고 집중했다. 경제위기 때는 아무래도 실적이 대기업이 훨씬 좋으니깐 (나보고) 대기업 위주로 했다고 한다. 위기 때 대기업을 죽일 건가? 나라를 살려놓고 봐야지. 대기업 정책, 중소기업 정책 다 해야 한다."

―대기업 CEO 출신으로 우리나라 재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볼 땐 대기업 문제는 기업 총수의 문화를 바꾸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청와대에서 회의를 열어 겁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기업들은 해외로 다 빠져나가려고 하고,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견디자고 해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재벌 총수 12명을 모아 당부했다. 그들에게 하청업체의 대표들을 불러놓고 고맙다고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이해를 시켰더니 여러 대기업에서 납품업자들 불러서 회의도 하고 실질적으로 많이 바뀌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왼쪽)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 직후인 2010년 4월‘, 천안함 46용사’분향소를 찾아 헌화한 뒤 돌아서고 있다, (가운데)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0일 우리나라 대통령으로는 처음 독도를 방문한 모습.‘ 한국령’이라고 쓰인 암반 비석을 만져보고 있다, (오른쪽)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7월 2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친인척 비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4대강 사업 비판에…]
[Q: 4대강 사업, 한꺼번에 안하고 단계적으로 할 수는 없었나? ]
"다른 지역서 가만있겠나… 단계적으론 50조 들여도 못해"
― 4대강 사업은 꼭 그렇게 임기 중에 한꺼번에 했어야 했나.

"나눠서 하는 건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민주당에선 영산강을 먼저 하라고 했고 낙동강변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토목, 물 문제와 관련된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 어느 한 곳을 먼저 해서 잘 되면 다른 곳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했으면 정치적 부담도 덜하지 않았겠나.

"4대강에 22조원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식(단계적)으로 하면 50조원을 들여도 다 못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비슷한 사업을 추진했었고, 각각 70조원·48조원 든다고 나왔었다. 내가 집권한 초기에 경제위기를 맞았다. 안 그래도 공공근로에 (한 해) 4조~5조원씩 들여야 했다. 그걸 하느니 4대강을 하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 골고루 딱 맞는 거다. 정치적으로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민주당에서도 운하만 아니면 반대 안 한다고 했었다."

―대운하를 못 한 것이 아쉬운가.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강 자체를 생산적인 데 쓰지 않고 하수구처럼 쓰는 나라는 없다. 콩고에 가도 큰 강을 따라 원자재 수송한다. 네덜란드에서 그리스까지 운하를 통해서 가더라. 그래서 운하를 만들면 좋겠다 생각한 거지.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 당선되고 이 문제에 대한 국민 인식이 달라졌을 때 추진하든가 할 문제다. 내가 이제 와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최근 감사원이 4대강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화가 나지 않았나.

"공무원들은 물일(물과 관련된 공사)을 이해 못 한다. 물일은 홍수 한번 만나면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빨리 해야 한다. 감사원에서 환경 하는 사람들은 물일에 대한 이해가 없다. 감사원도 모두 정부 산하인데 내 입장에서 뭐라고 할 수 있겠나."

[사면·측근 비리에…]
[Q: 특별사면 국민 비난 받을것 알면서 왜 했나?]
"임기중 발생 비리 사면않겠단 약속은 지켜"
"먼저 정치한 이상득 의원 출마 막을 수 없어"
―얼마 전 실시한 특별사면은 비판받을 것이 분명하고, 대통령도 그걸 알았을 텐데 왜 했나.

"사실 떠날 때 (마지막으로) 하려고 작년 8·15와 연말 때 사면을 안 했다. (이번 7번째 사면 전까지) 우리 횟수가 6번인가 했다. 보통 (전임 대통령들은) 8~9회 했다. 사면했다는 걸로 욕을 먹지만, 내 임기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는 안 하겠다는 약속만은 지켰다. (이번에) 민간인 사찰, 이런 건 사면 안했다. 최시중씨 같은 사람은 그 (임기 시작되기) 이전의 문제니까. 원칙은 몇 가지 지켰다. 측근 사면이라고 하는데 사실 진짜 측근은 안 했다.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2008년 총선 때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출마를 막았어야 했다는 후회는 없나.

