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김지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김지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조선일보][아침논단] 그가 돌아왔다, 자백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2013.04.14)




'정치 경험 없는 게 장점' 호언 생생, 요즘은 차근차근 밟아가려는 자세
암스트롱, 과학기술자 본업에 충실… 정치 나섰던 글렌, 우주비행사로 마감
지금이라도 본분 지키는 정치 해야… 새 정치 첫걸음은 자기오류 시정부터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현대사
안철수가 돌아왔다.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한다. 그는 며칠 전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정치했다면 실수를 많이 할 뻔했다"며 "(대선) 당시에는 공중에 붕 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 얘기를 들은 필자는 "그걸 이제 아셨는가?" 하는 허탈한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러나 곧 (안씨 본인도 일부 인정하듯이) "이렇게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를 달리는 분이 대통령이 됐을지도 몰랐잖아?"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은 구름 위에 붕 떠 있을 때 쓴 것인 셈이다.

필자는 작년 대선에서 안씨에게 "지름길보다는 좀 더 먼 길이 낫다"(아침논단 2012년 11월 23일자)는 조언과 함께 정치적 경험과 식견을 더 쌓을 것을 주문했다. 내 글을 읽고 결심했을 리는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 글이 나간 날 저녁에 안씨는 후보 사퇴를 했다. 안씨는 요즘 자신의 경험 부족을 절감하며 전과는 달리 밑에서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려는 자세를 보인다. 그렇다면 대선 때에 "정치 경험이 없는 것이 장점"이라고 호언했다가 이제 와서 정치 경험을 쌓겠다는 모순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과거의 치기(稚氣) 어린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에겐 안씨를 볼 때마다 대비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기술계에서 안씨보다 훨씬 더 높은 위상을 가졌던 김종훈 전 미래부장관 내정자도 그중 하나지만, 더 큰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다. 세계사에 이름을 확실히 남긴 두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Armstrong)과 존 글렌(Glenn)이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6·25전쟁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같이 활약한(각각 78회와 63회 출격 기록) 참전 용사이기도 하다.

작년 8월에 타계한 암스트롱은 1969년 달에 첫걸음을 디딘 인류 역사의 영웅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많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길 원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신시내티 대학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등 과학기술자로서 본업에 충실하며 조용한 생애를 살다가 조용히 타계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더 빛난다. 물론 그가 정치에 나섰어도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글렌의 행보는 약간 달랐다. 1962년 2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비행하고 귀환한 뒤 그가 누린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펼쳐진 그의 퍼레이드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색종이가 뿌려졌다. 그 후 본업인 군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다가 해병대 대령으로 전역한 뒤 정치에 뜻을 품고 지역 정치부터 시작했다. 상원의원 예비 경선에서 패배를 맛보기도 했지만 결국 1974년 오하이오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고 미국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하나로 차근차근 성장했다.

1984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가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의 마지막 상원의원 임기 말인 만 77세라는 고령에 우주 비행사로 자원하고 합격해서, 1998년 10월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승선해 최고령 우주 비행사로 기록됐다. 우주 비행을 하는 도중에 상원의원 임기 24년을 끝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은퇴 세리머니를 갖기도 했다.

안씨는 이미 암스트롱이나 글렌의 길을 가기엔 너무 엇나갔다. 개인이나 사회로서나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능력 이상의 일은 벌이지 말라. 정치에선 차근차근 정도(正道)를 걷고, 혹시 원래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낙담하지 말라. 당을 만들지도 당에 입당하지도 않고 혼자 하는 정치는 한계가 있다. 성공한 기업가 출신으로 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로스 페로(Perot)도 처음엔(1992년) 무소속으로, 다음엔(1996년) 자신이 급조한 '개혁당'으로 대선에 임했지만 두 번 다 한참 처진 3등에 머물렀다. 페로도 개혁당도 정치 지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안씨는 자신의 행적을 점잖게 윤색(潤色)하고 선전하는 능력이 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듯도 하다. 안씨의 과거 군 입대 에피소드 허구는 아직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금성출판사) 등에 버젓이 실려 있다. 진정한 정치를 하려면 이런 낯 뜨거운 오류부터 시정하고 새로이 시작할 일이다. 김지하 시인도 '깡통'이라 표현했듯이, 안씨의 정치는 아직 '치유' 차원에서만 맴돌고 원대한 비전과 냉철한 현실 인식은 행방불명이다. 일례로 현 북핵 위기 상황에서 과거 안씨 특유의 어정쩡한 양비론이 먹혀들긴 어려울 것이다. 안씨가 진정한 정치 지도자와 개혁가가 되려면 훨씬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할 것 같다. 안씨의 심기일전을 기대한다.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조선일보]이문열 "불복하는 못된 버릇이 나라 망치고 있다"(2013.04.02)


“여당이나 야당 모두 야단맞아야 한다. 불복하는 못된 버릇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64)씨가 정치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이씨는 1일 발매된 시사저널 최신호와 인터뷰를 통해 “(정치권에) 못된 버릇으로 자리 잡은 것이 있다”며 “선거에 진 뒤 승복하기 쉽지는 않지만 불복하는 버릇이 굳어졌다”고 꼬집었다.
그는 “국민이 뽑아놓은 대통령을 국회가 자르려 드는 것도 불복이라고 본다“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시켜 6개월 동안 반신불수로 만들지 않았나. 이명박 대통령도 광우병 소고기 사태로 집권 초기부터 맥 빠지게 만들었다. 국민이 뽑아 한 달도 안 된 대통령에게 ‘OUT’하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또 봐야 하나 그런 걱정이 든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고 탄식했다.
“점점 더 파당화(派黨化)하는 정당 정치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또 “기본적인 것에서도 분열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북한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은 기본과 관계가 있는 것인데 너무 다르다”며 “어느 정도 다르다가도 하나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만 간극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이 나라 정치가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때문에 뜬금없이 끼어든 ‘직접 민주주의’란 것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천 년 이상 발전해온 대의제, 즉 간접민주주의가 괄시당하고 있는데 이래선 안 된다”고 했다. “기술적으로는 전 국민을 인터넷 광장에 모을 수 있고, 의사 결정 사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인터넷 시대의 광장 확대 능력을 인정한다”면서 “그러나 국가의 중대한 문제를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모아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법의식도 애매해졌다”고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씨는 이어 “(인터넷에서) 익명이라는 것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해치고 어떤 일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익명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키겠다고 많은 이를 죽게 만드는 것을 왜 내버려둬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익명성 뒤에 숨어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등 사람을 살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데, 이제는 현실적으로 규제를 해야 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문화권력’에 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느냐는 질문엔 “지금 한국의 지식인은 옛날의 나치나 볼셰비키처럼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지하 시인이 문단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일컬어 쑥부쟁이라고 말했는데, 나도 그런 논리로 말하는 것”이라면서 “쑥부쟁이가 문단의 길을 딱 가로막고 있는데, 어린 작가들이 문단에 들어가 눈치를 안 보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많은 부분은 1980년대에 시작된 일에서 이어지는 것들이 많다”며 1980년대를 다룬 소설을 집필할 계획임을 밝혔다.
“인과 관계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도 있고,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나 일방적으로 해석을 끝내버린 것들을 드러내 전체적으로 해석해내는 작업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이 소설을 객관적 기록으로 충실하게 쓸 것이며, 소설 속 관찰자가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2월 6일 수요일

