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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8일 월요일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2013.01.28)


[신년특집대담]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편

삶/고통, 죽음 등은 종교의 출발이요 종말이라 할만큼 종교적 담론 안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들이다. 이러한 주제들과 관련해 종교들은 앞선 성인들의 문답에 근거해 각기 나름의 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답들 중에는 삶의 다차원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 혹은 전체성이란 이름으로 신앙하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억눌러 왔던 것들도 분명 있었다. 종교가 때때로 인간 해방, 즉 인간 구원이 아닌 인간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본지는 계사년 신년특집으로 그간 신앙인들이 비판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심없이 수용했던 삶/고통, 죽음 등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종교의 종교로서의 제 자리 찾기와 더불어 인간 해방의 길에 작은 등불을 비추고자 하는 시도다. -편집자주

▲대담은 지난 23일 오후 4.19 공원 앞 작은 찻집에서 진행됐다. 좌측부터 김진한 편집국장과 신학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 개인의 도덕적 악, 사회 구조적 악 나아가 자연적 악 등에 의해 고통으로 점철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사회가 아닐까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고통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하려 합니다. 하나는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 소급해 해명하려는 인과율적 해석을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겪는 고통을 수단, 즉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일 것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 해석 모두 현재 겪는 ‘고통’의 실체를 자칫 은폐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떤 것을 적용하고자 한들 인간 ‘고통’의 현실이 온전히 극복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이번 대담의 큰 주제가 신학, 종교학, 철학 세 분야에서 인생 속에 있는 고통, 고난 그리고 그것의 극점인 죽음을 주제로 한다니까 관심이 많습니다. 그 주제를 놓고 볼 때 사실 나는 신학의 영역이지만 종교학과 철학과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수신학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전 그 주제가 좋다고 본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 전체는 소위 웰빙의 바람이 불어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잘먹고 잘사는데 초점이 놓아지고 있습니다. 종교 영역까지도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메시지가 주로 축복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요. 소위 삼박자 축복이 대표적으로 말하고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가 성서 메시지의 일부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 정신적, 영혼적 행복과 밝은 면만을 너무나 말을 많이 하고 실질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엄존하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 관한 설교나 메시지는 별로 하질 않고 있어요. 종교 내지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런 문제를 도리어 기피하고 도피하려는 무의식에 종교마저도 거기에 아부를 한다고 할까. 호응을 하는 것이어서 건강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주제로 생각을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까 질문에서 악이라는 말을 쓸 때, 즉,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의 근원, 어디서 악이 나오느냐고 할 때 개인적 악의 체험, 사회 속에서의 악의 체험, 자연 속의 악의 체험이란 말을 했는데 이게 전형적인 기독교적 발상이라고 봐요. 악은 선의 반대 개념인데 선, 악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그 속에는 이미 가치와 의미가 들어있잖아요. 더 나아가서 의지적 요소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자연에서 우리가 악을 말할 수 있는가? 자연의 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화산이나 대홍수나 쓰나미를 통해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겪을 때 그것이 신의 진노나 징벌이라고 쉽게 해석을 한다 할지 이런 것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선악의 이분법이라든지 인격적인 자신의 사고습관을 자연에까지 투사해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는 악이 없어요. 자연은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일 뿐이죠. 홍수가 나거나 쓰나미가 나거나 화산이 터지면 크리스천도 무슬림도 무신론자도 다 재난에 휩쓸리니까요. 일단 자연 속에는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라고 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인간이 자연의 영역까지 관여를 해가지고 그것을 통제하고, (우리가 자연의 분노라는 표현을 쓰지만)재난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 자연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악을 추구하면 결국 인간의 어떤 의지와 도덕적 책임 문제가 거기에 따르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야 이해를 할 수 있으나 일단 자연 그 자체는 악이 없다고 봐요. 동양 고전에서도 그래요. 천지인은 불인하다. 인간은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고 보지만, 하늘과 땅,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것이거든요. 옛날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지푸라기로 사람 형상을 따가지고 제사를 지낸 뒤 제사 끝내면 그 사람 모습의 지푸라기가 길바닥에 버려지고 태워지듯이 자연은 설혹 (지푸라기가)사람일지라도 그들과 똑같이 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여하튼 그렇습니다.

▲김경재 교수는 본격적인 대담을 진행 함에 있어 대전제를 깔고 시작했다. 전제인 즉,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가 썼던 명제인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일단 말씀하신 것 속에서는 두 부분이 중요하네요. 사회적, 개인적 악이 어디서 왜 발생했느냐 하는 원인을 캐내서 그것이 인과응보적 사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 원인을 캐들어가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악을 극복하려는 입장과 미래지향적인 것을 얘기하셨는데 그것도 악을 극복하고 해석하려는 하나의 인간적인 종교적인 심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인간이 악과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나의 목회 경험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납득할 수 없다는 데서 제일 큰 고통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적으로라도 설명이 되면 좀 고통이 덜해요. 아무런 설명과 이해가 안되는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이 겪는 고통의 아픔은 배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율적인 과거 원인 규명적인 고난과 고통의 극복이나 미래지향적 사고나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인 통찰이고 지혜죠. 전 그 점에 있어서 동전의 앞, 뒤와 같이 둘다 다 귀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겠지만, 언어에 있어서 고통과 고난이란 말이 혼재가 되는데 나는 고통보다는 고난이 종교적으로 더 적절한 말이라고 봐요. 고통은 글자 그대로 고가 올때 우리가 느끼는 통증을 말하는 것이고. 굉장히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고난은 고가 올때 난처한, 험난한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니까요. 가령 함석헌 선생이나 간디는 이렇게 대명제를 설정했어요. "생명이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 이것이 오늘 나의 대담 전체의 제1명제로 받아들여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탐욕과 욕심과 개인적인 집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고 그것이 폭력으로 변할 수 있지만 하여튼 생명으로 존재를 하려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고난이나 고통이란게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대전제로 하고서 둘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봐요.