"이상득 의원은 (내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정치를 하고 있었다. 내가 취임하기 전에 이미 국회부의장 하고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다 했는데,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 정치 들어왔으면 모르겠지만, (이 전 의원의 출마가)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봤다(이 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이상득 의원'이라고 불렀다)."

―임기 중 벌어진 민간인 사찰 문제는 정말로 몰랐나.

"몰랐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정치적 거물을 사찰한 것도 아니고 신문에 난 거 파일링한 거더라. 그런 건 수석이나 실장한테 (보고)할 것도 아니더라. 과거에 하던 스타일대로 한 거다."

['고·소·영' 인사 논란에…]
Q: 첫 수석 전원이 서울·영남, 잘못 아닌가?
"고·소·영 인사라는 비판엔 동의 못해"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강부자'(강남 땅부자)라는 비판이 있다. 첫 청와대 비서진 인선 때는 서울 아니면 영남 출신들만 기용했는데, 지역 안배 같은 고려를 하지 않은 건가.

"나는 지역을 고려해서 인사를 하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난 지방색이 없다. 기업에서 일할 때도 그런 것 따지지 않았다. 언젠가 주요 자리에 4명을 인사하는데 3명이 호남 사람이었다. 그랬더니 (내 얘기를 소재로 했던) 드라마에서 전북 군산 사람으로 나온 것을 가리켜 내가 호남 출신이라는 말이 나오더라. 이 정부에서 전남 출신 국무총리도 처음 나왔고, 전남 출신 국방장관도 처음 나왔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동시에 호남 출신인 적도 처음이다. 나는 각자 그 사람의 적성에 맞게 쓸 뿐이다. 인사는 첫째, 능력 위주로 해야 한다. 둘째는 생각이 다르지 않고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대통령과 같은 대학 출신들을 중용했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난 '기왕이면 고려대 출신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지금 농림장관이 고대 출신인데, 난 거기 나온 줄 몰랐다. 내 인선이 '고소영'이란 주장은 좀 억지라고 본다."

―대통령 5년을 하고 나서 보니 지역 안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됐는가, 그렇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안 된다고 본다. 처음 당선된 직후에는 우리한테 자료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씨가 '모든 자료를 대통령 기록원에 넘겼다'고 하더라. 정말 막막했다. 지금은 2만명에 대한 자료가 있다. 이를 다음 정부에 모두 넘겨줬다."

[내곡동 사저 의혹에…]
Q:퇴임 후 사저 꼭 서울이어야 했나?
"경기도 땅도 찾아 헤맸다고 들었다"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은 특검 수사까지 이어졌다. 서울이 아닌, 서울 근교 경기도에 사저 부지를 매입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나.

"경기도에서도 땅을 많이 찾아봤다. 경호처에서 경기도 일대를 헤매지 않은 데가 없다. 그곳도 땅값이 비싸더라. 그리고 경호처 사람들은 경호상 문제가 없는 땅을 우선해서 찾은 것이다. 난 사실 고향 같은 논현동 (자택으로) 가고 싶었지. 거기서 CEO (최고경영자)도 되고 서울시장도 되고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경호처가 경호상 이유로 반대해서 다른 곳을 찾았다."

―내곡동 사저 부지를 본인 이름으로 구입하지 않았는데….

"(경호처에서) 대통령 이름으로 하면 주변 땅값이 올라 구입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역대 대통령들이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아들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 수 있지 않았나.

"내 생각엔 건축 허가를 받으면 어차피 내 이름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들(시형씨)에게 재산으로 물려줄 것도 아니고, 내가 평생 죽을 때까지 살 집인데…."

