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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5일 월요일

[동아일보]“우리는 순수…무지는 계몽해야” 욕하는 게 계몽?(2013.4.16)

■ SNS ‘손가락 욕설’ 논란

팝아티스트 이주혜 씨가 14일 오전 3시 5분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있는 사진 간판 옆에 선 이 씨가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세운 모습이다. 이주혜 씨 페이스북 캡처

#1. 여성 팝아티스트(대중예술가) 이주혜 씨(25)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사진 앞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진을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씨는 13일 경북 구미시 박 전 대통령 생가에서 진행된 ‘박정희와 팝아트 투어’에 참가해 박 전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간판 앞에서 이런 포즈를 취했다. 이 씨는 ‘우리는 순수하다. 그러나 무지는 계몽해야 하고 죄이자, 폭력이다’라는 글을 함께 올렸다.

#2. 자칭 ‘새누리당 저격수’ 황모 씨(28)는 지난해 4·11총선과 대선 기간에 트위터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선후보를 비난했다. 황 씨는 총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4월 4일 “맘 같아선 박근혜 ××를 찢어버리고 싶다. 삼성동 저택에 근혜 있을 때 수류탄 던지고 싶다”는 트윗을, 총선이 막 끝난 지난해 4월 15일엔 “만약 내 부모가 박근혜나 이명박이었으면 난 벌써 죽였다”라는 트윗을 날렸다. 황 씨는 박 대통령의 남편감으로 조두순, 오원춘 등 성폭행범이 제격이라는 트윗도 다수 퍼뜨렸다. 인터넷 게시판엔 ‘박근혜와 오원춘이 같이 교도소에 합방되는 그날까지’라는 글을 올렸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전현직 대통령에게 퍼붓는 욕설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국가원수에 대한 비판은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권리지만 일부 인사들은 보는 이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준의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

팝아티스트 이 씨가 육 여사에게 손가락 욕을 하는 사진은 14, 15일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박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찬반 견해를 표현할 수 있지만 왜 육 여사에게까지 욕설을 퍼붓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일부 누리꾼들은 이 씨를 향해 “저 ×, 육 여사가 누구인지 알고나 저러나” “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 씨는 페이스북 계정을 폐쇄했다가 15일 다시 열었다. 이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욕을 잘 모르나본데 내 손가락 방향을 보면 육영수 여사가 아니라 그 사진을 보는 ‘박정희 빠(열혈지지자)’에게 욕을 하는 것”이라며 “박정희는 이미 죽었지만 사실 죽지 않았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이 씨의 트위터엔 ‘1980.5.18 대량살인을 정당화한 유신정권. 당연한 권익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종말을 고했으며 5·18민주화운동 진압과는 무관하다. 이 씨가 역사의 사실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방 중독증’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국가원수 비난 글을 올리는 데 매달리는 누리꾼들도 있다. ‘새누리당 저격수’를 자칭했던 대학 휴학생 황 씨는 ‘안티 박근혜’라는 트위터를 운영하며 4300여 명의 팔로어에게 2400여 개의 ‘욕설 트윗’을 쓰거나 리트윗하고 있다. 황 씨는 지난해에는 다른 트위터 계정으로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 등 여당 인사를 비방하는 트윗 4000여 개를 쓰거나 리트윗했다. 결국 황 씨는 도가 지나친 후보 비방으로 지난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두 차례 불구속 기소됐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경찰과 동행해 황 씨의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온라인 활동을 자제하게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박 대통령을 살해하고 싶다는 황 씨의 위협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황 씨는 15일 자신이 운영하는 박 대통령 안티 카페에 글을 남겨 “국정원의 이번 행위는 민간인 사찰이며 헌정질서 파괴”라고 주장했다. 김현 민주통합당 대변인도 “국정원이 황 씨 가족을 방문한 건 민간인 사찰”이란 논평을 냈다.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등 보수성향 대통령만 욕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맹목적인 비난을 퍼붓는 글도 숱하게 검색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객관적 사실을 알아보기보단 이념적 지역적으로 자기편이 아니라고 여겨질 경우 무조건적인 증오를 퍼붓고 보는 치기 어린 역사관이 사회에 만연한 결과라고 우려하고 있다.