일부 기독교인들 고난의 책임 신에게로 돌려
고통·고난에 대한 도피주의 행태 지적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먼저 고통과 고난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선의 힘과 악의 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으로 말하자면 선신과 악신이 있어서 사탄의 파워와 성령적 파워의 아마겟돈적인 전쟁의 결과로 악과 고통이 우리 개인과 사회 속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 책임과 공동체 책임을 못 보는 결론에 떨어지게 됩니다. 또 고통과 고난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가벼운 사고는 고난, 고통 도피주의를 발생시킬 수 있고, 외부에 신에게 운명에게 역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그저 내 책임은 없고,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고난의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라는 무의식적인 자기 도피를 일으키게 한다고 봐요.

또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한 것은 왜 그러냐고 할 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난이 발생한다고 봐요. 우선 인간이 인격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데 있어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증식하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되 진, 선, 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보다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그것이 좌절되는 어떤 힘 앞에서 고통과 고난을 느끼는 게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생물학적 고통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반 동물하고 똑같겠죠. 일반 동물도 병에 걸리면 통증을 느끼듯이 인간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통증을 느낄 수 있죠. 물론 그런 고통도 고통이죠. 근데 그런 고통 이외에 고통을 안당해도 될만한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고, 고통이 타자에 가해져서 받는 고통과 고난이 있는데 여하튼 고난과 고통은 단순한 인간이 단순한 생물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발돋움 때문에 거기에 부딪히는 역풍이 고난으로, 고통으로 감지된다는 것이에요. 공기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치는 것은 공기의 이동 때문에 내가 공기를 저항해서 힘있게 앞으로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공기의 저항을 받듯이 생명 혹은 창조 질서 속에는 우리가 신앙고백적으로 말하면 본래적인 창조 질서 혹은 생명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혹은 누적된 역사에 의해서 그것이 뒤틀려지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 가운데서 오는 고통, 그것의 누적이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고통. 이런 것이 인간의 고통사 속에서 훨씬 더 크다고 봅니다.

가령 근대사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해 위대한 삶을 살아왔던 모든 분들도 편안하게 자연에 순응해서 살려고 작정했더라면, 그 분들이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되죠. 그 분들이 민족이네 나라네 독립이네 국가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뜻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저항하고 극복하고 보다 바람직한 생명 질서로 회복을 하려는 몸부림 때문에 고난이 그들에게 오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은 그런 인간의 가치와 의미 추구, 뜻 추구, 의지적 결단 문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인간은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일 수 있는 양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말이죠. 그것을 봐야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말로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으로는 고통은 중립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엄존해 있는 고통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가 연꽃 위 평화로운 미소의 고다마 붓다와 십자가에서의 일그러진 얼굴의 예수상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고난·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의 말을 빌려 "이 두 상징이 고난을 대하는 종교의 두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거기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불교가 말하는 불국토(佛國土)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불교의 근본 종지를 꿰뚫고 보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인간의 아집과 집착 때문에 생긴다고 봐요. 불교가 말하는 삼라만물의 인과연에 인해서 모든 만물이 관계되고 발생하고 생기는 인연생기법을 꿰뚫어 직시하면 그것이 해탈인데 해탈을 해버리면 사회 속의 불의한 구조나 제도나 악의 현실이 있더라도 그것에 매여서 좌지우지 당하지 아니하고 초탈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쪽으로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불교쪽에서는 말이죠. 불교를 나타내는 상징 중 연꽃이 있습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마치 연꽃이 뿌리를 내리는 더러운 오물 밑바닥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기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요. 또 물결이 출렁이는 역사의 시간의 소요와 요동에도 물들지 말고,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로 수중을 뚫고 나와서 수면 위로 연꽃을 피우란 말이거든요. 인간의 삶은 그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면을 존경하면서도 연꽃이라는게 뿌리가 건강하지 못하고 줄기가 통과하는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꽃도 아름답게 필 수 없으니까 연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우지 못하게 하는 병든 토양, 병든 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죠. 고통과 고난의 현실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고요한 명상과 선적 수행을 통해서 고난과 고난의 현실을 도리어 터득함으로써 일체의 소요로부터 자유로워라 하는 마음의 평정, 마음의 해탈 못지 않게 고통의 현실을 일으키는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악의 요소를 제거해서 지금 고통 당하고 있는 생명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내 마음의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는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표현을 해요. 늘 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위 샬롬적인,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생명 현실을 지향해서 노력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보죠. 그래야 할 당위적인 세상, 당위적인 생명 상태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쪽이 더 강한셈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해나가는 속에서 더욱 고통과 고난이 증폭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하죠. 이야기가 너무 형이상학적 쪽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불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고다마 붓다는 연꽃 위에서 고요하게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미소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불국사의 불교의 상징이 연 위에 앉아있는 해탈하는 고요한 평화의 모습이죠. 반면 기독교는 33세의 젊은이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고 고통당하는 십자가 고상을 종교적 상징으로 삼았단 말이에요.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런 표현을 썼어요. 고다마 붓다의 연 위에 앉아 있는 미소의 포즈,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고난의 포즈. 두 포즈는 인간의 종교의 두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여하튼 기독교는 고난의 현실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적인 창조의 축복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악에 의해서 축적되고 형성된 비생명적 폭력과 억압 앞에서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종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뚜렷해요.

