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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7일 월요일

[조선일보]김정은 '냉·온탕 外交'… 초보 ? 중국 의식한 행동("대화하라는 中 요구 들어줬으니 우리 배려해 달라")?(2013.06.18)

[최근 외교행태 미숙함 논란]

외무성 대신 국방위서 불쑥… 非核化는 빼고 美에 대화제의
'형식적 대화제의 일단 해놓고 긴장 떠넘기려는 의도' 분석도

미국에 고위급 회담을 제안한 16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 중대 담화는 여러 면에서 의문점을 남겼다. 전통적인 대미(對美) 대화 창구인 외무성 대신 국방위가 나선 데다, 미국을 회담장으로 유인할 미끼에 해당하는 '비핵화' 이슈를 의제에서 사실상 빼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외교적 미숙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이 받든 말든 대화 제의 자체가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냉·온탕 오가는 북

북한은 3월 초부터 두 달간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한·미에 대한 핵 공격 위협, 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으로 한반도 주변의 위기지수를 급격히 끌어올리다가 지난달 중순부터 갑자기 '평화 공세'로 돌아섰다.


 지난 13일부터 평안북도 지역을 시찰 중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16일 ‘허철용이 사업하는 공장’을 찾아 공장 부설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공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군부 실세인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왼쪽)이 인민복 차림으로 서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했다
지난 13일부터 평안북도 지역을 시찰 중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16일 ‘허철용이 사업하는 공장’을 찾아 공장 부설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공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군부 실세인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왼쪽)이 인민복 차림으로 서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했다. /로이터 뉴시스
지난달 14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참모인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 참여(參與·자문역)의 방북을 허용했고, 8일 뒤엔 김정은의 측근이자 군부 실세인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중국에 보냈다. 지난 6일엔 한국에 당국 간 회담을 제의했고, 열흘 뒤인 16일엔 미국에 고위급 회담을 제안했다.

이를 두고 "잇단 도발로 고립을 자초한 북이 한·미·중 간의 세 차례 양자 정상회담을 전후해 한·미·중 3각 공조를 흔들려는 의도"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북한의 이 같은 '전방위 평화공세'는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서툴러 보이는 대화 제의

특히 미국과 대화 제의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서툴렀다"는 지적(국책연구소 연구원)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이수석 수석연구위원은 "과거 같으면 북한은 뉴욕채널을 통해 미국의 분위기를 살핀 뒤 전통적 대미 창구인 외무성을 통해 대화를 공식 제의했을 것"이라며 "이번엔 그런 과정 없이 난데없이 국방위원회가 나섰다"고 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도 "(국방위가 나선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북한은 또 미국에 대화를 제의하면서 예상 의제로 ▲군사적 긴장 상태 완화 ▲정전(停戰) 체제의 평화 체제 전환 ▲'핵 없는 세상' 건설을 들었다. 북·미 간 최대 현안인 비핵화 이슈를 제외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1월 23일에도 외무성 성명을 통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은 사멸되고 조선반도 비핵화는 종말을 고했다.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대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미국은 북한과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수 없는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여길 것"이라고 했다.

"대화 제의 자체가 목적인 듯"

전직 통일부 관리는 "북한이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이렇게 무성의하고 고자세로 나오진 않을 것"이라며 "대화를 던지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하다. 아마 얼마 후엔 러시아와 대화 소식도 들려올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대남·대미 대화 제의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란 견해도 있다. 지난달 방중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에게 시진핑 주석 등 중국 고위 인사들이 한결같이 '주변국과 대화'를 강조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북한은 중국이 한·미·중 3각 공조에 동참해 북한을 압박하는 것에 불만이 크다"며 "대화를 하라는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하라는 대로 했으니 중국도 우리를 배려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통일연구원의 정영태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의 외교 행보가 '의도적 좌충우돌'일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형식적으로 대화를 제의해 놓고 무시당할 경우 그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면서 군사적 긴장 고조의 빌미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전승절'로 기념하는 정전협정 체결일(7월 27일) 60주년을 앞두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같은 대형 도발을 일으킨 뒤 미국을 회담장으로 끌어내려는 전략일 수 있다"고 했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중앙일보]북, 탈북자 압송 전격 작전 … 납북 일본인 아들 숨기기?(2013.05.31)

일본 언론 “마쓰모토 아들 가능성”
스가 관방장관 “관계국과 확인 중”
탈북 도운 선교사와 친한 인권단체
“1년 함께 지내면서 그런 말 안 해”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즐기던 탈북 청소년 9명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체류하던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찍은 북한 청소년 9명의 사진. 휴대전화로 촬영했으며 신변 보호를 위해 얼굴을 가렸다. 이들의 한국행 시도를 도왔던 선교사는 사진 공개가 우리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진 MBC]

마쓰모토 교코

지난 28일 강제 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 가운데 납북 일본인의 아들 문철(23)씨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30일 제기됐다. 동아일보는 이날 “한국 정부가 이런 첩보를 입수해 진위를 확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교도통신과 TV아사히 등은 동아일보가 이런 보도를 했다면서 문씨에 대해 “1977년 납북된 일본인 여성 마쓰모토 교코(松本京子)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77년 당시 29세이던 마쓰모토는 돗토리(鳥取)현 요나고(米子)시 자택에서 뜨개질 학원을 가던 중 납치된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이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된 피해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납북자로 공식 지목한 17명 중 한 명이다.

 문씨가 마쓰모토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북한의 이례적인 움직임 때문이다. 북한은 탈북 청소년 9명이 라오스에 억류되고 있는 동안 요원을 파견하고 친북 인사를 라오스 이민국 심사에 참여시켜 관련 정보까지 캐갔다고 한다. 지난 20∼24일에는 라오스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 라오스 대표단을 평양으로 초청해 탈북청소년 귀환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탈북자를 북송하는 루트나 수단도 달랐다. 그동안에는 육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번 경우엔 라오스 비엔티안→중국 쿤밍→중국 베이징→북한 평양으로 비행기를 세 차례나 갈아타면서 24시간 이내에 북송작전을 전격적으로 마무리했다. 탈북 청소년 9명에 대해 관용여권 소지자 등 다수의 인원을 붙여 철저히 감시하면서다. 뭔가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 불가피한 이유가 납북 일본인 문제가 국제사회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게 일부 일본 언론의 주장이다.

  하지만 외교부는 아직까지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움직인 정황은 많지만 문씨와 마쓰모토 간의 연관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북송된 탈북 고아 중 납북된 일본인의 아들이 포함됐느냐”는 질문에 “우리 정부가 아는 바는 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당국자도 “그런 소문은 들었지만 정확한 정보는 없다”고 했다.