[TV조선 ch19] "내가 수구꼴통? 5060을 비양심 취급, 억울했다"(2013.02.06)


[신문으로 읽고 TV조선으로 본다 - 어수웅 기자의 북잇수다] [3] 소설가 이문열

12년 전, 반대 정치세력에 '책 장례식' 당해
보수정권에 살가웠던 건 아닌데 상처는 입었지
세금 내고 군대 가고, 나라에 충성한 우리 세대
'행동 않는 양심' 취급하니까 대변해야겠다 결심
나에게 보수란, 현재의 완전성을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지난 세대의 시간과 땀을 잊지 않는 것

작가 이문열(65)에게 상반된 감정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적 연민. 지금의 20~30대는 기억이 없거나 희미하겠지만, 그는 '책 장례식'을 당했다. 12년 전인 2001년 11월 3일. 작가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소위 '이문열 돕기 운동본부' 회원 30여명이 그의 책 수백 권을 관(棺)의 형태로 묶어 '운구'한 것이다. 열 살 남짓 소녀는 책 표지를 모아 만든 '영정 사진'까지 들었다.

또 하나의 감정은 정치적 불편함. '책 장례식' 전후, 그는 격정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계속해왔다. 좌·우파를 떠나, 작가에게서 작품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는 10년 넘게 보수 이데올로기의 수호자, 적대 세력 표현을 빌리면 '수구꼴통'으로 낙인찍혔다. 작가로는 치명적인 일. 문학적 소출은 줄어들었고, 책에 대한 수요는 급감했다.

◇똑같은 상황, 가만있겠나

―지난 10년, 후회한 적 없나.

"후회, 분명히 한 적 있다. 보수 정권에 살가운 애정도 없으면서 피해는 엄청나게 봤으니까. 그런데 자신 없는 것은,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내가 가만있겠나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짓 또 하지 싶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5060세대의 존재감이 아니었겠나."
작가는 대표작으로 평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정치적 입장까지 고려해서 봐야 하는 걸까. 이문열은“바라건대 잘 쓴 것을 먼저 봐 줬으면 좋겠다”면서“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부디 외눈박이로 보지는 말았으면 한다”고 했다. /부악문원(이천)=이명원 기자
― 5060의 존재감이 아니라, 기득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는 3선 개헌 반대(박정희 대통령 연임 반대)로 데모를 본격화했던 세대다. 하지만 데모를 업(業)으로 삼은 친구는 5% 정도고, 많게 봐서 50%가 심정적 동조였다. 그런데 80년대 세대는 업으로 삼은 비율이 10%, 거리에 나간 비율이 거의 100%였다. 우리 세대가 제일 억울했던 것이, 어떤 벌레 취급을 받는 느낌이랄까. (당시 정권에) 동조하기보다 참았던 것도 있는데, 세금도 다 내고, 군대도 다 가고, 나라에 충성하며 그렇게 살았는데, 이번 선거에서 보니까 자기네끼리 10%의 민주화 영웅을 만들려고 90%의 죄 없는 윗세대들을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만들더라."

― 예술가들은 대개 진보 아닌가. 이번 선거에서도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문인은 거의 없는데.

"도대체 왜 예술가가 진보적이어야 하지? 우리는 예술가지만,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유권자다. 우리 유권자들은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6:4에서 5:5 범위 안에서 조정한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평균 7이 야당 지지다. 이번에는 거의 9:1, 아니 김지하 선생을 제외하면 10:0 느낌이더라. 그런데 희한하게도 투표를 하고 보니 48:51이더란 말이지."

◇진보가 꼭 약한 세력 편이라고?

―야당 지지가 아니라, 소수자와 소외자, 가난한 자의 편에 예술가들이 섰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아주 우스운 말이다. 어느 세상이건 자기보다 센 놈들이 자기를 억누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게 마련이다. 이걸 이용하거나 아첨하는 무리가 있다. 동양에서 진보와 보수가 가장 신랄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싸운 게 중국 송대(宋代)의 신법과 구법 싸움이었을 것이다. 왕안석과 사마광, 혹은 소동파의 싸움이다. 당시 문인들이 다 진보적이었다면 다 왕안석 편을 들었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보를 한다는 게 꼭 약한 세력을 돕는 것인지는 모른다."
7일 방송되는‘북잇수다’이문열 편은 작가의 집필실인‘부악문원’에서 촬영했다. 왼쪽부터 이문열 작가, MC인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 손미나씨, 표정훈 출판평론가. /이명원 기자
―다시 한 번 위험한 발언으로 보이는데.

"가령 1등부터 100등까지 있는 사회를 가정해보자. 사회 변혁이 이뤄진다면 산술적으로 51등 이하가 이득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20등 이하 사람들은 다 사회가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자기 앞을 보니까. 변혁을 바라는 사람이 늘 다수다. 그러나 이건 역사적 허수일 뿐이다. 다수가 집단적으로 하는 것이 늘 옳은가. 이 역사적 허수에 아첨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고."