국가원수모독죄는 1988년 폐지됐다. 하지만 국가원수뿐만 아니라 그 누구를 대상으로 해서라도 상습적으로 인신공격성 비방을 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할 경우엔 모욕죄와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김진의 시시각각] 박근혜, 사격장에 가야 한다(2013.01.21)

1968년 1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가족은 청와대 본관 2층에 살았다. 이틀 전 파주에서 무장공비 무리를 보았다는 신고가 들어와 있었다. 박 대통령은 감기약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성심여고 1학년 박근혜도 침대에 들었다.

 그날 밤 10시15분쯤 첫 총성이 울렸다. 대통령 가족 침실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이었다. 북한 특공대가 최규식 종로서장에게 기관단총을 갈긴 것이다. 군경 수색대가 공비들과 교전했다. 기관단총과 수류탄 소리가 겨울 밤하늘을 찢었다.

 박근혜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테러를 평생 다섯 번 겪었다. 70년 북한 공비들은 국립묘지 정문에 폭탄을 설치하다 실패했다. 74년 어머니, 79년 아버지, 2006년엔 박근혜 자신이 테러를 당했다. 가족이 처음 테러 목표가 된 건 68년 1·21사태다. 오바마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는 15세다. 그에게 비유하면 1·21사태는 알카에다 테러분자들이 백악관 침실 500m까지 접근해 온 것이다.

 1·21사태는 대통령과 국민을 바꿔놓았다. 20일 후 박 대통령은 경호실 사격장을 찾았다. 대통령은 권총과 카빈 소총을 번갈아 쏘았다. 육영수 여사에게도 총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고 사격을 시켰다. 대통령의 사격 장면은 신문에 실렸다. 7월엔 육 여사가 M-1 소총을 들어보는 사진이 찍혔다. 그해 4월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대통령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안병훈 편저 『대통령 박정희』)

45년이 흘렀다. 하지만 북한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여전히 테러를 저지른다. 2010년엔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68년 북한은 휴전선 철책 사이로 공비들을 보냈다. 2010년엔 바다 밑으로 잠수함부대를 보냈다. 연평도 때는 하늘 위로 포탄을 날렸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박근혜는 가장 유동적이고 위험한 상황을 맞고 있다. 박정희 때 김일성은 도발했지만 북한에 핵은 없었다. 노무현 때 북한은 핵을 만들었지만 김정일이라는 안정된 권력이 있었다. 지금 김정은은 불안한 3대 세습이다. 왕조를 빼고 인류 역사상 3대까지 성공한 독재권력은 없다. 카다피는 1대, 시리아 아사드는 2대에서 무너졌다.

 햇볕론자들은 개혁·개방으로 북한이 비(非)도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다. 공산독재가 개혁·개방에 성공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78년 덩샤오핑, 그리고 86년 고르바초프와 베트남 지도부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개인숭배와 권력부패가 없었다.

 개인숭배와 권력부패가 있으면 개혁·개방이 어렵다. 개방 바람이 불면 인민이 진실에 눈을 뜨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권 자체가 위험해진다. 90년대 초 동유럽권이 무너질 때 김정일에겐 개방의 기회가 있었다. 서방국가에서 공부했다는 김정은도 개혁·개방을 안다. 그런데도 못하는 건 결국 개인숭배와 부패 때문이다.

 박근혜 임기 중에도 북한의 개혁은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변화를 유도하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이다. 북한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건 달러나 식량이 아니다. 원칙 있는 대응이다. 남한이 평화를 구걸하진 않으며 도발엔 대가가 따른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켜낸 게 이명박 정권이다.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그리고 김관진 국방장관 3인이 중요한 일을 해냈다. 북한에 이들은 절도 있는 교육가였다.

 1·21은 과거가 아니다. 천안함과 연평도에 살아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다. 공산주의자를 다루는 법을 박근혜는 잘 알 것이다. 오른 손엔 총을 굳게 잡고, 왼손을 내미는 것이다. 힘과 원칙 없이 공산주의를 이긴 사례가 없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박근혜는 사격장에 가야 한다. 가녀린 독신 여성 대통령이 K-1 소총을 조준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려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 생각을 고쳐먹을 것이다.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손현덕 칼럼] 끝내 못 내보낸 `박근혜 광고`(2013.01.17)

대통령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새누리당 선거대책본부는 박근혜 후보의 마지막 1분짜리 홍보 광고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 진한 걸로. `박근혜의 상처`, `위기에 강한 글로벌 리더십`, `박근혜가 바꾸는 세상` 등에 이은 종결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광고는 전파를 타지 못했다. 무슨 내용의 광고이기에 내보내지 못했을까? 제목은 `편지`다.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면서 힘들어하는 박근혜 후보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유세를 마치고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꾸벅꾸벅 존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편지가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안쓰러워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어머니. 또 하나의 사진. 육 여사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밖을 내다본다. 뭔가 말을 하는 듯하다. "근혜야, 잘해." 