얼마 전 폴 니터가 와서 불교 대표와 대담을 했는데 거기서도 분명히 드러났거든요. 양쪽에서 서로 존경하고 배울 것은 배우지만 서로간 특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한국 기독교는 대단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라고 말은 많이 하는데 한국인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교육현실, 생계현실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고난 극복의 노력, 고난을 유발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집단적 폭력과 은폐된 악에 대한 저항의식이 대단히 약화된 개신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종교가 소위 부르주아화 해 가고 우리만 행복하고 축복 받으면 됐지 하는 것에 머물러서 입니다. 삶 속에, 생명 속에 고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려는 성서적인, 예언자적인 정신을 소홀히 한게 아닌가 합니다.”

- 숙명론을 조장하여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 종교적 가르침을 말하자면 통상 사장되었다고 보는 카스트제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도에 가서 절감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는 위대한 종교 국가요, 철학의 국가로 아는데 현실적으로 인도를 가보면 불교를 탄생시킨 나라에 불교는 거의 없구요. 통속적인 힌두교와 전통적인 일종의 무속종교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종교 속에서 (이미 헌법이나 지성사에 의해서는 극복되었다 정복되었다고 말하는)고대 브라만족의 카스트제도가 생활 속에 너무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려가지고 인도 사회가 정말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려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들은 굉장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데 인도 인구 10억 중 3,4억은 사실 너무나 비참해요. 그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오늘날 인도 사회 뉴스를 보자면 버스 속에서 여학생을 겁탈하는 강간 사건이 자꾸 터져서 인도 사회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명 국가라는 나라에서 왜 그러는 것일까요? 사회 구조적인 인간악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거든요. 인도 사회를 그렇게 만든 근본을 보니까 카스트제도의 업보설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더라구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업보의 결과를 통해 윤회하는 과정이니까. 내가 오늘 카스트제도 맨 밑바닥의 가정에 태어나서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모든 이런 고통과 고난을 받는 것은 자기 생애의 과거가 그랬든지 지난 조상들이 그랬든지 그런 업보 때문에 지금은 이 시대에는 그것을 감내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어요. 말하자면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죠.  

“복음의 힘,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 고리 끊어내”

▲김경재 교수는 과거가 현재를 완전히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숙명론적 폐쇄적 인과율을 끊어내는 힘이 바로 “복음의 힘”임을 역설했다.
그래서 종교가 잘못 가르치면 그렇게 되어버려요. 아시아 종교들 중 상당수가 현재 인간의 개인과 가정과 집단에 내리 덮이는 소위 악의 힘, 고통과 고난을 운명과 숙명론으로, 조상의 탓으로, 종교적 업보설로 그것을 그저 인내하도록 가르치는 그런 요소가 없지 않아 있는데 나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깨트려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그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정적 요소가 창조 질서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돼요. 조금 있다가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이나 집단적 지배 욕망 등이 증폭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김으로써 타자에게 고통과 악을 가중시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이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초대 우리 한국 기독교의 태도가 옳았다고 봐요. 사주팔자도 부정하고, 아무튼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역사를 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가 현재를 완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그것을 끊어내는 힘이 복음의 힘이라고 말이죠. 새로운 생명 질서를 창조해야 하고 악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뚜렷하게 자각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봅니다.”

- 지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뿌리깊은 업보설, 인과응보적 사고를 끊어내는 것이 복음의 힘이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성서에서 소개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제3의 답변을 주십니다. 현재 겪는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적 해석을 폐지하신 것으로 봐도 될까요? 

“중요한 점인데 소위 도덕 세계나 윤리학이나 종교학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이 인과응보설인데 모든 종교 속에 그것이 있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을 제공하는 행동과 생각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과가 생기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인과응보의 사상 속에는 인간의 도덕적인 선악 행위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절대자 신, 브라만, 부처님, 염라대왕이 있어서 그런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마치 판검사가 다 조사를 해서 기록에 남겼다가 죽은 다음 사후에 그에 대한 죄값을 선고를 내린다. 이런 관점에서 인과응보란 그에 응하는 보답 혹은 보복을 한다는 의미로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 신구약 성경을 보면 인과응보적인 요소에서 살려야 할 점은 살리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서 전통 신앙에서는 쭉 흘러 내려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이 문제를 가장 고민한 것이 지혜문학 욥기죠. 욥기서의 핵심은 왜 선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과 행복을 보장하는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대로 철저하게 준행해서 사는 사람이 더 비극과 고통을 겪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없는 것 같이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 더 잘먹고 잘사느냐는 것에 대한 질문이거든요.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욥이라고 하는 가정의 파산을 통해 드라마로 희곡화 한 것이죠. 욥의 세 친구가 나타나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욥 너 자신이 깨끗한지 모르지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네 자녀들이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은게 있지 않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네가 자신만만하고 깨끗하다고 절대 선하고 옳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다. 뭔가 네 가족이나 자녀 속에, 오늘 네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말하자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란 합니다. 끝까지 인과응보론을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 논리를 가지고 추궁해 들어가는 거에요.

‘고통’에 대한 인과율적 해석 폐지해야 하는가?!
조건 지어진 인간의 특수성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