 물론 문씨가 납북 일본인의 아들일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도 있다. 탈북 청소년 9명을 탈출시킨 선교사 주모씨와 긴밀히 연락해 온 정베드로 북한인권단체연합회 사무총장은 “주 선교사가 1년 이상 문씨를 데리고 있었는데도 납북 일본인의 자녀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며 “납북 일본인 자녀가 있었다면 일본 쪽을 통한 탈출 방법도 강구했을 텐데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일본과 관련이 있었다면 당연히 중국 선양 주재 일본 대사관에 진입하거나 일본 측 외교관과의 접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란 얘기다. 라오스 정부가 조사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와 관련한 정황을 파악했다면 이를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일본인 납북은 재일동포 북송사업 와중에서 불거졌다. 59년 시작된 북송사업으로 20여 년간 9만3000여 명이 북한으로 갔다. 이 중엔 일본인 처 1800여 명이 포함됐다고 한다. 이들은 9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고향인 일본을 방문했으나 2002년 이후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북·일 간 갈등 요소로 떠오르면서 중단됐다.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는 “이번 탈북 청소년들은 6개월에서 수년간 국경 근처에서 먹을 것 없이 떠돌던 이들로 북한 당국이 특별 관리하는 납북자일 가능성은 낮다”며 “ 문씨가 일본인의 자녀라고 해도 마쓰모토의 자녀가 아닌 다른 북송 일본인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납치 일본인과 북송 일본인 처는 현격히 다르다”며 “탈북 청소년들이 라오스까지 탈북에 성공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통제가 엄격할 납치 일본인의 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본은 관련 보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TV아사히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관련 보도가 사실일 가능성에 주목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오전 브리핑에서 “관계국과 연결을 취하는 등 외교 루트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 이 시점에서 (사실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답변드리기는 힘들다”면서 “어쨌든 정부로선 모든 납치 피해자의 생존을 전제로 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조선일보]"日 정치인들 역사에 無知… 언론은 妄言에 비판 안해"(2013.05.23)

도쿄신문 '日 정치인들 망언 남발하는 까닭은' 특집기사


일본의 유력 정치가들이 경쟁적으로 일본군 강제 동원 위안부를 모욕하고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망언(妄言)을 남발하는 이유는 뭘까. 일본 도쿄(東京)신문은 22일 특집기사〈사진〉를 통해 정치인들의 망언 릴레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 '아시아에 대한 우월 의식' '국제적 인권 의식 결여' '자정 기능 정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우선 전쟁 체험 세대가 대부분 은퇴한 데다 현역 세대는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망언을 망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우익 단체 '잇스이카이(一水會)'의 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 고문은 "일본이 과거 무엇을 했는지 아는 정치인이 없는 데다 현역 정치인들은 역사를 배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도쿄신문은 전했다.

도쿄신문은 "망언에 대한 자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는 일본 언론의 책임도 크다"고전했다. 실제 일본군 강제 동원 위안부 발언과 관련, 극우 산케이(産經)신문뿐만 아니라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요미우리(讀賣)신문도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증거는 없다"는 식으로 사실상 망언을 옹호했다. 대다수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유력 정치인이 망언을 해도 정면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 스즈키 고문은 "시민도, 언론도 (망언에 대해) 이상하다고 좀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적인 인권 의식도 결여됐다.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도쿄대 교수는 "정치가들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역사관과 인권 의식이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망언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비판은 무시하다가도, 미국이 강력하게 비판하면 한발 물러서는 등 민감하게 반응한다. 중국과 한국의 성장을 인정하지 않고 싶은 '우월 의식'이 배경이다.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유일하게 성공, 서구의 일원이 됐다는 19세기 말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적 사고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망언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외압(外壓)'으로 보는 여론도 문제다. 망언을 계속하면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가라는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우치다 다쓰루(內田樹) 고베여자대학원 명예교수는 "전후 68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시스템은 간단하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다. 

2013년 5월 17일 금요일

[동아일보][토요판 커버스토리]일본 우경화의 심연 ‘天皇制’(2013.05.18)


일본 사회에 우경화의 격랑이 몰아치고 있다.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료와 의원들이 줄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왕을 처벌하지 못했고, 군국주의 세력 청산에 실패한 것이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28년 11월 10일 대관식 때 히로히토 일왕.

무쓰히토(睦仁·연호는 메이지·明治) 일왕의 장례일인 1912년 9월 13일 오후 7시 40분. 러일전쟁을 이끌었던 일본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부인과 함께 벽에 걸린 일왕의 사진 밑에 정좌했다. 그가 일본군도로 자신의 배를 십자로 긋고 할복하자 부인 시즈코(靜子)는 호신용 칼을 심장에 대고 앞으로 엎어져 자결했다. 1877년 벌어졌던 내란 ‘세이난(西南) 전쟁’에서 일왕이 준 연대 깃발을 빼앗긴 죄를 용서해준 것에 대해 죽음으로 보답한 것이었다. 노기 장군의 할복 자결은 일본 메이지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면서 이후 제국 군대에 큰 영향을 줬다. 전국 각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신사가 세워졌고 근대화 시기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는 ‘마음’이라는 작품에서 그를 기렸다.

노기 장군의 일화는 일왕이 근대 일본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다. 이런 일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은 군국주의 이념의 토대가 됐고, 침략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왕은 실제 권력을 내려놓고 ‘상징’으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숭배자들의 충성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 11월 25일. 대장성 관료를 지낸 엘리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일왕 숭배모임 회원들과 함께 도쿄(東京)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난입했다. 총감실을 점령하고 발코니에 나가 일왕에 대한 충성과 자위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그는 “천황(天皇) 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할복 자살했다. 일본군 장교가 일왕을 다시 옹위하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하다 미수에 그치자 할복한다는 내용의 자신의 소설 ‘할복’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11월 25일은 1926년 히로히토(裕仁·연호는 쇼와·昭和) 일왕의 쇼와 시대가 시작된 날이었다.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거나 일왕을 비판한 인사는 우익의 테러를 면치 못했다. 군국주의 일본을 이끌었던 히로히토 일왕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88년 12월 7일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나가사키(長崎) 시의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이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일왕 표기: 동아일보는 일본의 왕을 일왕(日王)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직접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天皇)이라고 돼 있는 경우, ‘천황제(天皇制)’를 설명할 때만 천황이라고 표기했습니다.