선거대책본부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박 터지는 막판 선거전에서 이 짠한 광고 한 편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뒤집혔을지도 모를 지지율을 반전시킬 카드라고 여겼다. 그러나 박 후보는 최종적으로 `광고 불가` 결정을 내린다. 

해석이 분분하다. 추측건대 박 후보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어머니를 이용해 선거를 치르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1974년 겨울, 개학을 앞두고 급히 프랑스로 떠나던 날, 문 앞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던 어머니. 광고를 내보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순간, 박 후보는 어쩌면 어머니와의 그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런 어머니를 어떻게 선거에 활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미쳤을지 모른다. 

나는 이 미공개 광고 얘기를 들으면서 박 당선인이 약 40일이 지나면 직면하게 될 대통령으로서의 `절대 고독`을 생각한다. 만약 당선인에게 어머니가 있었다면…. 육 여사처럼 힘들 때 격려해주고, 마음 편히 얘기 나눌 사람이 있다면…. 불행히도 지금의 당선인 주변에 `육영수`는 없다.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속마음을 터놓을 가족이 당선인에겐 없다.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고독한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하루 집무를 마치고 대통령 관저로 돌아가면 그 긴 밤을 홀로 보낸다. 관저로 통하는 인수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혼자가 된다. 적막한 북악산의 밤. 삼성동 사저와는 판이한 환경. 넓디넓은 집에 대통령 한 사람만 있다. 일하는 사람도 모두 자리를 비킨다. 

대통령은 원래 고독한 자리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미언박물관에 가면 미국 대통령의 일을 `영광의 부담(Glorious Burden)`이라고 적은 글귀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직업이라고 말한다. 청와대에 비서가 있고 내각에 장관이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에게 머리를 빌려주는 사람들이지 마음을 열고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가슴 한복판에서 솟구치는 화기를 눌러주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국정에 대한 짜증을 받아주진 않는다. 

당선인이 선거전에서 내세웠던 `100%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되는 데는 유효했을지 모르나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통령을 찌르는 비수로 다가올 것이다. 화기는 손톱 밑 가시가 뽑히지 않아 올라올 수 있고, 짜증은 행정 현실에 공약 이행이 막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뛰는 심장을 다스리는 건 가족의 몫이고 친구가 할 일이다. 이해관계 없이 마음을 여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느 기업인이 이런 말을 했다. "최고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기분 좋은 아침을 맞는 것"이라고. 그것만큼 독선과 오류를 막고 훌륭한 의사결정을 가져다주는 묘약이 없다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국가 안위와 민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절대고독의 자리. 그럴수록 화와 짜증을 풀고 상쾌한 아침을 맞게 하는 청량제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이런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설사 국민의 따가운 시선이 있다손 치더라도.

2012년 12월 23일 일요일

[김진의 시시각각] 5·16과 51.6%(2012.12.24)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들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이는 누구일까.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일 것이다.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경호실에 들어간 이래 그는 대통령 5인을 경험했다. 마지막엔 김영삼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냈다. 1974년 8월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쏘았을 때 그는 권총을 빼 들고 박정희 대통령 연단 앞을 지켰다. 79년 10월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과 경호원들이 모두 피살됐을 때 그는 유일하게 살았다. 총을 맞고도 살아났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박정희다. 지방 시찰을 수행하면서 박정희가 보여준 언행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주 가까운 지인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겪었던 5인 대통령 중 누가 제일 훌륭한가.” 그는 짧게 답했다.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투표가 있었던 지난 19일, 문재인 후보가 앞선다는 출구조사 풍문이 돌았다. 몇몇 지인이 걱정스럽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을 기억합니까.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딸을 지켜줄 겁니다.”