◇"내가 상처 난 병아리구나"

―12년 전 '책 장례식'에 대한 스스로의 정리는.

"처음에는 솔직히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아니더라. 병아리 여럿을 키우다 보면 조금 탈 난 병아리가 있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 한 마리가 그 탈을 찾아내고 쪼아대고, 피가 나고, 나머지가 모두 쪼아대서 죽는다. 어릴 적 본 그 광경이 생각나면서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다. 아, 나한테 벌떼같이 덤비는구나. 격렬히 화를 내면서 한 3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떤 시기가 지나니 굉장히 피곤하더라. 화를 내는 것도 긴장이고, 그 원리에 따라 뭘 계속하는 것도 피로하지 않나. 그래서 2005년에 미국에 가서 한 3년 있었다.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어선지, 한국에 있을 때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내는 그런 상태는 벗어났다. 또 3년이 지난 지금은 인터넷의 특성 같은 걸 많이 이해하게 됐고, 소위 내 편에서도 미디어를 악용을 하는 걸 보게 됐다. 결국 주고받는 것이로구나, 이래서 완화가 된 부분이 있다."

2001년 '책 장례식' 이전, 그는 이미 200자 원고지 6만장을 쓴 작가였다. '삼국지'처럼 역(譯)을 제외하고도, 작(作)으로만 대략 4만장. 유례없는 생산성이었다. 하지만 '책 장례식' 후 동료 문인은 그를 외면했고, 그의 새 작품들은 이데올로기의 렌즈를 먼저 통과해야 했다.

이번 선거 결과가 자연인 이문열에게 '위로'가 됐냐고 물었다. 그는 "솔직히 지난 10년 동안 국민에 대한 신뢰가, 이거 아니다, 싶을 만큼 깨져 있었는데, 그게 회복됐다"면서 "우리 국민이 굉장히 균형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여유가 오면, 보수의 개념부터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문열의 보수주의'를 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현재의 완전성을 믿지는 않는 것.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에 대해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가지는 것. 현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들인 시간, 노력, 정성, 성의를 잊지 않는 것."
채널 19·오늘 저녁 7시 50분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홍찬식 칼럼]박정희, 김지하의 같은 길 다른 길(2013.01.16)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주 정부 부처의 업무 보고를 받기 시작하면서 문화재청을 첫날 보고 대상에 올렸다는 소식이다. 업무 보고 첫날인 11일에는 중소기업청 보건복지부 국방부 등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역점을 두는 국정과제와 관련된 정부 부처들이 선택됐다. 이들에 비해 시급한 현안이 별로 없는 문화재청의 첫날 보고는 이례적이다. 박 당선인이 문화재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 분야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문화재와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가 경제보다 오히려 문화유산에 더 우선순위를 두었던 사례도 적지 않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는 박 전 대통령이 “단군 이후 최대의 공사”라며 군 병력과 장비까지 동원해 강한 의지를 보였던 사업이다. 1969년 공사 중에 대구와 경주 구간에서 신라시대 고분들이 발견됐다. 발굴을 위해 공사를 중단할 경우 막대한 비용 손실을 생각한 건설 당국은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발굴 작업부터 먼저 하라고 지시했다. 문화재 보호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사 기간은 6개월 늘어났다. 박근혜 당선인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에서 아버지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문화재청의 전신(前身)인 문화재관리국은 박 전 대통령이 1961년 신설한 기구다. 박 전 대통령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자신을 언제든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문화유산 정책을 직접 챙겼다. 1962년에는 무형문화재 제도를 만들었다. 판소리 탈춤 농악 등 무형의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사람들에게 ‘인간문화재’라는 명예를 부여하고 생계비를 지원했으며 전수회관을 지어줬다. 일제 통치, 6·25전쟁 등으로 소멸 위기에 놓인 전통문화를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전통문화, 즉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비슷한 시기에 대학과 지식인사회에서도 고조됐다. 1960년대 대학가에서 싹튼 전통문화운동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촉발했다. 일본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을 때 우리 쪽이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각이 운동으로 이어졌다. 탈춤 농악 굿 판소리 등 전통적인 연희를 다루는 대학 서클이 속속 탄생했다.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당했던 유신 체제에서 전통문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결합한다. 탈춤 속에는 권력에 대한 조롱과 야유가 들어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전통문화에 깃들어 있는 저항의식에 주목했다. 억압된 현실을 고발하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전통문화를 활용하려고 했다.

그 중심에 시인 김지하가 있었다. 그가 1973년 공연한 ‘진오귀굿’은 최초의 마당극으로 기록된다. 마당극이란 전통예술 형식을 채택하면서도 권력 비판 등 현대적인 스토리를 담는 야외 연극이다. 그가 1970년 발표해 필화(筆禍)를 불렀던 시 ‘오적’은 시에 판소리 대사 형식을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전통문화운동을 주도한 서울대 출신들로 구성된 ‘김지하 사단’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박정희와 김지하는 이전까지 고루하고 보잘것없다는 평가를 받아온 ‘우리 것’에 새롭게 눈을 돌리고 널리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기와 목표는 서로 달랐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해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누적되어온 국민의 패배의식을 일소하려 했다. 강대국 틈 속에서 시달리다가 식민 지배를 거쳐 6·25전쟁까지 겪은 한국인의 자신감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경제발전을 위해 우리가 뛰어난 문화민족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일이 절실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 김지하는 전통문화를 통해 국민의 저항과 투쟁의식을 일깨워 민주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 시절로부터 40년 안팎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우리의 문화적 상황은 많이 변했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은 선진국 또는 경쟁국과 비교할 때 모자란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경제발전과 세계적인 한류 붐의 영향이 컸다. 민주화 역시 크게 진전됐다. 전통문화 분야에서 박근혜 당선인에게 맡겨진 시대적 과제도 박정희 정권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류는 지난해 ‘강남스타일’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으나 외국인 사이에선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서 외국인의 66%가 “한류는 앞으로 4년 이내에 소멸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한류 소멸의 근거로는 항상 ‘소재 부족’이 꼽힌다. 매번 엇비슷한 스토리를 선보여서는 누구나 식상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류를 지속시키고 대중문화 이외에 음식 의상 관광 등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에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전통 소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할 일은 아버지의 업적인 전통문화의 보호와 발굴을 넘어 더욱 발전시키고 한류 콘텐츠 속에서 활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대선 때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김지하는 ‘한류 르네상스’를 강조하고 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순수한 전통문화를 위해 만나는 일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김지하 시인, 이정희에 “쥐새끼 같은…” 무슨일?(2013.01.09)