그런데 욥이 저항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돌아가신 문익환 선생에게 구약신학을 배운 것 중 사실 그거 하나만 남아요. 욥은 친구들의 비난을 거절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내가 깨끗하고 선하고 내 자손들이 흠없는 데도 고통을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차원은 한 단계 높은데 가정의 고통과 고난을 과거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라요. 그게 묘한 면이 있죠. 뒤집어서 말하면 욥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과거의 죄를 꼬박꼬박 다 기억해 가지고 아주 엄정한 대심문관처럼 판검사처럼 연약한 피조물들의 죗값을 꼬장꼬장 묻고 따지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다른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를 지금 당장은 모르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 가죽의 옷을 벗어버린 다음에라도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한번 여쭤보겠다는 것이 욥기의 핵심이란 말이죠. 다시 말하면 인과응보설을 완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한계를 설정하고 고난이 인간 삶 속에 있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인과응보 이상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예수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이야기 말하고자 함 아니겠어요.
문익환 목사는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지막에 욥이 종교적 신비체험을 하는 찰나의 순간에 왜 나의 가문에 납득이 안되는, 도덕적 합리주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오니까 그의 항변과 질문이 더 이상 질문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이제까지는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어왔고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하나님께 대들고 따졌는데 내가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오니 내가 참회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잖아요. 소위 인과응보라는 것을 오늘로 말하면 인과율입니다. 물리학에서의 원인과 결과에서처럼 도덕적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 인과론이거든요. 종교와 기독교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고난과 악을 인과율적으로 풀어서 해결할 것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 축적된 악, 신의 이름을 가지고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에 대해 보다 인간적 삶을 위한 제도적 실현을 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니까 프랑스 혁명 일어날 당시 루이 14,15세 잘먹고 잘 살았더만. 베르사유 궁전에서 무도회나 열고. 왕권신수설에 근거해서 말이죠. 거기에 성직자들도 야합을 했지요. 신의 이름으로 그 시대 농노들과 대부분의 시민들의 고통과 악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사회 모순으로 터져나온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던 것이죠.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율법이 아닌 은혜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잘 봐야 하는데 너희가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얘기도 있어요. 악을 심는 자는 사망의 열매를, 성령 안에서 심는 자는 생명을 거둔다. 심는대로 거둔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인과응보적 사고가 있다는 것이에요. 예수께서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다 같은 이해죠. 인과응보론의 양면을 봐야 한다고 봐요. 그것은 종교에서 중요한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아까 말한 힌두교의 인과응보가 이상하게 종교적 억압 기제, 이념으로까지 둔갑을 해서 숙명론적으로 카스트 제도란 관념의 이론으로 변질해 버리면 안되겠지만 인간적 사회적 삶 속에서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문명 속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비극에 있어서는 유효한 것이거든요. 예를들면 원시 시대는 자연이 주는 고통이 90%였다면 지금 시대는 거꾸로죠. 인간 역사와 사회가 주는 고통이 90%고 자연 재난은 10%에 불과합니다. 90%의 인간이 저지르고 증폭되어가는 고통의 원인, 악의 원인은 인과적 원인을 살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사회적, 제도적 바른 질서 수립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 속에 정의(justice)라는 요소가 기독교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나 신학에서는 그런 문제만 다 해결이 되면 인간의 삶 속에 고난과 고통이란 것이 없어지느냐. 대표적으로 질병 같은 것이지. 사고사나 말이죠. 자연히 죽음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결론은 그래요. 어제도 나는 설교에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가 스무살 때 넌크리스천 가정에서 갑자기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6.25 직후에 10살 전후로 해서 광주 집에서 머무른 기억이 있습니다. 늦 여름 초가을이 되면 섬돌 아래서 귀뚜라미가 울곤 했는데 우는 귀뚜라미의 처량한 초가을의 소리를 듣던 10살 먹은 소년이 귀뚜라미에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귀뚜라미야. 내가 너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너보다 몸도 크고 머리도 발달하고 지식도 있는데 너는 내가 쳐다 보는 이것을 아느냐" 귀뚜라미가 알리가 없잖아요. 귀뚜라미도 하나의 생명체고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명체가 갖는 생명의 매카니즘의 공통요소가 있지만 소위 진화곡선에서 인간이 도달하는 정신의 자기초월 능력이나 자기성찰 능력 그리고 진·선·미 추구 능력이나 이런 것은 귀뚜라미는 모른단 말이야. 내가 비록 어리지만 인간으로서 도달해 버리는 정신적인 한 단계, 두 단계 높은 차원을 같은 1미터 내지 2미터 안의 동일 시공간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야. 귀뚜라미는 모르죠. 내가 10살때 느낀 것을 70살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생각해요. 내가 아무리 그동안 학문을 하고 성인이 되고 자연과학의 지식을 얻게 되고 등등 다해서 10살때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지식을 쌓았죠. 그러나 현재적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과 우리 삶의 그 구조틀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틀 안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을 하려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나 성경 外 이야기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릴 때도 많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지금 이해하고 규정하고 설명하는 소위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혹은 도덕의 법칙이라고 말을 하든 그것보다 더 크고 넓고, (차원적으로 말하자면)다차원적인 세계인 것 같아요. 귀뚜라미는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 밖에 모르듯이 인간은 날고 뛰어도 시공 4차원의 세계와 인과율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계속)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정리= 이서진 기자]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크리스천투데이]‘WCC 공동선언문 사태’… 에큐메니칼 진영, 기로에 서다(2013.01.18)


[문제의 원인과 방향] “정체성 분명히 하는 입장 표명 필요” 여론 비등

에큐메니칼 진영이 흔들리고 있다. ‘WCC(세계교회협의회) 공동선언문’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이 선언문 내용이 에큐메니칼 신학과 배치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진영을 대표하는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영주 총무의 이름이 들어간 채 발표됐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진보 진영 인사들은 이번 선언문의 ‘화합적 의미’엔 대부분 박수를 보낸다. 문제는 그 선언이 갑작스레 나왔다는 점이고, 선언문이 담고 있는 내용 또한 다분히 -에큐메니칼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종교다원주의와 개종전도 등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진보 신학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단순히 ‘○○금지’라는 말로는 이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진보측 인사들은 NCCK 김영주 총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NCCK는 에큐메니칼 진영을 대표하는 기관이고, 총무는 그 기관의 실질적 수장이다. 그런 총무가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고 선언문에 서명을 해버렸다. 절차와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에큐메니칼 인사들이 분노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이 문제를 두고 ‘구조적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핵심은 ‘보수냐 진보냐’

17일 NCCK 실행위에서 ‘WCC 공동선언문’이 논란이 되자 배태진 목사(기장 총무)는 WCC 총회 준비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는 일부 교단 인사들이 WCC 한국준비위의 직책과 의사 결정을 독점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있다며 분개했다. 이번 ‘선언문 사태’ 역시 그런 ‘구조적 문제’의 연장선으로, 지금과 같은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다시 이 같은 문제가 재발할 것이라는 게 배 목사의 주장이었다.