▼ 年1회만 직접 회견… 말걸기 금지, 10m내 촬영 금지 ▼

“나의 군대생활 경험에서 볼 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우익의 총격 테러로 중상을 입었다. 1960년 꿈에서 일왕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소설을 연재한 시사월간지 주오고론(中央公論) 사장도 이듬해 피의 보복을 당했다. 집에 침입한 우익 테러범이 가정부를 살해하고 부인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히로히토 일왕이 1989년 1월 7일 세상을 떠나자 일본 전체가 숨도 쉬기 어려운 자숙(自肅) 분위기에 빠졌던 것은 당연했다. 상가는 철시했고 모든 행사는 취소됐다. 당시 문을 연 가게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화염병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한류(韓流) 열풍이 차갑게 식고, 서울 명동과 남대문시장을 누비던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든 근본 원인으로 지난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사죄 요구 발언을 한 점을 꼽는 전문가가 많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과거사를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왜곡하고 나선 것도 일왕의 존재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이 과거사를 인정하고 책임을 명확히 하면 일왕의 전쟁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아키히토(明仁·연호는 헤이세이·平成) 일왕은 조선 합병에 관여한 무쓰히토 일왕, 3·1운동 뒤 문화통치를 펼친 요시히토(嘉仁·연호는 다이쇼·大正) 일왕, 군국주의와 침략 전쟁의 선두에 선 히로히토 일왕 등 선대 일왕들과는 다르다. 일본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의 발언에 일본 국민이 더 반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기억의 단절이다. 대다수 일본 국민은 현재의 일왕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화, 희생과 헌신을 떠올리지만 선대 일왕의 전쟁 책임은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1948년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돼 처벌을 받았다면….

전후 연합군 점령 종료 후에도 자기 손으로 나치 전범을 계속 추적해 10만 건 이상의 전범 용의자를 수사하고 6000건 이상의 유죄 판결을 내린 독일식 과거사 청산이 일본에서라고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도 어쩌면 용서와 화해의 출발점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일왕은 일본인 정체성의 상징 

도쿄 지요다(千代田) 구 지요다 1-1. 일왕의 거처인 고쿄(皇居)의 주소로 도쿄 도심 정중앙이다. 일반인은 사전에 신청을 하면 고쿄를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일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일인 12월 23일과 새해 둘째 날인 1월 2일뿐이다. 

영상 10도를 웃돌 정도로 포근했던 올해 1월 2일 오전 고쿄를 찾았다. 입구에는 끝없이 일본인들이 몰려들었고,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등 5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서도 버스들이 왔다. 한 우익단체 회원들은 무료로 일장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일왕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검문. 금속탐지기를 통과한 뒤 여경이 거의 몸을 더듬는 수준으로 구석구석을 체크했다. 그 뒤에는 정해진 구역에서 줄을 서야 했다. 대략 10열 종대. 줄에는 노인만 있는 게 아니다. 20대 연인들이 손을 잡고 서 있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목말 태운 가족도 보였다. 이들은 경찰의 지휘를 받으며 고쿄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두 개 건너야 고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에게 떠밀려 자연히 앞으로 이동한다. 

갑자기 ‘와∼’ 하는 탄성이 울려 퍼졌다. 아키히토 일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궁전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일제히 일장기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일왕과의 눈 맞춤을 통해 그들은 “우리는 일본인”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일왕의 위상은 ‘살아있는 신(神)’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일왕은 여전히 일본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초중고교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국가다.

일명 기미가요(君が代).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황의 치세는 천대에서 팔천대까지(이어지리라)/조약돌이 반석이 되어/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일본의 모든 일간지는 매일 한 건 이상씩 일왕 부부의 동정을 싣고 있다. 일왕에 관한 기사는 보통 기사와 달리 ‘…하시었다(された)’는 식의 경어를 쓰고 있다. 일부 진보지가 평어체로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일왕에 대한 기사 비중이 커져 독자의 주목도가 높아질 때는 역시 경어를 쓴다. “무례하다”는 독자들의 항의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왕실업무를 전담하는 궁내청 등록기자는 300∼400명. 총리실 등록기자 수(380명)에 맞먹는 규모다. 궁내청 장관과 차장, 왕세자를 담당하는 동궁 대부가 정기적으로 기자회견을 하지만 일왕을 직접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족에게 말을 거는 것도 금지돼 있다. 일왕은 연 1회 생일 때만 직접 기자회견을 한다. 이때도 1개월 전 미리 질문서를 제출해야 한다. 사진 취재도 대개 10m 이상 떨어진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모두 망원렌즈를 사용하고 있다. 

사회지도층으로 올라갈수록 일본은 일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국가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총리, 중·참의원 의장, 최고재판소 장관 등 국가 삼권 수장이 일왕에게서 임명장을 받는다. 해외로 나가는 대사와 공사도 일왕의 신임장을 주재국에 전달한다. 헌법에 정해진 일왕의 국사(國事) 행위다. 일왕의 지방 방문 때는 현(縣) 지사와 현 의회 의장이 일왕 부부를 수행한다. 국민체육대회나 각종 문화행사에서도 일왕은 자리를 지킨다.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일왕의 훈장을 받는 걸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일반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천황이라는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모두 천황과 연을 맺게 되고 항상 의식하게 된다.” 왕실담당 기자의 말이다.

연간 25차례 치르는 궁중제사도 국사는 아니지만 일왕의 핵심 업무다. 조상신을 비롯해 천지신명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로 집행 장면은 일절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 궁중제사는 ‘천황제’의 역사적 영속성을 담보하는 핵심 장치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일왕의 존재는 일반 국민의 삶 곳곳에도 스며들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일본인 교수는 본보 인터뷰에서 “신사참배 등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은 일본인의 생활에 눈에 안 보이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느낀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가 바로 천황이다”라고 설명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일왕의 존재감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당시 간 나오토(菅直人) 정권이 원전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허둥대 국민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이때 아키히토 일왕이 결연한 목소리로 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는 장문의 비디오 녹화 메시지를 발표했다. 국민들은 이 메시지를 통해 ‘이 나라에는 천황이 있다. 용기를 갖자’는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천황제가 없는 일본은 어떻게 되나”라고 묻자 한참을 고민하던 교수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우경화의 포로가 된 아키히토 일왕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헌정기념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국의 점령이 끝난 이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주권 회복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올해로 61년째이지만 정부 주최 기념식이 열린 것은 처음. ‘상징 천황’인 일왕은 내각이 참석을 요구하면 이를 거절할 권한이 없다. 