“국고는 서민이 헐벗어 바친 세금…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39년 만인 이달 4일 무죄를 선고받은 김지하 시인(72)을 이튿날 강원 원주에서 만났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던 그는 인터뷰에서 1970년대 고초를 회고하며 박정희 시대와의 화해를 말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비속어, 존칭 생략 등 그의 육성을 대부분 그대로 싣는다. (*)은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고 붙인 설명이다. 》

김지하 시인이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시인이 귀가하는 대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TV에서는 김 시인의 기자회견 장면이 나왔다. 느닷없이 ‘돈’ 이야기를 꺼내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27억 원씩 받고 도망간 여자(통합진보당 이정희 의원을 지칭)도 있는데 사형선고 얻어터진 김지하가 몇 푼 받아서야 되겠느냐. 5억이 아니라 500억, 5000억 정도 주던가. 적어도 27억 이상은 줘야지.” 그의 발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김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하기 싫다. 난 내일 (원주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토지문화관 구경이나 오든지” 하며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말을 들으며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청하면 가능성이 없지 않으리라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이튿날 토요일(5일)에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두 시간여. 토지문화관에 들어서니 부인 김 관장이 있었다. 기자는 김 시인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꼼짝 못한다는 김 관장을 설득했다. 마침내 김 시인이 오후 7시경 문화관으로 들어섰다. “혼자 정선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때 돈 이야기만 하셔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수십 년간 떠든 게 민주주의였는데 민주주의 얘길 또 해? 지루하기 짝이 없지. 풍자? 그게 아니야. 누구는 제멋대로 떠들다가 27억 먹고 튀는 판이야. (이정희 의원이 대선후보 사퇴한다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쥐새끼 같은 ×,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 튀어나왔어. 우습더라고.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을 따라 기자도 웃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어. 법원 쪽에는 공손히 인사했어. 근데 기자들을 보니 뭔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느낌이 어떠냐길래 ‘아무 느낌 없다’ 하니 실망한 눈치였어. ‘이 자식들이 왜 실망을 하지?’ 다시 보니까 다 젊어. 똥구멍 같은 내 입에서 뭔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 그래서 돈 이야기 했어. ‘나는 요즘 돈이 좋다. 왜? 돈이 나빠? 돈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 아무도 손드는 사람 없데. 나는 옛날엔 돈을 악(惡)의 징표라 봤어. 오래 살다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이야. 아들에게 돈 주려다가 안 주면 인상 쓴다구. 부자지간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민주투사가 속물 같아 보였습니다. 

“공자도 돈 하면 눈이 커지는 사람이었어. 돈 많은 제자를 아꼈지(*자공·子貢을 말하는 듯). 나는 매일 돈 없어서 부인한테 ‘병신’ 소리 들어.(김 관장이 ‘내가 언제 그랬어요?’ 하자 시인은 다시 껄껄 웃었다.) 은행 가서 몰래 돈 꺼내 택시 타고 다녀서 이 사람한테 혼나…. 실제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해. 두 아들 놈 유학 보내 공부시켜야 해. 아들 둘이 대학엘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두 아들이 대학도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욕 안 하기로 맹세했지만 그럴 땐 ‘×발’ 소리가 절로 나와. ‘×발새끼들, 자기 자식들은 대학 졸업시켰으니까. 대학 못 보낸 부모 한(恨)을 모른다.’ 아이들 속에도 한이 맺혔을 거야. 나는 아비로서의 한이 또 있어.”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김 관장이 “아니, 울려고 그러셔? 우는 건 또 처음 봤네” 하자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나왔다.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어떻든 그날 기자들 보니 갑자기 돈 이야기 한번 하자 생각이 들더라구. 근데 젊은 기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네가 돈 때문에 재심신청했구나’ 하는 표정이야. 그걸 보고 더 하기 시작했지. 내가 그런 면이 있거든. 남이 싫어하면 더 해. 하하하. 그런데 (회견 끝나고) 나오면서 후회가 들더라구.”

―(기자회견 내용이) 걱정이 되긴 되셨나 보네요.

“그럼, 나는 소심한 남자야.”

소년처럼 맑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 거친 말이 이어졌다.

“내가 오적(五賊)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건 욕하지 않았어. 하지만 국고금 빼먹은 놈은 찢어 죽여야 한다고 했어. 내 신념이야,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데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야. 그걸 떼먹어? 죽여야지. 거기에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집권한 자들이) 돈을 쳐먹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부하는 목포 광주 한(恨)의 천재들이? 망월동 피값 받은 외에 또 받아?” 

비록 욕설은 난무해도 그의 말은 받아 적으면 시가 될 듯, 발음도 정확하고 운율과 리듬까지 있어 몰입하게 했다. 김 시인은 이번 무죄 판결과는 별도로 오적 판결(선고유예)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스톡홀름대 한국문학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처음 번역한 외국 문학이 오적이야. 나보고 참관하라 해서 스웨덴까지 갔잖겠어. 동양 최고 시인이 김삿갓 다음에 김지하라더군. 청중이 일제히 박수를 쳤어. 이런 비슷한 일이 러시아, 중국, 미국 등에서 있었어. 미친 생각이지만, 만약에 노벨상을 내게 준다면, 국가에서 오적을 유죄라고 하는 상태에서 주어지면 어떻게 돼. 나라 망신 아닌가. 물론 나는 반체제 작가로 영웅이 될 테지만(웃음)…. 나꼼수는 저질이야. 그런 것들로 무슨 선거를 이기겠다고. 내가 썼으면 간이 덜덜 떨리게 쓴다. 근데 그런 글을 오적 이후 못 썼어.”

