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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2일 화요일

[횡설수설/하태원]‘트루먼 쇼’의 북한(2013.01.23)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30세의 보험회사 직원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익사(溺死)를 목격하는 바람에 물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것을 빼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결혼 생활도 남부럽지 않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방송촬영용 조명등은 그의 ‘순탄한 삶’에 큰 파문을 던진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는 부랑아가 돼 나타나 뭔가를 말하려다 끌려가고, 불현듯 등장한 첫사랑 여인의 입을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듣는다. “넌 거대한 인공도시에 배치된 5000개의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 17억 시청자에게 30년간 생중계된 ‘트루먼 쇼’ 주인공이야.”

▷1998년 발표된 영화 ‘트루먼 쇼’는 누구나 진실이라고 믿는 현실 세계가 실제로는 모두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히 만들어진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이름을 트루먼(true·진실한+man·사람)이라 지은 것은 기막힌 반어법(反語法)이다. ‘강남스타일’로 세계적 스타가 된 싸이는 한 인터뷰에서 “쉽게 말하면 영화 ‘트루먼 쇼’ 같아요. 이거 지금 ‘몰카(몰래카메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라고 말했다. 전 세계인이 자신의 말춤에 들썩거리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미국 정부의 명시적 반대에도 북한을 방문(7∼10일)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와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iot)’란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에릭 슈밋 구글회장 부녀(父女)의 방북기가 화제다. 딸 소피 슈밋은 자신의 블로그에 “북한은 나라 전체가 거대한 ‘트루먼 쇼’ 같았다”고 썼다. 19세 소녀가 북한의 현실을 정확히 묘사한 것 같아 공감이 간다. 소피는 “평양 체류기간에 북한 당국이 허가하지 않은 어떤 사람과도 대화할 수 없었다”며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곰곰 생각해 볼수록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점점 더 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북한을 처음 찾은 소피에게도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조작된 현실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나 보다.


▷북한이 자랑하는 김일성대학의 전자도서관도 소피가 보기엔 ‘포툠킨 빌리지’였다. 새로 병합한 크림 반도 시찰에 나선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리고리 포툠킨이라는 주지사가 여제의 배가 지나는 강둑에 종이로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눈가림을 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소피는 “모든 컴퓨터에 사람이 앉아 있지만 모니터를 바라볼 뿐 방송 카메라가 비춰도, 시끄럽게 소리쳐도 미동도 없다”고 적었다. “혹시 이 사람들도 마네킹이 아니었을까…”라는 소피의 농담은 깜찍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작정하고 북한 체제를 비난한 소피는 평양을 다시 방문할 뜻이 없는 모양이다.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사설]싸이의 ‘反美 랩 사죄’ 음미해볼 사람 많다(2012.12.11)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말춤을 볼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9일 워싱턴 국립건축박물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인 워싱턴 자선공연’에서 가수 싸이의 공연을 지켜봤으나 말춤을 추지는 않았다. 싸이가 2004년 신해철이 이끄는 록밴드 ‘넥스트’의 래퍼로 출연해 부른 “미군과 그 가족들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자”는 반미(反美) 랩이 미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싸이는 공연에 앞서 “8년 전 일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백악관은 싸이를 자선 공연 행사에 초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청원을 물리치고 예정대로 싸이를 초청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싸이의 반미 노래를 보도하면서도 “당시 반미주의적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노래가 탄생했다”며 시대 상황을 곁들였다. 백악관과 미국 언론의 차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랩 가사를 읽은 미국인들은 싸이와 어울려 말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가셨을지도 모른다.

싸이는 2002년 효순 미선 양 사건과 관련해 미군 장갑차 모형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반미 시위에도 출연했다. 언제부터인가 남보다 ‘정치적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반미 성향을 내세우는 대중 연예인이 종종 있었다. 서강대 철학과 출신의 가수 신해철이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 버클리음대에 유학한 싸이도 그런 사람들과 자주 어울린 것이 사실이다.


“미군과 그 가족들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자”는 가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가 들어도 섬뜩하다. 그런 가사는 부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싸이의 노래를 우리만 들었다면 그가 과거 시류에 휩쓸려 부른 반미 랩이 지금 와서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노래는 이제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가 지켜보는 한국이 됐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골 장터에서 창을 하는 사람과 방송에 나가 노래 부르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무대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금기가 있다. 한국에서만 듣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세계가 함께 듣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같을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을 혐오하면서 일본과 중국에서 한류 스타가 되겠다는 연예인은 어리석다. 반미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미국을 장난치듯 저주하는 것은 경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싸이의 사죄를 교훈 삼아 한류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우물 안에 머물렀던 우리의 자의식을 고양(高揚)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