이날 행사는 ‘주권 회복’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초안을 잡은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출정식 자리였다. 행사가 끝나고 일왕 부부가 단상을 빠져나가려 할 때 단상 아래에서 누군가가 “천황폐하 만세”를 선창했다. 이를 따라 아베 총리 등 주요 참석자들도 만세 삼창을 했다. 군국주의 문화의 상징이었던 ‘천황폐하 만세’가 정부 행사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아베 정권이 일왕 부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일왕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우경화 세력이 일왕을 등에 업고 폭주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45년 9월 27일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찾은 히로히토 일왕(오른쪽)이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을 뒤로 한 채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맥아더 사령관과 두 손을 반듯하게 내린 채 긴장한 표정의 히로히토 일왕이 대비된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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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을 국가의 중심으로 규정한 제국헌법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와 장기 경기침체는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는 토양이 됐다. 일본 사회 전반에 위기감이 커지자 전후 “미국이 심어놓은 사회시스템과 교육체계가 잘못됐다”며 일본인 중심의 ‘국민의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직적으로 확산됐다. 자칭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그룹이 역사 왜곡 교과서 제작에 나섰고 일본의 근대사를 반성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자학(自虐)사관’이라고 공격했다. 

일본 의회는 1999년 히노마루(日の丸)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2005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을 기리는 ‘쇼와의 날’을 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베 1차 정권 때인 2006년에는 연합군 점령기 때 만들어진 교육기본법을 59년 만에 개정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했다. 지난해 말 출범한 아베 2차 정권은 마침내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한 자민당 헌법 초안을 바탕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의 이런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정해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조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1952년 4월 28일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1조는 ‘일본국은 극동군사재판소 및 일본국 내외의 전범에 대한 판결(judgement)을 수락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어떤 조건도 없이 도쿄 전범재판의 판결내용을 수용한 셈이다. 이는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를 승인함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일왕의 전쟁 책임 추궁이 고도의 정치판단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가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 게이오대 법대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후 고도성장기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소득을 배증하겠다며 국민을 통합했다. 지금 아베 총리가 일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국민을 통합하고 불만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비용이 가장 적게 들어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주도한 ‘실질적 통치자’ 히로히토 일왕

히로히토 일왕은 1901년에 태어나 1926년에 일왕이 됐다. 19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63년간 일본에 군림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평생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외면했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800자의 ‘대동아전쟁 종결조서 선언문’에서부터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범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1975년 10월 31일 궁내청 기자회견. 히로히토 일왕이 미국 방문 때 백악관 만찬 석상에서 “내가 깊이 슬퍼하는 그 불행한 전쟁”이라고 한 말을 인용해 한 기자가 “이는 천황이 전쟁 책임을 느끼고 있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일왕은 “그런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서는, 나는 그런 문학 방면은 그다지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도 이를 뒷받침했다. 1945년 8월 28일 미군 제1진이 상륙하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당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일억 총 참회론’을 펼쳤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정부의 정책이 옳지 못했던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국민이 도의에 어긋난 것도 원인이다. 이참에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해야 한다.” 전쟁은 모두가 나빴기 때문으로 일왕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심지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은 다음과 같은 정부 담화를 내놓았다.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세계의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일편단심으로 기원하시고 날마다 몸소 실천해 왔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에서 전쟁의 참화로 괴로워하는 국민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결심하셔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 종결의 영단을 내리셨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일본은 ‘일본제국헌법’을 채용하고 있었다. 제국헌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일왕은 실제 일본제국의 통치권자였다. 문무관의 임명, 육해군의 통수권, 선전·강화 및 조약체결 등 군사 외교와 관련된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히로히토 일왕은 통수권을 적극 행사했다.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옹호하는 칙어를 내렸고 1941년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조서에 서명했다. 일본군은 ‘천황폐하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아시아를 유린했다.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였던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히로히토 일왕의 일생을 추적해 2000년에 내놓은 저서 ‘히로히토 평전: 현대 일본사회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은 반성 없는 생애를 살았다”고 비판했다. 이 책은 이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빅스 교수는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에서 화학무기와 최루탄 사용을 375차례 허가했고, 식민지 국민과 전쟁포로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 창설을 재가했다”고 고발했다. 또 그는 “히로히토 일왕은 명목상의 인물이나 소극적인 방관자, 황실 고무도장이나 서류에 찍는 무기력한 인물이 아니었다”며 “책임의 한계는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폭넓은 군사지식을 갖춘 간섭주의 성향의 역동적 군주였다”고 강조했다. 

일왕의 책임을 국무대신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헌법 3조에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라고 못 박은 데 이어 55조에 ‘국무대신이 일왕의 의사결정을 보필한다’는 도피 규정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왕의 통수권은 국무대신의 보필에서 독립돼 있었다. 그 근거는 1882년 메이지 일왕이 내린 군인칙유(軍人勅諭)였다. 칙유는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기치(美濃部達吉)는 ‘헌법찰요’(1927년)에서 통수권의 독립 운용에 대해 ‘군국주의의 폐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천황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헌법상의 한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라는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주장하다 1935년 귀족원에서 물러나고 다음 해 격분한 우익의 총탄에 중상을 입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에게 있음은 우리 국체(國體·천황과 그의 신표인 곡옥, 거울, 검 등 3종의 신기)의 본의이며 제국 신민(臣民)의 절대 부동의 신념이다”는 내용의 ‘국체 명징(明徵)에 관한 정부 성명’을 냈다. 

일본 지도부도 얼떨결에 일왕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육군대장은 도쿄 전범재판 때 군부의 의사결정과 관련해 무심코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자신과 군부가 일왕의 뜻에 따라 침략전쟁에 나섰다고 인정한 대목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현 부총리는 외상이던 2006년 1월 일왕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하면서 “영령은 천황폐하 만세라고 했지, 총리 만세라고 한 것은 아니다. 천황 폐하가 참배하는 게 제일 좋다”고 말했다. 영령들이 일왕의 뜻을 받들어 전쟁터로 갔다는 의미다.


히로히토에 대한 면책, 일본 우경화의 기반 제공

제2차 세계대전 3대 전범국가 지도자 중 히틀러 독일 총통은 자살했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는 반(反)파시스트 유격대원에게 살해됐다. 유일하게 히로히토 일왕만 처벌을 면했다. 그 이면에는 미일(美日) 간의 거래가 숨어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은 점령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을 맞바꿨다.

1945년 9월 27일 아침. 히로히토 일왕은 중산모를 쓰고 정장 예복 차림으로 붉은색 롤스로이스에 몸을 싣고 궁을 나섰다. 그의 이름은 연합군 전범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었다. 