그가 먼저 선거 이야기를 꺼내길래 화제를 선거로 돌렸다.

―이번 선거 흐름을 어떻게 봤습니까.

“마르크스 읽지도 않은 자들이 마르크스를 말하는 세상이야. 그런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 때 전시작전권 반환 외에 한 것이 뭐야. 그것 도로 돌아갔어. 부동산도 완전히 실패했지. 그 다음에 NLL(서해 북방한계선) 취소? 김정일에게 돈 갖다 바친 것. 그것들 꽁무니 따라서 문재인이 또 튀어나왔어. 김대중이 흉내 냈지. 김대중은 돈 갖다 안 바쳤는가? 북에서 날아온 포탄은 거기서 나온 거야. 그 돈은 우리 세금 아닌가? 문재인이 그 꽁무니 따라왔으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찍어. 이번 선거에서 원탁회의 어쩌구에서 안철수에게 장관 5개를 주고 누가 몇 개를 먹고. 그것을 지들이 결정해서 문재인에게 보고한다 해서, 까불지 말라 혼내려고 대장(아내)에게 물어봤어. 아내 말이 ‘조져!’(웃음) 그래서 내가 원고를 신문사에 보냈어. 원고는 교정됐어. 원래는 그것보다 더 지독했어. 마침 신문에 (글) 나간 날이 원탁회의 하는 날이었더군. 나는 몰랐어.”

그의 말이 이어졌다.

“(민주당은) 자기 쇄신 안 하면 다 망해. 국민 모두가 이석기 이정희 하는 거 봤어. 앞으론 그런 행동 다시 못해. 다시 말해 간첩행동 못한다 이거야. 그렇다고 우파가 옳으냐, 그것도 아니야. 서경석 목사가 전화해서 수만 명이 모인 우파 집회에 나오라 하더군. 내가 왜 가냐 했더니 ‘박근혜 지지했잖아요’ 이래. 그래서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좌우를 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지 무슨 우파 집회야. 지금 우파, 좌파, 중간파가 어디에 있나. 이번 선거를 봐. 좌파 우파로 투표한 게 아니야. (국민들이) 속에 들어 있는 생각으로 찍은 거야.”

―안철수 씨는 다시 (정치판으로) 돌아올까요.

“안철수는 깡통이야. 아무것도 몰라. 그 사람 전공이 뭔가. 융합과학이야. 그런데 그 사람 정치가 융합과학에 맞는 것인가? 지금 융합과학은 유전자까지 확대되고 있어. 하지만 확대할 때는 조건이 있어. ‘절제’라는 동양적인 제약 사항을 끌어들여야 해. 정치에서 절제란 할 말 못할 말 구분하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이 자기 전문영역과 정치의 관계도 모르고, 여야 관계도 몰라. 밑에서 박수 쳐 주니까 붕 뜬 거지. 그런 사람을 깡통 아니면 뭐라고 해.” 

―안철수 씨도 시간이 지나면 단련될 수 있을까요.

“끝났다니까. 정치란 게 하고 싶다고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냐. 배우하고 똑같아. 한번 찍히면 끝난 거야. 문재인 옆에서 왔다 갔다 한 사람들이 대안이 없으니까 ‘안철수, 안철수’ 한 거야. 게다가 개표 전날 미국으로 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문재인을 지지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봐야 할 것 아냐. 도대체 ‘선거’라는 행위를 뭘로 보는 거야. 선거는 국민의 결정이지 자기들 결정이 아니야. 미국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정치 또 한다고 했지? 미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을 데려다 뭐에다 써먹어.” 

―왜 박 당선인을 지지했죠.

“남자의 시대가 가고 여자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해온 말이야. 근데 박근혜 혼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어. 그래서 이원집정제를 생각했지. 박근혜가 가능하려면 남자 중에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 거야. 안철수 쪽에서 도와준다면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 근데 자세히 보니까 안철수가 깡통이야… 아내도 박근혜가 좋다 하더라구.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18년 동안이나 고독 속에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어떤 내적(內的) 상태가 왔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내가 놀라서 대꾸를 못했어. 거기까진 생각 못했거든. 박근혜가 내공이 쌓였을 것이라고 결론 냈지. 내공이 뭐냐, 독한 마음이야. 뭔가를 하겠다는 독한 마음. 박근혜가 (지난해 12월 13일) 여기 토지문화관에 왔을 때 ‘당신 내공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아버지 이야길 꺼냈지.”

김 시인은 옛일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미쳤었어. 참선을 지독하게 하면 치유 효과가 있다더라고. 그래서 시작했어. 잘 때도 가부좌를 틀 정도로 독하게 했지. 얼굴은 해골이 됐어. 참선 100일을 끝내고 101일째 되는 날이었어. 낮 12시에 교도소 방송에서 박정희가 죽었다고 나오는 거야. 그때 떠오르는 게 있었어. 공(球)이 세 개가 떠올랐어. 그게 참선이야. 공마다 이름이 있었어. 첫째 공은 인생무상, 둘째 공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공은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껄껄 웃음이 나오더라구. 참선이 코미디야 코미디. 이튿날 12시에는 또 추모방송이 나와. 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가 인생무상! 아따, 나 그렇게 소름 끼치기는 처음이네. 무서워서가 아니야. 내가 인생무상을 생각했는데 가톨릭의 거인이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니 소름이 끼친 거야.”

▶ [채널A 영상] ‘무죄 판결’ 김지하 “기쁘지도 슬프지도…”


▼ “정치가 뭐냐고? 모든걸 제자리에 앉히는거지” ▼

4시간여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지하 시인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우주론 동학이론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원주=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인생무상이라… 그건 어떤 느낌이었나요. (박정희 대통령이) 잘 죽었다는 통쾌함?