그의 말처럼 WCC 총회 유치가 결정되고 준비위를 꾸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핵심은 결국 ‘보수냐 진보냐’였다. WCC는 진보 혹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기구다. 동시에 보수 진영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기구가 또한 WCC다. WCC 총회 유치 이후 지금까지 보수 진영에서 끊임없는 반대운동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과 기름’의 관계라는 표현까지 있다.

그런데 WCC 총회 준비위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른다”는 말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옳은 말이지만 현실성 없는 말이기도 하다. ‘연합’ 혹은 ‘일치’를 해석하는 것도 보수와 진보가 제각각인 상황에서 이런 말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에 불과했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불만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행사를 잘 치러야 한다”는 대의명분 때문에 이런 답답함을 억눌러왔다. 이것이 이번 ‘WCC 공동선언문’으로 인해 폭발한 것이다.

그러자 WCC 총회 준비를 에큐메니칼 인사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선 주객이 전도됐다는 말도 나온다. 에큐메니칼 정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이들은 주변에 머물고, 그렇지 못한 인사들이 오히려 전면에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방향은

선언문은 이미 발표됐다. 당사자인 김영주 총무는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그가 NCCK 총무인 이상 문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 배본철 교수(성결대)는 “NCCK 안에서야 이것을 김영주 총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선언문을 함께 발표한 보수측 대표들은 김영주 총무를 개인이 아닌 NCCK, 나아가 에큐메니칼 진영의 대표로 볼 것”이라고 말했다. NCCK를 비롯한 에큐메니칼 진영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충격이 큰 것이며, 사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럼 에큐메니칼 진영 원로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먼저 김경재 박사(한신대 명예교수)는 “NCCK에는 과거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들이 있다. 이것이 이번 공동선언문으로 인해 부정될 수 있다”며 “공동선언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NCCK 차원의 입장 발표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강문규 선생(전 WCC 의장)은 “이제 와서 총회 준비를 새로 해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며 “NCCK는 보수 진영과의 화합 정신은 유지하되 WCC의 본질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 WCC 총회를 단순히 행사적인 면에서만 준비해선 안 된다. 내용이 중요하고 의미가 강조돼야 한다. 그렇기에 준비 과정에서 신학적 탈선만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일단 NCCK에서 WCC 공동선언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로 한 이상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다만 가능한 한 빨리 이것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무엇보다 이번 선언문 발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전 협의와 조정 과정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벌어진 이상 (에큐메니칼 진영이 보수 진영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NCCK가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아울러 서 박사는 “(WCC 총회 준비 과정에서) 에큐메니칼 진영 원로들이 자문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경재 특별기고] ‘WCC 공동선언문’ 사태에 부쳐(2013.01.18)


신학적 메카시즘 극복해야 한국교회 소생할 수 있어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베리타스 DB
지난 2013년 1월1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총무 김영주 목사)와 한기총 대표들이 모여 협의하고 작성하여 발표했다는 소위 「WCC 제10차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양측 진영의 신도들과 관심있는 자들이 모두 비판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1월17일 소집된 NCCK 제61회 1차 정기 실행위원회에서 앞서말한 ‘공동선언문’을 에큐메니칼 정신에 반하는 “쓰레기 같은 문서”라고 혹평하고 실행위원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지도 못했다고 전한다(베리타스뉴스, 「NCCK 실행위, “WCC 공동선언문, 쓰레기 같은 문서”」 2013년 1월 17일자).

적어도 NCCK에 참여하는 각교단과 기관 대표들이 참석하여 법적 권위를 대표하는 정기 실행위원회에서, 김근상 NCCK 의장은 조속한 시일 안에 앞서 언급한 ‘WCC 공동선언문’에 대한 의장명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각교단에서 2인씩 선정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WCC 공동선언문’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책임질 사람은 지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매체는 전하고 있다.
 
공동선언서 문서에 서명한 4명의 대표자 한 사람인 김영주 총무 스스로 ‘절차와 과정을 지키지 못한 점’과 “생각과 용기가 부족해서 그 경계선을 바로 설정하지 못했다고”고 자책하고, 사과하는 이 해괴한 문서의 출현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를 성찰하게 만든다. 사태에 관련하여 적절한 종결을, 김근상 의장이 언급한대로 NCCK에 참여하는 각교단의 위임받은 인사들이 모여 하루 속히 내리기를 바란다. 공식적인 NCCK 기관대표들의 종결처리를 조용히 기다리기엔 이 문제의 본질이 자못 심각하기 때문에, 핵심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가 신학자로서 감히 한마디 하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문제의 본질은 두가지다. 한 가지는 한국 기독교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는 ‘신학적 메카시즘’이요, 또 다른 한 가지 문제는 돈많이 가진 자가 진리를 좌지우지하는 ‘불편한 진실 맘몬니즘’이라는 교계 현실이다.
  
‘신학적 메카시즘’이란 1950년대 미국 정치계를 공포과 광기로 몰고갔던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J.R. McCathyi)가 주동이 되어 미국정계와 사회에 일으킨 ‘묻지마식 공산당 사상검증 테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1950년대 세계 냉정시대의 미소대결 상황에서 일어난 정치이념 사상검증 선풍은 미국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가 있고 그 명단을 갖고 있다는 근거없는 폭탄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정치계만이 아니라 경제계, 언론계, 학계, 심지어 자연과학자들에게까지 ‘공산당 스파이’ 혐의를 두어 반론, 토론, 검증없는 검거 광풍을 일으켰고 중국 홍위병사건처럼 인간인격을 무자비하게 매도했다. 그 결과 한동안 미국 정치계와 사회는 지적 경직성이라는 댓가를 치러야 했고, 세계에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결국은 메카시 의원 자신이 비판받고 그 정치적 광기가 소멸되었다.