차가 멈춘 곳은 미국 대사관저 앞. 히로히토 일왕이 차에서 내리자 맥아더 사령관이 악수를 청하며 그를 맞았다. 두 사람은 대사관의 큰 거실에서 나란히 선 채 석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일왕을 이처럼 가까이서 찍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에서 히로히토 일왕은 안경을 낀 채 모닝코트와 줄무늬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채 차렷 자세를 취했다. 키 큰 맥아더는 제복 셔츠의 윗 단추를 푼 채 두 손을 엉덩이에 얹은 느긋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며칠 뒤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패전의 고통을 실감하면서 일왕이 곧 퇴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신(神)이라는 일왕의 가면을 벗기려는 포석과 함께 나약한 일본 왕의 모습을 연출해 전쟁 책임을 면제해 주려는 맥아더의 치밀한 ‘점령작전’이 깔려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두 사람은 회담 장소로 향했다. 일본 측 통역관 1명만 배석한 채 회담은 40분간 이어졌다. 회담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통역관의 수기가 1975년 언론에 공개됐다. 

히로히토: “앞으로는 평화의 기초 위에 신일본을 건설하기 위해 나 역시도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하겠습니다.”

맥아더: “그건 숭고한 마음입니다. 나도 같은 마음입니다.”

히로히토: “포츠담 선언을 정확히 이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시종장을 통해 각하에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맥아더가 당초 면담을 거부하자 시종장을 통해 점령정책에 충실하게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전달했다. 이날 만남에서 일왕은 천황제 존속을 위한 ‘빅딜’에 성공했다. 패전 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일왕은 이날 회담 이후 잠을 잘 잤다고 한다.
2011년 4월 27일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미야기 현 미나미산리쿠의 대피소를 찾아 이재민을 위로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 히로히토 戰犯 명단서 빠지며 국군지도부도 대거 생존 ▼

1945년 6월 초 갤럽의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7%는 일왕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의 회담 직전인 1945년 9월 18일에는 일왕을 기소해야 한다는 합동결의안 94호가 미 상원에 제출됐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일왕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맥아더가 도쿄에 도착하기 전 700만 명의 육해군을 무장해제했다. 맥아더는 일왕에 대한 국민의 충성심을 역이용하면 점령정책이 수월해지고 일본을 개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맥아더는 일왕의 신성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45년 12월 15일 천황제 신앙의 기틀인 국가 신도(神道)를 해체한 데 이어 보름 뒤인 1946년 1월 1일에는 일왕이 신이 아니라는 ‘인간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맥아더는 1946년 1월 25일 연합군 총사령부 명의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일왕 불기소 방침을 굳혔다. ‘일왕에 대한 전범재판을 하면 점령계획을 변경해야 하며 일본인들이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로 인해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100만 명의 군대와 수십만 명의 행정관과 전시보급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11개국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국제검사국(IPS) 집행위원회는 같은 해 4월 5일 28명의 피고 명단(A급 전범)을 작성했지만 히로히토 일왕의 이름은 제외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2일 도쿄 전범재판 선고에 따라 도조 히데키 전 육군대장 등 7명의 교수형이 한 달 뒤인 12월 23일 집행됐다. 이날은 아키히토 현 일왕의 생일이기도 했다.

수십 년간 히로히토를 연구한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간세이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저서 ‘히로히토와 맥아더’에서 “도쿄 재판은 주역을 빼놓은 채 도조 일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미일의 합작품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후 일본에서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사실상 터부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왕이 ‘상징 천황’으로 살아남고 냉전 기류에 편승해 군국주의 지도부도 대거 살아나 복권됐다. 이들과 후손이 그대로 일본 정계를 주도하면서 군국주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도 만주국(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에 세운 괴뢰국가) 고관을 지내고 전범으로 기소됐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나치 범죄에 대해 독일은 세대를 이어 영원히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전후 일왕의 전쟁 책임을 묻지 못한 채 우경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역주행과 뚜렷이 대비되는 대목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통석의 염’

처음부터 상징 천황으로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과는 크게 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1975년 왕세자 신분으로 미군이 반환한 오키나와(沖繩)를 방문했을 당시 그는 화염병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한 모습으로 오키나와 방문을 끝까지 마쳤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던 일본의 좌파세력까지 그에게 매료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1989년 왕위를 계승한 그는 1992년 중국을 방문해 과거사에 유감을 표시했다. 2005년 6월에는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오키나와인과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에 참배했다. 사이판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과 연합군의 격전 끝에 7만500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숨진 곳이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에서 그는 “우리나라로 말미암은 불행한 시기에 귀국 여러분이 고통을 맛본 걸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또 아키히토 일왕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저널리스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방문은 일왕의 희망 사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역사교과서 문제로 양국 간 갈등이 증폭되던 2001년 12월에 그는 “간무(桓武·737∼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발언했다. 간무 일왕의 명을 받들어 만든 속일본기에는 간무 일왕의 생모인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전하며 백제의 건국신화도 싣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2003년 12월 “내 생애 가장 슬펐던 일은 300만 명 이상의 일본인과 수많은 외국인 희생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 더욱 힘들었다”고 말했다. 2004년에는 기미가요 제창과 히노마루 게양을 강제화한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강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은 1933년 생으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어린 나이에 패전을 경험했다. 1946년부터 4년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서 영어와 함께 민주주의 이념을 배웠다. 그 영향인지 아키히토는 당시 기독교계  대학을 나온 평민 미치코(美智子)와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다 결혼했다. 

이후 그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경호가 삼엄했던 선왕과 달리 외출 때 교통신호 통제를 폐지하고 수행원도 최소화했다. 재해현장에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일왕 부부는 사소한 것도 상대를 배려한다. 차안에서 인사할 때도 아키히토 일왕이 항상 더 고개를 많이 숙인다. 한 컷에 일왕 부부를 모두 찍으려는 사진기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다. 고개를 똑같은 각도로 숙이면 함께 앉은 왕비의 얼굴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 기자는 “아키히토 일왕은 좌우 모두에게서 사랑받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까지 수습하면서 황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되찾은 셈이다”라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과거사 문제 등에서 오히려 우익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동정론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변화하는 왕실, 왕실 스캔들은 잡지 단골소재 

일본 천황제는 기원전 660년 진무(神武) 일왕 때부터 시작됐다고 고사기(古事記·712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에 적혀 있다. 진무 일왕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천상계를 지배하는 여신의 후손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진무 일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에도(江戶) 말엽 존왕양이(尊王攘夷)파가 “진무 창업 정신으로 돌아가자”며 왕정복고를 주장하면서 진무 일왕의 건국 신화를 부각시켰다.

천황으로 호칭된 최초의 인물은 덴무(天武·재위 673∼686년) 일왕이다. 그는 율령(律令)체제를 완성하고 왕족 중심의 전국 통치기구를 정비한 인물이다. 스스로를 신격화했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섬기는 이세(伊勢)신궁을 국민이 받들게 했다. 그가 일왕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가 고사기와 일본서기다.

일왕은 12세기 말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서면서 권력을 상실한 뒤에도 막부가 끝난 19세기 말까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권자는 막부를 통솔하는 쇼군이었다.