 2004년 5월 29일은 ‘노무현 시대’의 클라이맥스였다. 이날 저녁 청와대에서는 열린우리당 총선 당선자 축하만찬이 열렸다. 386 운동권 출신 20여 명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어떤 이는 눈물을 훔쳤고 노무현 대통령도 따라 불렀다. 대통령은 답가를 불렀다. 노무현의 선택은 조용필의 ‘허공’이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허공’ 작곡가는 정풍송이다. 보수주의자 정풍송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다. 그는 노무현 정권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대통령이 ‘허공’을 불렀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잔치 분위기에서 왠 허공”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5년 후 노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정풍송은 ‘허공’을 떠올렸다. “노무현의 모든 게 허공 속에 흩어졌다”며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지난 19일 그 정권의 비서실장 문재인이 박근혜를 위협하고 있었다. 정풍송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방송사들이 ‘박근혜 확정’을 외칠 때 정풍송은 눈을 의심했다. 득표율 51.6%. 정풍송은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TV 보고 있지? 아니 51.6 저거 5·16 아냐?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번 대선의 절반은 박정희 선거였다. 문재인과 민주당 그리고 진보·좌파는 시작부터 박정희를 공격했다. 처음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이용하려 했다. 두개골에 뚫린 커다란 구멍이 타살 흔적이란 거였다. 그런데 장준하가 61년 5·16 쿠데타 직후 잡지 ‘사상계’에 썼던 권두언이 등장했다.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 혁명이다.” 야권의 장준하 프로젝트는 쑥 들어갔다.

 선거 마지막에 등장한 박정희 공격이 가수 이은미였다. 그는 TV연설에서 “독재자의 딸이 여론조사 1위라는 게 정상적인가”라고 했다. 그 연설은 유튜브에서만 21만여 조회를 기록했다.

 이은미는 66년생이니 박정희가 피살될 때는 13살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이은미의 기억은 초등학생 수준인 것이다. 성인이 되어 그는 박정희에 대해 무엇을 알아냈을까. 직접 경험이 없다면 간접 경험이라도 있을까. 조갑제 기자가 쓴 박정희 전기 13권 중 한 권이라도 읽었을까. 독재자라는 건 혁명가 박정희의 일면일 뿐이다. 많은 국민이 박정희의 다른 면을 보고 그 성과에 고마워한다. 이은미는 왜 그런 건 보지 못할까.

 이번 선거는 증명된 과거가 불안한 미래를 이긴 것이다. 적잖은 세력이 독재자라는 피상적인 단어만으로 박정희를 공격했다. 하지만 박정희를 실증적으로 경험한 많은 국민은 휘둘리지 않았다. 국가가 정상궤도로 진입한 것이다. 박상범과 정풍송처럼 지지자는 가슴으로 박정희를 지켰다. 그러나 이은미처럼 반대자는 입으로만 공격했다. 박정희에 관한 한 이번 선거는 가슴이 입을 이긴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 한때 "외국 가서 살지 그래?" 그 말에 박근혜는… 33년 만에 대통령 돼 청와대로 귀환(2012.12.20)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中2때 청와대 들어가 전차통학, 어머니 저격당해 숨진 뒤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
10·26 뒤 신당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 10주기 맞춰 기념사업
2년 3개월간 당대표 지내며 사실상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유세 중 면도칼 테러 당하기도
올해 박前대통령 추모 행사서 "이제 아버지 놓아드렸으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패했다.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고 했다. 이명박 후보는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이어 과거사 문제로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2012년 12월 16일 일요일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선친 1주기 맞아 고국 찾은 박유아 씨(2012.12.17)

“아버지 박태준… 그의 삶은 국가 그 자체였다”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의 둘째 딸이자 미술가인 박유아 씨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현재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그는 13일 박 명예회장 타계 1주기를 맞아 한국을 찾았다. 올해 9월엔 한국 화랑에서 생고기를 자르고 던지는 다소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던 그는 “내 안에 있는 갑옷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시원했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어제 1주기 추도식 분위기가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가족이 일제히 흐느끼는 순간 플래시가 팍 팍 터졌다. 갑자기 무대에 올려지는 기분이랄까….” 약간의 냉소와 관조가 담긴 ‘예술가’다운 답이라고 생각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 박유아 씨(51)를 만난 것은 1주기 다음 날인 14일 오후 서울에서였다. 