소위 ‘WCC 제10차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정직하게 2013년 부산에서 개최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와 2014년 서울에서 개최하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사이에 성경관과 신학적 입장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대적 계명보다 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 관점과 해석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피차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조한다는 성명서라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성명서에는 지구상에 살고있는 약 15억명 그리스도인들(로마가톨릭 7.5억 , 개신교와 정교회와 성공회 합 7.5억) 중에서 일부 보수적이고 심지어 근본주의적 신학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교리 항목을 성명서 속에 박아넣음으로써, 화해와 협력의 진정성 마져 의심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의 성명서는 알고 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새롭게 개혁한 세계 가톨릭 신자 7.5억명을 신앙적으로 비판 단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희 문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보면 한국 보수신학 교단 입장과 판연히 다르기 때문이다(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출판, 『제2차 바티칸 공의문헌』605-612쪽 참조).

세계 가톨릭 교인수와 비슷한 숫자를 구성하는 개신교 각 교파와 영국성공회와 동방정교회 교인들 7.5억명 중에서, 아무리 많아도 그 숫자의 1/3을 넘지 못하는 보수적 교인들의 신학입장을 표준으로 삼아가지고, 나머지 지구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신앙 양심을 제약하는 비관용적 폭력적 태도는 ‘신학적 매카시즘’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왜 ‘신학적 메카시즘’을 극복해야 한국 기독교가 소생할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는가?

‘공동성명서’에 나열된 중요한 신학적 어휘들이 충분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없이 그리스도 형제 자매들의 신앙과 인격을 ‘비기독교적, 이단적, 반기독교적, 비복음적인 것’이라고 매도하는 선동언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어휘들을 보면 ‘종교다원주의’, ‘인본주의’, ‘동성연애’, ‘공산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종교혼합주의’ 등등의 어휘들이다. 마치 WCC 회원교단은 큰 이단적 신앙에 모두 물들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경고와 충고를 하는 성명서 같다. WCC와 NCCK가 이번 부산 총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전지구촌 상황에서 생명, 평화, 정의 등의 주제에 대한 공감적 반응이나 긍정적 언급은 한마디도  찾아 볼 수 없다.
 
성경 안에 고귀한 사랑, 진리, 빛, 화해, 용서, 봉사, 감사, 찬양, 기쁨, 치유, 관용 등등 아름답고 위대한 힘들의 어휘는 하나도 없고, 격식적인 전문신학적 혹은 종교적 용어를 내걸고 모든 것을 판단 처리하는 바리새적이고 대심문관적인 접근과 입장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번 문제의 「성명서」 초안자들과 서명자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은 바울이 경고한바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靈)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는 말씀을 무시하고 소홀히 한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어휘를 한 예로 들어보겠다. ‘종교다원주의 담론’이 20세기 후반에 세계신학계 특히 선교신학계에 중요한 의제로 부상한 이유는, 지구촌 시대에서 인류가 각 문명과 지역마다 형성해온 불교, 힌두교, 유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등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 경륜과 섭리 안에서 어떤 자리와 의미를 가진 것인가 신학적으로 연구하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선교를 보다 바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자는 선교적 관심이기도 한 것이다. 세계적인 ‘종교다원론’을 말하는 책임있는 신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종교혼합주의’와 독선적 ‘종교배타주의’ 이다. 130년 전 개신교가 전래되기전 한반도 우리 조상들이 신앙했던 불교, 유교, 천도교, 무교들이 복음과 어떤 관계일까하고 생명을 물려 받은 한국인 후손들로서 진지하게 묻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보수교단 지도자들은 ‘종교다원론’이란 단어는 곧바로 ‘종교혼합주의’를 의미하던지 복음의 고유성과 진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교인들을 그렇게 세뇌시킨다. 문제의 공동선언문 제1항에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라고 명기했다. 도대체 어떤 입장의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종교다원주의 담론엔 다양한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입장을 무시하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배격한다”는 추상적인 주장과 같은 방식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론, 진화론, 동성연애론, 인본주의 등등 특정 단어 한 개를 무기 삼아 대중으로 하여금 지성적 분별력을 포기하고, 보수적 가치의 자기방어적 본능에 충실하도록 선전 선동한다. 지난해 12월 대선정국에서 진보적 성향의 국민들 (유권자중 48.6%)을 소위 ‘좌빨, 종북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인양 몰아부친 보수적 언론과 여당 정치선전인의 행동과 ‘신학적 매카시즘’은 꼭 닮게 작동한다. 