    
[천안함·연평도]
"천안함 수색작업 현장서 한주호 준위 만났었는데… 숨졌다는 소식 듣고 큰 충격
연평도때 '확전 말라' 지시? 공군한테 때리라고 하니 軍출신들이 안된다고 하더라"
이명박 대통령은 4일 본지 인터뷰에서 임기 5년 중 가장 가슴 아픈 일로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을 꼽았다. 그는 "천안함 사건을 당한 뒤에 자작극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때 특히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천안함 폭침 초반 정부에서 "(사건 원인에 대해) 예단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북의 공격이 아니라 우리 군의 실수로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떻게 군의 실수로 천안함이 두 동강이 날 수 있겠나. (천안함을 침몰시킨 북한 어뢰를 찾아낸 건) 우리 국운(國運)이었다고 생각한다. 1번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어뢰를 찾아냈을 때 미국도 놀라더라. 그런데 (일부에서) 이걸 가짜라고 하더라. 나는 이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본다. 좌파 진보라기보다는 종북(從北) 세력이라고 봐야지. 이번에 은하 3호를 건져냈을 때 거기에도 번호가 나왔는데, 여기에 대해선 가짜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쐈다고 발표했으니까 아무 소리도 없는 것 같다."

―두 동강 난 천안함을 건져올릴 때 심정이 어땠나.

"오죽했으면 (사건 직후 직접) 현장에 갔겠나. 그때 한창 수색 작업 중이던 한주호 준위를 만났다. 내가 '무리하지 말라. 물이 차고 깊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괜찮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천안함 46용사에 이어 한 준위까지 숨져 내가 충격을 두 번 받았다. 한 준위 아들은 학교 선생님이 됐고, 전사자의 한 어머니는 받은 포상금을 함정 기관총을 사는 데 보탰다. 나는 그런 분들이 계셔서 종북 세력이 있어도 우리나라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시 청와대에서 "확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확전하지 말라고 얘기 안 했다. '공군 뒀다 뭐하냐'고 했다. 당시 (국가위기관리센터 긴급회의에) 배석했던 한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전한 거다. 그 후 나도 책임 추궁을 했다. 군 출신들은 확전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군 지원에 대해 말하니 당시) 군 고위관계자가 교전 규칙을 얘기하면서 '확전하면 안 된다. 미군과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길로 합참과 국방부를 찾아가서 '교전 규칙은 지켜야겠지만 이건 우리 영토를 침범당한 사건이다. 국토를 지키는 건 교전 규칙과 관계없다'고 명령했다. 나중에 보니 교전 규칙에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못하게 했으니 그랬던 거다. 공군한테 때리라고 하니까 우리 군이 놀라더라. 그때 이후 (북 도발 시) 현장에서 적극 대응하고, 보고는 나중에 하라고 했다. 우리 영토를 공격받으면 발원지와 지원 세력까지 육·해·공으로 공격하라고 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후) 군이 많이 변화했다고 본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천안함 폭침을 "재임 중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라며 "(퇴임 이후) 앞으로도 (천안함·연평도 사건 전사자들의) 묘지를 자주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광우병 촛불 시위]

"취임 초로 돌아가도 美와 쇠고기 협상할 것"
"세계가 다 먹는 쇠고기인데… 협상 반대는 상식 밖의 일
촛불때 경찰청장 불러 말했다, 절대 사람 안 다치게 하라고
그랬더니 컨테이너 쌓더라"

―광우병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임기 5년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촛불 시위는 계획적으로 한 거라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진보 단체들이 다 모였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까 이미 그 사람들이 '이걸(시위를) 크게 한번 해서 정권을 뒤흔들겠다'는 계획이었다고 들었다. 몇 명 다치면 정권을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내가 경찰청장 불러서 '절대로 사람이 안 다치도록 하라' '(경찰이) 후퇴해도 좋고 (시위대가) 청와대 들어와도 좋으니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정권 초반이어서 경찰이 과잉 대응을 할 수도 있고, 시위가 격해지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위대가 유모차까지 끌고 나오니 (경찰이)컨테이너 박스를 광화문에 쌓아놓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내가 독재자도 아니고 군사정권도 아닌데 사람이 다치는 일이 벌어져서야 되겠나. 또 세계가 어떻게 보겠나. 그랬더니 한쪽에선 너무 약하게 대응했다고 하고, 다른 쪽에선 심하게 했다고 하더라."