“우리의 제사(祭祀)는 보통 사람들 것과는 달랐다. 아버지 산소는 이미 공적인 장소가 되어 버려 지난 추억과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다.”

박 씨와의 인연은 7,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 기자를 하던 시절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그와 인연이 되었다. 그는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한 중견 작가였지만 뭇사람들에게는 작품 이전에 ‘누구의 딸’로 알려져 있었던 터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굉장히 부드러운 분

그는 ‘유명인의 자녀’ 하면 떠오르는 ‘공주병’ ‘잘난 체’ 같은 것이 없었다. 소박하고 소탈했고 유쾌했다. 다만 간간이 “아버지 인생에 우리 가족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큰 바위 얼굴’을 지켜야 했던 가족의 마음고생이 있었음을 짐작하곤 했다. 지금은 좀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평소 인터뷰를 마다했던 그와 마주 앉았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끼는데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아이들도 좋아하고. 예술가 기질도 많아서 그림도 잘 그렸다.”

―화가 나면 구둣발로 직원들 조인트(정강이뼈의 속어)도 걷어찼다던데….

“그 사람이 미웠다기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을 거다. 아버지는 우리(포스코)가 하는 일이 대한민국 선조들의 피 값이라고 생각했다.…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기도 했다. 남 이야기를 경청하고 틀렸다고 생각되면 바로 인정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교류하나 할 정도로 인간관계도 넓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연합을 할 당시 일본에 머물던 아버지를 찾아왔다. 5·16세대에게 DJ는 빨갱이 소리 듣던 사람 아니었나. 그러나 아버지는 흔쾌히 만났고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해 대화가 잘됐다고 하셨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은 진정성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분이다. 완벽하면서도 매력 있는 남자였다.”

―(박 회장이) 어떻게 포스코를 맡게 됐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직후 아버지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했다. 아버지는 ‘정치인은 당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나는 내 의견과 당론이 다르면 움직일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박 전 대통령도 그 말을 수긍했고 포스코를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생전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눴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 씨는 “엄마로부터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괴로움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나.

“지나가는 말로 ‘힘들다’ ‘피곤하다’란 말을 툭툭 던지긴 했어도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하긴 싫다 해서 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버지의 삶은 국가,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나. 

“살아계실 때도 굉장히 불쌍했다. 당신 삶이 하나도 없었다. 내 경우엔 나이 들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에 집중하는데 그럴수록 아버지만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없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인간의 몸은 쉬어야 충전이 된다. 아버지는 쉼이 없었다. 한계를 넘어 혹사했다. 하긴 그 세대는 정신력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했던 세대이니까. 그래서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 정말 싫다(웃음).”

―가족으로서 심정은 어땠나.

“집안 구성원 자체가 아버지의 일을 위해 있는 사조직이었다(웃음). 우리 가족의 모든 가치 판단은 ‘아버지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식당 가서 음식을 사먹는 일부터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모든 행동이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했다. 완전히 부속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공적인 일이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

“말(言)을 배우면서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서 아버지 일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할 사이도 없었다. 하신 일이 후대에 평가를 받아서 다행이라고 할까(웃음). 만약에 정당하지 못했다면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결속력이 더 강해졌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나라 것”
―자기 절제나 관리가 정말 대단하셨던 분 같다.

“한마디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정말 눈곱만큼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편찮으실 때도 그랬다. 평생을 ‘내가 국가다’ 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니 몸이 아프다고 습관이나 생각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엄마도 그렇고. 부부가 똑같았다.”

―그렇게 완벽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행운인가. 

“숨이 막히지.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자식 키우면서 생각하는 건데, 부모는 좀 망가져 줘야 한다(웃음). 자식이 좀 가까이 갈 여지가 있어야지.”

―인간이란 게 물욕의 동물인데 살던 집도 기부하고 마지막까지 전세 살다 돌아가셨다. 