순진한 교인들로 하여금 정통신앙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예 신앙적 전염병균이 옮기는 것을 피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개방된 한국사회 속에서 보수적 기독교는 점점 ‘소통 불가능한 종교동굴 속에 갇혀있는 집단’으로 스스로를 왕따 시켜버리게 된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WCC 안에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교회 대표가 회원으로 참석하고 있으니 WCC는 “빨갱이 용공 종교집단”이라고 과거에 악선전 했다.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신도나 신학자나, 도대체 그 누구가 성경의 귀중함과 말씀 속에 깃든 영감성과 영원한 구원의 능력을 의심하겠는가? 그런데, 그와 같은 성경사랑과 성경의 영감성 인정을 반드시 「공동성명서」제4항에서 규정한 것처럼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무오하며,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임을 천명합니다”를 수용하는 특정신학적 입장과 똑같아야 한다고 단정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1950년대 정치적 메카시즘이 ‘양날검’이 되어 마침내는 메카시 상원의원 그 자신을 파멸시켜 버렸듯이, ‘성경문자무오설’은  21세기에 복음선교의 길을 도리어 어렵게 만들고, 복음의 전도자들을 광기와 광신으로 몰아가는 배타적 전사들로 만들어 버릴 위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오늘도 명동 거리에 나가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팻말을 들고 확성기를 이용하여 행인을 겁주고 이웃종교를 비난하는 전도자(?)를 만날 것이다. 문제의 「공동선언문」 이 타종교 동네에 널리 알려지고, 한국 지식인들 사회에 알려지고,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들은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독선 독단주의에 절망하고 소통과 대화의 기대를 접어버릴 것이다. 그 결과를 장기적으로 예견하면 30년후 쯤 한국 기독교인 교세는 300만명 정도 감소할 위험을 내포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교계에 문제가 된 「WCC 제10차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사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는 ‘신학적 매카시즘’ 극복이라는 생각임을 필자는 금할 수 없다. 거듭 바울사도 경고를 경청하여야 한다. “의문은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 . 교리논쟁, 신학적 입장, 성경해석의 입장, 21세기 현실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 등은 최상의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 어떤 한 입장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스스로 대신문관이 되려는 영적 교만 행위이다. 소위 문제가 되고 있는 「공동선언문」안에는 ‘생명과 사랑의 복음’은 안들리고, ‘경직된 교리와 근본주의적 신학체계’만 들린다고 말하는 필자의 귀가 정녕 잘못된 것일가? 차라리 그러기를 빌고 싶다. 

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신년칼럼] 패배가 아닌 실패, 퇴보가 아닌 진일보(2012.12.31)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소진증후군을 극복하고 냉철함을 되찾아야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베리타스 DB
흑룡의 해라는 격동의 임진년이 지나가고 2013년 새해가 시작된다. 대선 이후 한국사회의 진보진영 안에 신경성 질환 같은 ‘소진증후군’이 열흘 남짓 한반도를 전염병처럼 휩쓸더니, 이제 조금씩 조금씩 절망의 저기압권을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일에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다가, 기대하던 그 일이 갑자기 실패로 끝나던지 아니면 심리적, 정신적인 극도의 누적된 피로감 때문에 무기력증, 자기염오, 직무거부, 열정상실, 의미상실 감정 등 소위 말하는 심리적 붕괴(멘붕)를 경험하는 정신질환 증후군을 말한다.
 
신문도 TV도 보기 싫고, 누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싫고 받기도 싫다. 신경은 민감해지는데 일에 집중력은 떨어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짜증도 잘나고 이유없이 가까운 집사람에게 화도 낸다. 정권교체 실현운동에 앞장선 열심도 내지 않았던 필자도 열흘 남짓 ‘소진증후군’을 앓았는데, 하물며 이번만은 새 시대, 새 정치, 새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고 온몸을 던져 헌신한 문재인 후보자를 비롯한 민주인사들, 그리고 새 정치 출현을 앙망하던 시민들과 기독교계 진보적 신앙인들의 ‘멘붕’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가 생각하면 ‘소진증후군’이라는 신조어 심리학 용어가 현실적으로 실감난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소진증후군 병리현상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않된다. 지나친 오랜 기간 동안 그 증후군에 빠지면 정말 병자가 된다. 극단의 경우엔 절망적인 삶의 포기에 이르기도 한다. 대선결과 이후, 4명이나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사회 양극화 현상의 심각성이 얼마나 극한적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가의 표징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살라고 하는 지고한 명령이다. 경박한 현실수용이나 비겁한 현실타협이 아니더라도 다른 제3의 길이 있다.

패배가 아닌 실패, 역사퇴보가 아니라 진일보

정권연장과 정권교체 양단간 싸움에서만 보면 2012년 대선결과는 한국의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승리요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인 민주통합당의 패배라고 말한다. ‘대권투쟁’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 선거방식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정치철학엔 그 나름대로 논리와 명분이 있겠지만, 유권자 51.6 % 획득정당은 승리요, 48 % 득표정당은 패배라고 부르는 용어자체를 필자는 받아드릴 수 없다. 이것은 완전히 ‘승자독식’의 정글의 논리이지 민본주의 논리는 아니다. 진보세력은 집권에 실패한 것이지 정치적 이념이나 비전이나 미래의 희망의 씨앗 뿌리기에서 절대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실패’(失敗)란 일이 뜻한바 대로 되지 못하거나 그릇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한다. 실패의 반대는 성취이거나 성공이지 패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패배(敗北)란 싸움이나 겨루기에서 짐으로써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다. 패배주의가 더욱 해로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구별해두자.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은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 혹은 시대교체에서 실패한 것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실패와 패배를 혼동하면 유권자 48%라는 절반 가까운 깨어있는 시민의 정신과 성의와 열망을 너무나 쉽게 짓밟고 무시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려는 그분의 뜻이 그 당시 현실조건에서 당장은 ‘실패’로 보인 것뿐이지 사실은 실패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패배’란 더욱더 아니다. 예수가 정말 실패했거나 더욱이 패배했다면 숨을 거두며 “다 이루었다”(요19:30)는 선언은 패배자의 구차한 자기변명이란 말인가?  필자는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한 이유를 철저하게 성찰하고 바르게 원인 분석하는 일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패배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절대금물이라고 본다.
 