1867년 메이지 정부를 세운 주도 세력은 지방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본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식 국가체제와 국민 통합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였다. 일본은 신국(神國)이고 일왕은 신이며 일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868년 메이지 정부는 불교의 영향 안에 있던 토속신앙인 신도를 분리하고 이를 통해 일왕의 신격화를 본격화했고, 헌법에 일왕 가문의 통치를 명문화했다. 일본 민족 전체가 순수하고 유일한 가문인 일왕가에서 유래하며 일왕이 일본 민족 전체의 가장이라는 뜻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1882년 군인칙유와 1890년 교육칙어를 통해 강화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경험을 통해 확실히 정착됐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패전 후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 선언’과 함께 해체됐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일왕은 56대 고레히토(惟仁) 일왕 이후 125대인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까지 여덟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히토(仁)를 이름에 쓰고 있다. 이는 같은 집안의 남자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한국에서 형제간에 ‘돌림자’, 즉 항렬(行列)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 풍습이 전래된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일본 왕실도 급변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에 이어 장남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도 외교관 출신의 평민인 마사코(雅子)와 결혼했다. 왕세자의 조카이지만 왕실의 유일한 손자로 나루히토 이후 일왕 승계 1순위로 꼽히는 히사히토(悠仁)는 올해 ‘평민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왕족 자녀가 평민 초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다.

시사잡지와 여성지는 왕실 기사를 연예인이나 정치인 스캔들 다루듯 매주 보도하고 있다. 추측 보도도 난무하고 있다. 특히 나루히토 왕세자의 아내인 마사코 왕세자빈은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적응장애를 이유로 10년째 요양하자 “공무를 게을리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학자인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81) 씨는 3월 공개적으로 왕세자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궁내청은 홈페이지에 각종 언론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를 올리며 대응하고 있다.

천황제가 사라질 것으로 보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왕실의 위상은 앞으로 왕실의 인기와 국민의 지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리라는 게 많은 일본인의 생각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우경화의 심연(深淵)에는 천황제가 있고, 일부 우익세력이 상징 천황인 일왕을 우경화의 동인(動因)으로 악용하는 데 대해 뜻있는 일본 지식인들의 개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쿄=배극인·박형준 특파원 bae2150@donga.com

2013년 4월 9일 화요일

[조선일보][사설] 북이 미사일 도발하고 일본이 요격한다면(2013.04.09)


북한이 탄도미사일 '무수단' 2기를 이동식 발사대에 실어 동해안으로 이동시켰다.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은 북한이 이 미사일을 10일을 전후해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무수단은 사(射)거리가 3000㎞에 달한다. 북한이 실제로 이 미사일을 동해 쪽으로 최대 사거리까지 발사하면 일본 영토 상공을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북은 아직까지 미사일이 떨어질 지역에 항행 금지 구역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민간인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또 한 번의 막가는 도발이다.

일본은 북 미사일이 자기네 영토를 지나가게 되면 요격을 시도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이미 탄도미사일 요격용 SM-3 미사일을 실은 이지스함 2척을 배치했다. 탄도미사일 요격은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강행하고 일본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를 요격할 미사일을 발사하게 되면 그 자체로 준(準) 군사 충돌이라고 봐야 한다. 북한발(發) 위기의 파고(波高)가 한 번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본의 요격이 성공하면 북한의 속성상 그 화풀이를 하려 들 것이고, 그 대상으로 우리를 겨눌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 로켓 발사로 유엔 제재를 받고 있는 북이 이제 대놓고 미사일을 발사하면 유엔은 다시 더 강도 높은 제재를 내놓게 될 것이다. 북이 다시 반발해 도발할 경우 그 대상도 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개성공단의 조업을 중단시킨 북이 미사일까지 발사하게 되면 위기 조장을 위해 준비했던 카드는 대부분 소진하게 된다. 그 경우 북한은 출구 전략을 찾든지, 아니면 국지(局地) 도발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지 선택해야 한다. 북한 지도부가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면 자멸(自滅)로 이어질 수도 있는 국지 도발은 피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 지도부가 보여주고 있는 어지러운 걸음걸이만 보고 다음 행보를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북한 조선아태평화위는 9일 "남한 내 외국인들은 사전 대피 대책을 세우라"고 협박했다. 지금 최선의 대응은 의연한 대처로 북한이 도발할 핑계를 일절 주지 않으면서, 실제 도발이 불러올 파멸적(破滅的) 사태를 북이 그냥 흘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예방적 대응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조선일보]美·日, 이지스함에 배치된 SM-3 미사일로 요격 태세(2013.04.10)


北, 동해서 무수단 미사일 발사 땐…

미국의 SM-3 미사일
북한이 10일 중거리 탄도미사일 무수단을 발사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일본과 미국의 요격 가능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무수단의 최대 사정거리는 3000~4000㎞로 괌까지 사정권에 두기 때문에 최대 사정거리 가까이 발사될 경우 일본 열도를 넘어가게 된다. 그럴 경우 북 미사일에 대한 요격 명령을 내린 일본이 실제로 동해상에서 요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본이 동해상에 배치한 이지스함 2척에 장착된 SM-3 요격미사일은 최대 150~500㎞ 고도에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군 소식통은 "무수단이 최대 고도 300 ~400㎞에 이르기 전에 일본 이지스함의 SM-3 미사일이 요격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무수단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가더라도 일본 영공(100㎞ 안팎)보다 훨씬 높은 고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북 미사일이 실수로 일본 열도에 떨어지기 전에는 실제 요격에 나설 가능성이 작다는 분석도 나온다.

SM-3 미사일이 발사되더라도 요격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미 국방부는 2001년부터 SM-3 미사일을 이용한 요격시험을 30차례 실시해 24번 성공했다. 80%의 성공률이지만 가짜 탄두(彈頭)를 식별하는 문제 등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북 미사일이 괌을 겨냥하게 된다면 미국도 요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수주 내에 고도 150㎞에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방어체계를 괌에 배치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배치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따라 미국이 실제 요격에 나선다면 일본처럼 이지스함에 배치된 SM-3 미사일이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이 실제 괌 가까이 떨어질 정도로 미사일을 쏜다면 진짜 전쟁 도발 행위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고 말했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크리스천투데이]한희봉, 원폭 피해자 위한 기도회 “제2의 3·1운동 펼치자”(2013.02.27)


조용기 목사, 설교에서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 희망 되자” 강조

▲3.1절을 기념해 열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새에덴교회 본당에서 열렸다. ⓒ이동윤  기자

제94주년 3·1절을 기념해 일본군 ‘위안부’·원폭 피해자와 함께하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27일(수) 오전 10시 30분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에서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이하 KD)과 한일기독의원연맹(대표회장 김영진 장로) 공동주최로 개최됐다. 참석자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피해자 가족의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며, 일본정부의 조속한 사죄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촉구했다.