“도통해서가 아니라 가치가 좀 달랐던 것 같다. 돈은 내가 쓸 정도만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기업을 일으켰지만 사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상주의자였다. 모스크바대 총장이 포스코를 돌아보고는 레닌 동지가 꿈꾸던 이상향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지막에 아들 집에 들어가 사시려고 했는데 이사를 3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원래 집 없이 사셨다. 5·16 직후에 내가 태어났는데 육영수 여사가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가 너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박 대령이 어떻게 집도 없이 사느냐’ 하셔서 박 전 대통령이 마련해준 게 북아현동 집이었다. 막내 남동생을 빼고 네 자매가 모두 결혼해 나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살림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계를 책임지던 엄마가 동대문시장에 손바닥만 한 가게를 사서 몇십만 원 월세 받아 생활에 보탰는데 그게 나중에 ‘동대문 상가 한 동 전체를 남의 명의로 갖고 있다’고 기사가 나오더라.(잠시 말이 끊겼다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극단적으로 몸조심하며 살았다. 친척들은 포항제철이 있던 포항 기차역에도 내리지 못했는데… 차라리 잘못한 일이면 괜찮았을 텐데. 억측과 모함이 너무 억울해서 자살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억울하다고 분개할 일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며 총리 직을 던지고 바로 집을 팔아 전세금만 빼고 나머지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왜 하필 아름다운재단이냐고 여쭸더니 ‘시민단체가 힘을 가져야 사회가 균형이 생긴다. 견제세력이 있어야 정치권이 마음대로 못한다’ 하셨다. 그러고는 평생 전세를 사셨다.”

러 대학총장 “포스코는 레닌이 꿈꾼 이상향”

―아버지의 임종을 못했다고 들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연말에 비행기표를 예매해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8시쯤 동생이 ‘조금 빨리 오는 게 좋겠다’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밤 비행기를 못 잡고 다음 날 낮 12시 비행기를 예약해놓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인공호흡기를 뺐는데 숨이 남아계신다는 말을 언니한테 전해 듣고 나를 기다리시는구나 생각했다. 뉴욕 집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속보를 보면서 ‘기다리지 말고 편안하게 가시라’고 나만의 임종을 치렀다.”

―‘아내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들었다.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박태준 한 사람을 위해 살았으니까. 또 당신의 부재가 엄마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너무 잘 아셨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일 현충원으로 출근하신다 해서 걱정했는데 그게 엄마 나름의 치유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말릴 수가 없었다.”

―80년 민주화 세대다. 아버지와 의견 차이는 없었나.

“내가 81학번인데 데모가 연일 이어져 1학년은 거의 다니지를 못했다. 나는 미술 전공(이화여대 동양화과)이어서 그냥 조용히 학교를 다닌 편이었다.”

―그래도 운동권 학생들이 겨냥하는 대상이 아버지 세대였다면 좀 혼란스럽지 않았나.

“당연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느끼셨을 테니. (내가) 나이 먹어 갈수록 아버지가 생전에 많이 외로웠을 것이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태준의 딸’이 아닌 ‘박유아의 삶’

―어렸을 적,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특권층이라기보다 남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가 베푸는 걸 좋아하는 성향을 물려받은 것도 같고. 겨울에 나는 두꺼운 새 스타킹 신고 등교하는데 친구들은 헌 스타킹 신고 오는 것을 보는 것도 미안했다. 중학교에서는 남들보다 반찬이 많은 도시락을 꺼내놓기가 민망해 스트레스가 심했다. 중학교가 판자촌 근처였는데 학비 못 내는 친구들 사정을 엄마한테 이야기해 도와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이것을 애들 앞에서 말해 버리는 것 아닌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남 돕는 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은 재벌집 딸로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 가족은 재벌이 아니다. 아버지도 창업자라고는 하지만 월급 사장이었고. 포스코 주식을 국민주로 바꿀 때도 ‘나는 한 주도 안 갖는다’는 게 원칙이었다.” 

박 씨는 올해 9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화랑(옵시스아트)에서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부모 형제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칼로 썰고 던지며 피를 묻히고 거울을 깨는 행위예술이었다. 박 씨는 퍼포먼스 제목을 ‘효(孝)’라고 했었다. 

―당시 나도 지켜봤지만 좀 파격적이었다. 왜 그런 퍼포먼스를 했나.

“나를 발가벗기고 싶었다. 단단하게 두른 갑옷을 벗어던진 것 같아 시원했다.”

―하필 제목이 왜 ‘효’였나.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나’를 던져버리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기자에겐 이 말이 ‘박태준의 딸’로서가 아닌 이제 ‘나, 박유아의 인생’을 살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버지 박 명예회장도 무덤 속에서 그걸 가장 원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