“그런 게 아니야. 차원이 달라. 나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미워한 적이 없어. 참선을 하면서 박정희를 생각해 보니 ‘자기도 나라 먹여 살리려 애쓰다 갔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전처럼 욕이 안 나와. 이 이야기를 박근혜 앞에서 했어. 그런데 얼굴이 하나도 안 변해. 눈물은커녕 웃음도 없어. 조금은 감동할 줄 알았는데 꼼짝도 안 해. ‘김지하니까 경계해야겠다’는 것도 아닌 거 같았어. 그냥 독한 거야. 그래서 내가 속으로 ‘18년 동안 자기 혼자 가슴 안에 칼을 세우고 혼자서 지켰구나.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공이다’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박근혜에게 이렇게 말했어. ‘당신이 뭘 해낼 사람이다’.” 

―(박 당선인이) 앞으로 잘할까요.

“잘할 거야. 잘 안하면 설 자리가 없어. 가난한 사람 먹여 살려야 해. 지금 국운이 서 있어. 3000년 동안 남성이 여자를 억압해 왔어. 남성주의,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올 때는 대세가 움직인다는 거야. 지금이 바로 개벽기야. 음(陰) 개벽이야. 양(陽) 지배에서 음 지배로 넘어가는 때야. 이번에 5060세대가 움직였어. 5060세대는 민주화운동과 산업화의 주체야.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은 국운이 바뀐 거야. 또 젊은 세대 34%가 박근혜를 지지했어. 이것이 국운을 움직인 힘이 아니면 뭔가.”

―만약 당선인이 잘못하면?

“알게 뭐야. 내게 책임 있어? 나는 책임 질 생각 없어. 내 할 일 하면 돼. 글 쓰면 돼.”

다시 화제를 과거로 돌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이 미웠나요.

“지독했지. 가랑이를 찢어서 개한테 줄까. 미워할 수밖에 없지. 내가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기자를 보며) 불로 지지는 것만 고문이라고 알지? 그렇지 않아.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어와. 가끔 밑바닥도 올라와. 24시간 감시받으며 독방에 오래 있으면 누구라도 정신착란에 빠져. 온몸을 뒤틀고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정보국에서 연락이 와. 항복하라고. 차(車) 사 준다 어쩌고 하면서 ‘각하에게 편지 한 통 쓰세요. 나라를 위해 같이 좀 일 좀 합시다. 뭐가 어렵습니까?’ 나는 면회실에 걸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태극기가 왜 저렇게 생긴 줄 아세요?’라며 딴청을 부렸지. 내가 (그들에게) 손들 수 있어? 손들 수 없지.”

―인생무상을 깨닫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왜 그 뒤로도 마음고생을 했나요. 

“(내가) 미쳤었다니까. (갑자기 호통을 치며) 한번 말하면 왜 못 알아들어. 정신병이었다고 정신병! 나는 미쳤었어. 10년 동안 정신병원을 열두 번이나 들어갔어. 지금은 약을 안 먹지만 항우울제 안정제 수면제로 폐인이 됐다고. 그것 때문에 온 가족이 우울했어. 아내는 정보부와 빨갱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세 번이나 살해될 뻔했어. 고생을 강조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언젠가 책을 쓸 테니 기다려. 신문에 쓸 내용은 아니야. 왜? 더러우니까. 돈이 나오고, 나한테 속임수를 쓰고, 간첩이 나오는데. 아직 (책 쓰기엔) 일러.”

옆에 있던 김 관장이 조용히 말을 받았다.

“처음에 붙잡혀 간 후 1년 동안 면회도 안 됐다. 김지하 죽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오는데. 그런데 소문이 들리기로 백낙청, 이영희(*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1929∼2010)를 말함.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책으로 386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인간들이 모여 김지하 욕을 한다는 거야. 내가 이영희 집에 서슬이 퍼래서 쳐들어갔지. 이영희가 너무 놀라 담배를 거꾸로 물었을 정도였어. 김지하가 형무소에 들어간 초부터 백낙청과 이영희는 김지하를 씹었어. 자기들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다시 김 시인의 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시골에서 돈이 안 올라오면 강의실에서 잤거든. 그래서 우리 패거리 별명이 거지야(웃음). 근데 이영희가 나한테 술 취해서 ‘김지하는 거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이야말로 거지다’ 했지. ‘매일 프롤레타리아 만세를 부르고, 없는 사람 만세 부르면서 내가 밥 얻어먹으려고 손 벌리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이야말로 더러운 거지야. 사상(思想)거지, 당신 글 다 읽어봤는데 당신 창작물이 어디에 있어. 아사히신문, 뉴욕타임스, 인민일보 인용한 것 외에 더 있나?’ 그랬더니 후배들이 낄낄 웃고.” 

시인은 마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 아이처럼 깔깔댔다.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는 백낙청 교수를 비판하셨어요. 

“내가 옛날부터 다 말했던 거야. 다만 (공개적으로) 참은 거지. 옛날에 백낙청한테도 이야기했어. 지금 우리나라 민중 형태는 밑바닥이다. 이쪽(민중)부터 들어올려야 한다.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당신이 배운 미국 문학을 하면 좋겠다.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버드 갔다 온 걸로 사람들 겁주고, 가르치려 들면 안 되지. 심지어 (내가) 감옥에서 막 나온 뒤에 실천문학에서 나하고 백낙청 대담을 시켰어. 며칠 후 (당시 주간이었던) 이해찬(전 국무총리)이 전화를 했어. 백낙청이가 자기가 말한 부분을 수정한다고 원고를 가져갔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하라고. 내가 그랬지. 아니 대담 원고를 수정하는 놈도 다 있냐. 

또 있어. 내가 장모(*소설가 박경리)를 만나기도 전이야. 백낙청이 장모 문학평을 썼어. ‘시장과 전장’이란 책이었어. 근데 이걸 완전히 멜로드라마로 만들어 놓은 거야. ‘시장과 전장’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야. 그걸 백낙청이 멜로드라마로 만든 거야. 이런 자가 평론가라고 나서고 대담원고를 수정해? 내가 그 동네 풍경을 잘 알아. 한국 문화를 알려면 한국 문학전통에 집착을 해야지. 배우지도 않고 미국 소설 몇 개를 읽고 들어와서 휘저으려고 하니. 그런 문학 지식이 지식이야? 이번에 쓴 칼럼이 그 이야기야.”