이날 기도회는 소강석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김영진 대표회장의 기념사, 김명규 장로(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의 대표기도,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의 설교,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의 인사, 손인웅 목사(KD 법인이사장)의 환영사, 황우여 의원(새누리당 대표)의 격려사, 김정록 의원(새누리당)의 원폭특별법 취지 설명, 최희범 목사(KD 총무)의 선언문 발표, 장상 목사(전 국무총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조용기 목사가 설교를 전하고 있다. ⓒ이동윤 기자

조용기 목사는 설교에서 “3·1운동은 일제가 한국를 정신적·문화적으로 말살하려는 시기에 이 일어나, 잠들어 있던 민족을 깨운 사건”이라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는 이제 제2의 3·1운동을 일으켜 의식 개혁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전했다.

조 목사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이 횡행한다. 비판하고 서로 헐뜯고,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다고 낙담한다. 하지만 암울한 일제 시대 때 교회는 시대의 소망을 노래했고, 3·1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들도 기독교 인사들이 다수였다”며 “하나님은 꿈과 희망을 주시는데, 불가능한 절망은 없다. 한국교회가 희망의 바이러스를 전파하자. 우리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은 긍정의 메시지를 말하는 교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김정은과 북한정권이 핵실험을 하고 좌파 세력들이 선동하고 한국교회를 공격하는 등 우리 사회가 어지럽다. 그러나 김정일도 온갖 협박과 공갈로 위협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북한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통일도 곧 올 것이고, 한국교회가 뭉쳐 통일을 대비하고 우리나라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긍정의 힘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킨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꿈을 말하면, 꿈이 우리를 이끌 것이다. 믿음은 꿈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꿈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참석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용기 목사, 김삼환 목사, 손인웅 목사, 김영진 장로. ⓒ이동윤 기자

김삼환 목사는 “우리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돌아보며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평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평화기도회에 참석했다”며 “어렵고 힘든 싸움을 고통 속에서 담당해 온 원폭 피해자 가족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 일본 정부는 불법적으로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의 그날까지 우리의 기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희범 목사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기도회 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언문은 “그동안 일본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않고 있다. 오히려 일본의 국회의원·언론·정부 각료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등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은 위안부 등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와 참회를 하지 않으므로 몰염치한 국가일 수밖에 없다. 또 원폭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적절한 보상이나 복지혜택을 받고 있지 않다”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한국 정부와 국회에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인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황우여 의원(새누리당 대표)은 “이 자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와 원폭 피해자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라며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 일본이 자신들이 강제로 하지 않았다고 궤변을 하는가. 반드시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함께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자”고 했다.

김영진 장로는 일본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반성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 높은 담처럼 놓인 현안들을 하루빨리 해결해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가 오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600만 골목상인 "일본 제품 안 판다"(2013.02.26)


“일본제품 불매운동 하겠다” vs “경제·외교적 실익 있나”

일본이 지난 22일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강행한 데 반발해 국내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이 대대적인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회원이 600만 명인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은 25일 “80여 개 직능단체와 60여 개 소상공인·자영업단체, 시민단체 등과 함께 3월 1일부터 일본 제품을 일절 취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연맹 측은 초기엔 외식업중앙회(42만 명), 담배판매인연합회(14만 명), 노래방연합회(5만 명), 인터넷PC문화협회(6만 명)를 합한 60만 명 수준이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엄태기 연맹 행정실장은 “소속 회원과 가족, 비회원 업체까지 독려해 약 1000만 명이 불매운동에 동참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매운동 대상은 ‘마일드세븐(담배)’ ‘아사히(맥주)’ ‘니콘(카메라)’ ‘유니클로(의류)’ ‘도요타·렉서스(자동차)’ ‘소니(전자제품)’ ‘혼다(자동차·오토바이)’ 등이다. 소비재부터 공산품까지 다양하다. 현재 연맹 소속 자영업자들은 국내에 유통되는 일본 제품의 80%가량을 취급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민간 차원의 대규모 일본 상품 불매운동은 드문 일이다. 1920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품 대신 국산품을 쓰자고 한 ‘물산 장려 운동’이 최초다. 해방 이후 뜸했던 불매운동은 2000년대 들어 독도 영유권, 역사왜곡 문제가 부각되면서 소규모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간간이 벌어졌다.

 오호석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 공동 상임대표는 “대한민국 내수시장의 최종 판매자로서 독도를 지키려고 마일드세븐을 비롯한 일본 제품을 사지도 팔지도 않기로 했다”며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독도 침탈 행위 등에 대한 진정성 있는 행동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맹은 이번 주부터 소속 영업장에 ‘일본 제품은 사지도 팔지도 말자’는 불매운동 스티커를 붙이고 손님들에게도 불매운동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연맹은 지난해 삼성·신한카드 등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여 중소 자영업자의 카드 수수료율 인하를 이끌어냈다. 또 지방자치단체들이 대형할인점 의무휴무제를 도입하게 하는 데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불매운동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일본 극우세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 우선 꼽힌다. 지지·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들은 이날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것은 처음이며 양국 간 통상마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신속히 내보냈다. 이에 일본의 일부 극우 네티즌은 “우리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자칫 양국 민간 차원의 갈등 상황이 부각되면 독도 문제가 국제분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고려대 서승원(일문학) 교수는 “불매운동이 예고된 규모대로 이뤄진다면 과거 반일운동과는 차원이 다를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경제·외교적 실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또 일본 극우 정치인과 극우 단체들에 반한 활동의 빌미를 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정치 이슈인 독도 영유권 갈등을 경제 이슈로 비화시켜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영남대 김상현(한국유통학회장) 교수는 “(냉정하게 볼 때) 독도 문제를 경제 이슈화하는 건 양국에 모두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이번 불매운동은 자영업자 단체들의 존재감이나 정책적 요구사항을 국민 감정에 호소해 홍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형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지난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으로 인해 중국에서 과격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며 “그 결과 일본 기업들의 매출이 급격히 줄었지만 중국 부품 제공 기업들의 피해도 컸다”고 말했다.