―취임 초로 다시 돌아가면 그래도 미국과 쇠고기 협상 타결할 것인가.

"난 했을 거다. '글로벌 코리아' 하려면 FTA를 해야 하는데, 전 세계가 다 먹는 쇠고기를 안 먹는 국가(의 지도자)가 그게 무슨 지도자인가. 그거(쇠고기 협상) 안 하면 내가 대통령 자격이 없지. 그런 상식 바깥의 일(쇠고기 협상 반대)을 대통령이 된 사람이 타협하는 건 맞지 않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사설]되냐 안 되냐보다 얼마가 드는지부터 정확하게(2013.01.18)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어제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선 공약들은 실현 가능성과 재원 마련 가능성 등에 대해 관계자들과 충분히 논의하면서 진정성을 갖고 정성껏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수위의 인수 작업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공약에 대해 지키지 마라, 폐기하라든지, 공약을 모두 지키면 나라 형편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국민에 대한 도리에 어긋난다”고 부연했다.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선 공약의 수정 보완론이나 속도 조절론, 폐기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긴 하지만 박근혜 당선인의 의중이 담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약은 원래 이행을 전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 당선인이 공약 이행 의지를 재확인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공약 중에는 무리하게 이행해서 얻는 득보다 손실이 훨씬 큰 경우도 있다. 세종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박 당선인이 약속을 지키겠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수정안을 끝까지 반대해 관철시켰지만, 지금 세종시는 행정의 비효율에 몸살을 앓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박 당선인에게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국가적으로는 손실이 크다. 

국정 최고 책임자는 공약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정 형편도 고려해야 한다. 박 당선인의 공약 실현에 필요한 재정 소요액이 적게 계산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4대 중증질환 무료 진료만 해도 박 당선인 측은 6조 원가량이 든다고 했으나 보건복지 관련 4개 학회 및 연구기관이 공동 개최한 토론회에서는 21조8000억 원이 든다는 추계가 나왔다. 박 당선인의 모든 공약을 이행하는 데 새누리당이 추계한 131조 원(5년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 수 있다는 얘기다. 

선거가 끝난 뒤 공약 이행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사실 잘못이다. 공약을 만들 때 소요액까지 면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선거 전에 충분한 사전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작년 4·11총선 때 기획재정부가 공약 소요 금액에 대한 사전 검증을 시도했으나 중앙선관위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제동을 거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재정부가 인수위의 요청에 따라 이달 말까지 재원 마련 방안을 내놓겠다고 하지만, 정부에만 맡겨 놓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차제에 부문별 전문가 그룹과 정부, 인수위가 참여해 공약 이행에 필요한 정확한 예산 규모를 객관적이고도, 투명하게 산출해 내고, 이를 국회에 설명하는 절차를 거치면 논란이 줄어들 것이다. 그 후에 공약의 수정이나 폐기 또는 우선순위의 조정, 재원 조달의 구체적 방법을 논의하는 게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 한때 "외국 가서 살지 그래?" 그 말에 박근혜는… 33년 만에 대통령 돼 청와대로 귀환(2012.12.20)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中2때 청와대 들어가 전차통학, 어머니 저격당해 숨진 뒤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
10·26 뒤 신당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 10주기 맞춰 기념사업
2년 3개월간 당대표 지내며 사실상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유세 중 면도칼 테러 당하기도
올해 박前대통령 추모 행사서 "이제 아버지 놓아드렸으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패했다.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고 했다. 이명박 후보는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이어 과거사 문제로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