문득 그에게 인생이란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김 관장님은 아까 제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요? 

“인생은 한 번 왔다 가는 거야. 내가 오래 살고 싶을 것 같아? 돈 많이 벌어서? 지금 이렇게 정신 차리고 있는 것만도 사실 무리야. (옆눈으로 김 관장을 보며) 나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야. 소심한 사람이 대게 마누라 한마디에 움찔해. ‘헤어집시다’ 하면 바로 ‘안 돼’라고 말해. 밥은 얻어먹고 살아야 할 것 아냐. 하하하.”

―선생의 병을 고친 한의학자 장병두 할아버지가 선생을 보고 ‘서 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워라’고 했다던데 그 분노는 뭐였나요? 박정희였나요?

“모두 포함한 건데, 못났으니까 분노를 느낀 거야… 집안이 불행했지.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어. 기관총 들고 게릴라전까지 간 사람이야. 우익들이 나를 가마니에 넣고 목포 앞바다에 집어넣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니까 기관총 내던지고 하산했어. 자수한 거지. 굴욕이 심했을 거야. 자살 기도를 세 번이나 했어. 불행했어.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목포)으로 갈 수 있었겠나. 흘러 흘러 원주로 왔지. 판자로 지은 극장에 영사주임으로 있으면서 당시 열세 살이었던 나를 불러 원주에서 함께 살게 됐어.”

그의 입에서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 그대로였다. 

“굶지는 않았지만 가난했어. 돈이 생기면 아버지는 술을 드셨지. 그래도 나를 서울대학까지 보낸 거야. 나는 외아들이었고. 이런 내가 어떻게 공산주의가 되겠나. 공산주의에 개인은 없어. 내가 감옥 들어간 뒤 나더러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라고 한 것은 다른 놈들이 만들어 붙인 거야. 4·19 이후부터 이상하게 자칭 마르크시스트들이 나를 대장으로 만들려는 분위기가 있는 거야. 나는 아닌데 말이야. 그 뒤로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이 심심하면 전화를 해 ‘아무개가 형님 찍어 죽인다 했어요’라는 거야. 내가 뭐라 대꾸했는지 알아? ‘네가 더 나쁜 놈이다, 동지를 고자질하고, 뭐하는 새끼냐. 전화 또 하면 죽일 거야.’ 한국의 자칭 혁명가들이 잘하는 고자질, 그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 이름이 왜 지하인줄 알아?”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기자는 “지초 지(芝)에 물 하(河) 아닙니까”라고 답했다. 그가 허허 웃었다.

“땅속에나 갈 놈이라는 뜻이야. 나중에 유식한 놈들이 한자를 붙인 거지. 한글로 그냥 ‘지하’야. 서울대 문리과대학 다닐 때 시화전을 했어. 그 당시 우리 세계에서는 시화전 한번 하면 이름이 나게 돼. 그러니까 이름이 중요하잖아. 내 본명이 김영일이야. 그런데 같은 이름이 5명이나 됐어. 그러던 참에 동아일보에 있던 선배 한 명이 술 사준다고 오라는 거야. 당시에 낮술 사주는 선배는 큰 선배였지. 얼큰하게 취해 학교로 가려는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야. 그래서 걸었어. 길가를 지나는데 ‘지하 이발소’ ‘지하 다방’ 옳다, 지하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지하라고 한 거야… 더러운 이름이야.”

그의 말끝이 너무 쓸쓸해 기자 마음까지 쓸쓸해졌다.

문득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뱀띠시죠? 

“맞아. 근데 하나도 안 즐거워. 올해 (서민들은) 고통의 해야. 내년 봄까지도 안 좋을 것 같아. 그 대신 이 고비만 넘기면 참 좋은 시절이 올 것 같아. 물론 내 생각이니 믿지는 말고(웃음). 요즘 나는 무조건 아내 (생각) 따라가. 옛날에 나는 빠르고 단호했는데 지금은 안 맞아. 그래서 기다려야지, 신중해져야지 해. 박근혜에게 국민들 희망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안도였어. 이제 좀 살겠구나, 이제 나는 글만 쓰자.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맡기고… 이제 짐을 놓았어.” 

―정치가 뭡니까?

“정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앉히는 거지.”

역시 그다운 대답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인근 식당으로 옮겨서까지 진행된 4시간여 인터뷰 동안 그는 걸림과 막힘이 없었다. 기자는 그를 만나기 전 그의 모진 삶을 연민했다. 하지만 때로는 두 눈을 부릅뜨며 욕설과 호통을 치면서 화를 내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깔깔대는 모습을 보며 기자는 ‘태어나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 [채널A 영상] 저항시인 김지하, 돌연 박근혜 지지… 왜?

:: 김지하 시인은 ::

△1964년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로 4개월 투옥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70년 사상계에 발표한 풍자시 ‘오적’ 으로 반공법 위반, 1개월 투옥

△1973년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

△1974년 민청학련 주모자로 기소돼 사형 선고(긴급조치 4호 위반)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 1974’와 관련해 재구속(반공법 위반), 노벨 문학상·평화상 후보로 추천 

△1978년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41년 목포 출생

△1959년 중동고등학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학사)

△1985년 미국 명예인권실천 박사

△1993년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명지대, 영남대, 동국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재 원주 상지대 출강

인터뷰=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김지하 "문재인은 형편없고 안철수는 깡통, 박근혜는…"(2013.01.08)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시인 김지하씨가 ‘자격 논란’을 빚고 있는 윤창중 인수위 수석 대변인 임명에 대해 “잘한 일”이라고 편을 들었다.

김씨는 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대변인 입에서는) 막말 수준이 나와야 한다”며 “박근혜(당선인)가 막말하겠소?”라고 반문했다.