자기 밥그릇과 부동산값 하락과 투자주식의 주가하락을 염려하여 보수정권의 집권연장을 선택한 50-60대 유권자들의 현실적 욕망과 집단이기심을 ‘대의’(大義)와 ‘공의(公義)’로서 설득해내지 못한 정성의 부족은 진보정당이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타협하거나 아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을 마치 ‘현실정치 감각 부족’이라고 자괴하는 자기기만을 저질러서는 않된다. 정치정당은 그렇게 할런지 모르지만 진보기독교 집단은 다수 대중의 뜻이 반드시 옳거나 천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예언자정신은 대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대선 실패결과를 놓고 마치 역사가 방향을 잃고 후퇴하였다고 섣불리 단정한다거나 역사엔 뜻이 없고 오직 양육강식의 힘의 논리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역사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자세히 보면, 정당정치중심에서 집권투쟁에서 분명히 실패했지만, 역사는 분명히 지난 대선 기간중 한발자국 앞으로 전진하였다.
  
2012년 1년 동안 한국 언론계(MBC,YTN,KBS,국민일보)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장기간의 언론노조투쟁이 있었다. 똘똘 뭉친 수구보수언론의 집단적 마취약 투여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잃지 않고 정권교체와 시대교체와 정치패러다임 전환을 주체적으로 참여하면서 뜻을 모아준 1480만표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해석해서는 않된다.
  
말이야 바르게 말하지만 김대중정권이나 노무현정권의 집권방법처럼 보수와 진보정당의 합종연횡(合從連衡) 결과물도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의 출현을 갈망하는 자생적 안철수 지지 시민세력과 민주진보세력의 ‘대의와 미래역사 비젼’에 대한 공감대로서 이뤄진 정치연합운동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퇴보나 역사방향의 실종이 아니라 비록 집권엔 실패했지만 역사의 뚜렷하고도 의미 깊은 ‘진일보’(進一步)로 보아야 한다. 역사과정엔 우연은 없다. 향후 5년 후에 또 한 번의 변혁을 시도한다면 1480만명의 역사의 진일보를 전진시킨 그들의 살과 혼 속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수구언론의 자기반성 없고, 기회주의자를 내세운 국민대통합의 문제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재집권 일등공신은 개인이 아닌 한국의 수구보수언론 단체들임을 깨어있는 씨알들은 모두 알고 있다. MB권력은 보수정당의 집권연장을 위해서 지난 5년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장악에 공을 들였다. 필자는 대선결과를 심층분 석하는 정치학자나 정치가들 그리고 사회저명 인사들의 집단좌담 속에서 ‘한국 수구언론 권력집단’의 공과에 대하여 아무런,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에서 언론인으로서 재야지도자였던 함석헌 옹이 어디에선가 말하기를 오늘날 언론의 사명과 영향력은 중세기 종교가 하던 일을 감당할 만큼 중요하고 지대하다고 했다. 동시에, 그러므로 언론의 타락과 권력야합과 여론조작과 국민기만은 국민의 판단능력에 혼동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의 두뇌 속에 서서히 마취약을 투입해서 정상적 판단을 못하도록 만드는 마약상 같은 천인공노할 반인륜적 기능을 한다고 혹평한바 있다. 

어차피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해서 집권당을 결정하는 한국의 현질서 에서 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당선자 박근혜님에게 두 가지만을 진심으로 권고하고 싶다. 진정으로 국민대통합을 이뤄보려 한다면, 새누리당의 집권의 일등공신인 수구보수 언론기관을 국민전체의 눈과 귀가 되도록 제자리로 돌려놓도록 하시라. 문재인씨를 지지한 유권자의 48%를 다분히 ‘친북성향, 좌빨 집단’이라고 너무나 쉽게 몰아붙이는 수구보수언론을 그대로 놔둔 채 국민대통합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둘째 권고는, 국민대통합 위원회의 중책자 담당자로서 호남출신 정치인 한모씨와 김모씨를 임명하셨는데, 그러한 인사정책과 주위의 추천 조언자들을 옆에 두고서는 국민대통합은 불가능할 것이다. 앞서 거명한 두 분의 개인적 정치역량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박근혜님을 지지하지 않은 광주시민 유권자 90%중 거의 모두는 국민대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명단을 보고서 박근혜님이, 대선에서 표를 주지 않은 48%의 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지, 알고도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국민대통합을 위한 첫발걸음으로서 화해의 손내밈은 강한 권력에 의해 피해당하고 상처받은 약자들의 집단과 피해자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권력을 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 손을 내밀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진정성을 진솔하게 삶과 행동으로 보이면서 기다리는 일 뿐이다. 더 이상의 적극적 유도나 선도는 강제요 꾸밈이요 선전이요 제3류 연극이 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진보적 기독교계 진영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든 흑백논리, 선악 이원 캠프론, 빛의 자녀들/ 어둠의 자녀들 등등 이분법적 도식에서 우리스스로 해방되어야 하겠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라인홀드 니버가 경고한대로 도덕적 유토피아니즘에 빠지지도 말고 정치적 냉소주의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13:6).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이비 중용론에로 도피하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2)는 성경의 말씀을 순명해야 한다.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 동지들이 분명하게 의식해야 할 것은 1970-80년대의 시대가 지나갔고, 분명이 30년을 단위로 하는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이미 동텄고 진행되고 있다는 역사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30년 한세대의 중심화두는 ‘민주화, 인권, 민족화해’이었다면 지금 새 세대의 화두는 ‘생명, 평화, 정의’이다. 신학적으로 높고 숭고한 이 화두를 현실정치 언어로 번역하면 ‘민생, 보편복지, 공공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압축되는 높고 숭고한 비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항상 구체적인 현실정치의 정책적 이념인 ‘민생, 보편복지, 공공성’ 보다는 ‘생명, 평화, 정의’라는 화두가 추상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걸어온 그 길을 가야한다.
  
모두가 맨 처음에 그랬듯이 모두가 빈 맘으로, 초연 초탈한 자유인으로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며”(히12:2) 다시 신들매를 고쳐 매고 서로서로 손을 내밀어 마주잡고 일어서서 걸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