김씨는 또 사회자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지지했던 국민 48%에 대해 윤 대변인이 ‘국가전복세력, 공산화시키려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막말 수준이다”라고 지적하자 “공산화 세력(야권 정치인들)을 쫓아가니까 공산화 세력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박 당선인이 대선 과정에서 본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유신에 반대했던 지학순 주교의 묘소를 참배하고 왔다는 소개도 했다. 박 당선인의 유신 반성 문제와 관련해 사회자가 “똑 부러지게 사과를 한 건 아니다. ‘공과 과가 있으니 역사에 맡기자’는 정도로 정리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대통령이 그 이상 뭐 하겠소? 발가벗고 춤을 춰야 돼요? 아니면 무덤 앞에서 울어야 돼요?”라고 반문했다. 

김씨는 문 전 후보와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에 대해선 ‘독설’ 수준의 말을 퍼부었다.

그는 “시대가 달라졌는데, 아직도 왕왕 대고. 내놓는 공약들이나 말하는 것 안에 김대중, 노무현뿐”이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갖다 바친 돈이 폭탄이 돼 돌아왔다. 그대로 꽁무니 따라서 쫓아간 게 노무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 전 후보를 반대한 것이냐’는 질문엔 “반대가 아니라 ‘형편없다’”고 답했다.

“그렇게 지원을 했기 때문에 점점 통일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는 분들도 있다”는 사회자의 말에는 “이 방송 빨갱이 방송이요?”라고 반발했다.

김씨는 안 전 후보에 대해 “처음에는 기대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정치”라며 “매일 떠드는데, 가만 보니까 깡통”이라고 말했다.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특별기고] '깡통' 운운한 김지하의 쓴소리(2012.11.19)


이념·역사관·전술로 뭉친 세력, '부드러운 개량주의'가 깰 수 있나
汎좌파 휘두르려다 덫에 걸려… 3위가 2위 상대로 베팅한 형국
근본주의 이념 세력이 떠오르면 '산토끼 담당'이었다고 깨달을 것

    
 류근일 언론인
김지하 시인은 왜 안철수 후보를 향해 "어린애 같다. 깡통이다" 했을까? 그 참뜻이 이제는 읽힌다. 안철수 후보는 '안철수의 생각'으로 '범(汎)좌파의 생각'을 능히 아우를 수 있다고 자신한 모양인데, 요즘 와서 보니 그게 영 '헛발질'처럼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는 처음엔 범좌파보다 훨씬 잘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겉으로는 저들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 범좌파의 덫에 걸리고 있다. '가치와 철학의 공유(共有)'라는 말부터가 통일전선의 블랙홀이다.

그렇다면 '안철수만의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신기루였다는 이야기다. 이미지였을 뿐 실체가 아니었다. 있다면 전략적 모호성뿐이었다. 그는 재래식 좌파처럼 모나게 나가진 않았지만, 크게는 그들이 하는 말을 '부드럽게' 각색하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안보'를 수사학적으로 얽어매는 식이다. 이 주식(主食)에 저 반찬을 곁들이는 것, 바로 작위적 모호성이었다. 그걸 사람들은 '안철수만의 길' '제3의 길'인 양 착시(錯視)했다.

이 착시 현상 아래서 그는 전략을 짰다. '안철수의 속생각'이었다. '범좌파와 민주당 울타리 밖에 엇비슷한 별채 하나를 짓는다. 너희가 그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대선에서 진다는 인식을 심는다. 그 인식에 힘입어 단일화 샅바싸움의 고삐를 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부산 대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후보 쪽이 세몰이를 했다. 발끈한 '안(安)의 엄포'가 있었고 이해찬 등이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사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운동가들은 들판으로 갈 때 오히려 더 왕성한 실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들 '떠나간 장고'는 '떠나는 척하는 장고'나 다를 게 없다.

안철수 후보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쯤에서 "낡은 것이 쇄신됐다"고 점수를 주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 '낡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누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찍어낸 원판 자체의 이념, 역사관, 전략전술, 체질, 문화의 틀(cultural pattern) 같은 것이다. 그 견과류 같은 알맹이가 까짓(?) '안철수의 생각' 정도의 '개량주의' 일격으로 하루아침에 깨졌다고 봤다면 그건 낙관적이다 못해 너무 어린 생각이다.

'안철수의 생각' 자체가 애초부터 이념 세력의 1대1 협상 맞수가 되기엔 그 짜임새부터가 촘촘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운동권 갑(甲)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나요?"라고 느끼는 을(乙)이었다. 그가 인생을 을 아닌 갑으로 살고 싶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맞는 제3의 길을 넓혀 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념 쪽 갑 사람들과 섞여 주도권 다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진한 물감과 옅은 물감이 섞이면 어떻게 되나? 프랑스 혁명기의 옅은 물감 지롱드당이 진한 물감 자코뱅당과 M&A를 해 대주주가 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안철수 후보는 더군다나 빌보드 차트 2위에서 3위로 밀렸다. 그런 3위가 2위를 향해 "내 말대로 안 하면…" 하고 베팅을 했다. 밑천보다 크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념 세력은 알면서도 순순히 져주었다. 아니 져주는 척하고 있다. 그쪽의 '대의(大義)'라는 기준에서 보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문(文)이냐 안(安)이냐 하고 싸우다가도 될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문 후보가 되면 좋지만, 안 후보가 돼도 '보쌈'해오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안 후보는 지금 이렇게 기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한 방 되게 쳤더니…." 물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설령 청와대행(行) 티켓을 딴다 해도 그에게 각계각층의 공직을 메울 자기 세력이 있을까? 결국은 1980년대 이래의 486, 노무현 키즈, 현장 운동가, 이념 폴리페서가 뻐꾸기처럼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선거 기간 잠잠하던 '진짜배기'들이 대망의 남북연합제를 향한 '2013년 체제'를 들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를 넘어서' 갈 것이다.

근본주의 이념 세력이 그렇게 '진짜 대주주'로 뜰 경우 그때의 안철수 공(公)은 이렇게 자문해 봄직하다. "나는 변혁 터줏대감들을 위한 '산토끼 담당'이었나?" 안철수 후보는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건 아닌지? "어린애 같다"고 한 김지하 시인의 쓴소리는 그래서 그에겐 고마운 경구(警句)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