 불매운동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도 미지수다. 서울 종로의 한식당 주인 김모씨는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데 식당 문에 불매운동 스티커를 붙여 놓으면 장사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 역시 “요즘 엔저 때문에 일본 관광객이 점점 주는데 오는 손님을 내쫓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정훈·이승호 기자 

◆물산장려운동=일제 강점기 때인 1920년대 일본 제품 대신 국산품을 써 민족자본을 육성하려 한 운동. 1920년 7월 평양에서 조만식 등 민족지도자와 자작회(自作會)가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열고 시작했다. 이후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와 물산장려 노래 등이 보급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방해공작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크리스천투데이]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오 목사, 국제로잔운동 총재 선임(2013.02.07)


“젊은 리더들과 연대해 복음주의 확산에 헌신할 것”

▲마이클 오 신임 총재. ⓒ 국제로잔운동 제공
국제로잔운동(Lausanne Movement) 새 총재 겸 이사장에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오(Michael young suk Oh·42) 목사가 지명됐다.
 
국제로잔운동은 5일 성명을 통해 2004년부터 로잔운동을 이끌어 온 덕 버드셀(Doug Birdsall) 총재 후임으로 그리스도성서신학교 학장인 마이클 오 목사를 지명했다고 밝혔다.

램 기두말(Ram Gidoomal) 이사장은 “마이클 오 목사는 동양에서 서양까지 문화 간 다리를 놓는 가교 역할을 해왔으며 세계 복음화에 헌신돼 있다. 또한 로잔운동을 깊이 이해하고, 전 세계적·지역적인 사명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덕 버드셀 총재가 다져온 견고한 기초와 로잔이 구축해 온 글로벌 리더십을 바탕으로 로잔운동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버드셀 총재는 “마이클 목사는 앞으로 열정과 비전을 갖고 이 운동을 이끌 인재이자 젊은 지도자이다. 그의 지도력 아래 로잔운동은 더욱 젊어지고 더욱 강해지고, 전 세계 교회들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오 목사의 임명 소식에, 오 목사가 사역하고 있는 일본 교계에서도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일본로잔위원회 사토루 가네모토(Satoru Kanemoto) 위원장은 “우리는 마이클 목사를 위해 일본 교회들의 지지와 기도를 이끌어내는 데 힘써왔다. 일본복음주의협회(JEA) 이사회 멤버로서, 겐이치 시나가와 사무총장이 마이클 목사와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오 목사의 임명 소식에 매우 고무됐으며, 시나가와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우리 모두의 헌신 안에서 일본 교회들을 잘 이끌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오 신임 총재는 “빌리 그래함 목사 등 영적 거성들의 유산이 담긴 이 로잔운동을 이끌게 됐다는 데 깊은 소명감을 느낀다”면서 “앞으로 전 세계 기독교권의 젊은 리더들과 연대를 통해 복음주의운동 확산에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마이클 오 목사는 일본 나고야에 그리스도성서대학을 세우고, 이를 통해 일본 내 젊은 세대 기독교인들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로잔의 린제이 브라운(Linsay Brown) 국제디렉터는 “온 땅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마이클 오 목사와 함께 동역하는 것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브라운 디렉터는 리더쉽 이행을 지원하면서 2015년까지 국제디렉터로서 역할을 수행해 나갈 예정이다.

국제로잔 신학위원인 최형근 서울신대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로잔운동 총재직은 국제 기독교기관 가운데 한인이 맡은 가장 권위 있는 고위직으로, 한국교회와 선교계의 위상이 반영된 것”이라면서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중심축이 제3세계와 새로운 세대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편 버드셀 총재는 미국성서공회 이사장 자리로 옮긴다. 오 신임 총재는 3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국제로잔운동을 이끌게 된다.

2013년 2월 6일 수요일

노조 야근 싫다 해 날아간 일자리 1000개(2013.02.07)


사측, 트럭 주문 쏟아지자 “사람 더 뽑아 교대근무” 제안
협력사 포함 땐 4000명 효과
노조가 반대해 결론 못 내

“야간 근무 강요하는 교대 근무 반대한다.”

 5일 전북 완주군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트럭·버스 등을 만드는 이 공장 앞에는 이런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공장 안은 부품을 실은 지게차가 바삐 오갔고, 기계음은 요란했다. 그러나 근로자 중 일부는 ‘트럭부 똘똘 뭉쳐 상시 주간 유지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현대차 전주지원실 오제도 이사는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지난해 4월 칠레를 방문했을 당시 충격이 떠오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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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판매점 쇼룸에 전시된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차가 오지 않으니 전시용 차량까지 다 판 것이다. 그는 “생산 설비가 모자라서 트럭을 만들 수 없으면 모르겠지만, 전주공장은 연간 1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데 5만~6만 대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음 달부터라도 사람을 더 뽑아 교대 근무를 하면 생산량을 8만 대까지 늘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엔저’로 일본 승용차가 약진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 점유율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며 “트럭은 예외적으로 엔저에도 계속 주문이 몰리는 부문인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자리 하나가 아쉬운 때에 야근은 안 하겠다는 노조 때문에 일자리 1000개가 날아갈 판이다. 현대차는 교대 없이 주간 근무(오전 8시~오후 6시50분, 연장 근무 포함)만 하고 있는 전주공장의 근무 형태를 바꾸려 하고 있다. 오전 6시40분~오후 3시20분, 오후 3시20분~다음 날 오전 1시10분으로 근무시간을 나눠 교대하는 방식이다. 이미 울산공장 등 나머지 현대차 공장에서 시행 중이거나 곧 시행할 근무 형태다. 전주공장에서도 버스 부문은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근무 방식을 2교대로 바꾸면, 회사는 교대 인원 충원을 위해 전주공장에 1000명을 더 채용할 계획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협력업체까지 감안하면 일자리 4000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넉 달째 제자리걸음이다. 그동안 6차례의 노사 협의는 모두 결론 없이 끝났다. 장종기 노조 기획실장은 “교대제를 할 경우 근무 여건이 나빠지고 임금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전주공장 내 버스 부문의 과거 사례도 반대 이유다.

버스 부문은 2007년 4월 2교대 근무를 실시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주문량이 줄고, 잔업이 없어지면서 임금이 줄었다. 장 실장은 “우리도 고용 창출을 막지 않는다”며 “현재 근무 방식을 유지하면서 인원을 늘리는 방안을 찾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 오 이사는 “현재 근무 형태로는 작업 라인에 사람을 더 넣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17년차 직원을 기준으로 2교대를 하면 월 46만원씩 임금이 오른다”고 말했다.

사측은 교대제가 도입되면 현재의 시급제를 안정적인 월급제로 전환할 방침이다. 사측은 또 금융위기로 일감은 줄었지만 버스 부문에서 사람을 줄이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노사 합의가 안 되면서 허공에 날린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지난해 주문이 들어왔는데 납기를 맞출 수가 없어 포기한 주문만 2만3000대에 달한다.

지금도 차종에 따라 최대 10개월을 기다려야 차를 넘길 수 있다. 현대 트럭 인기가 높은 알제리에선 이 바람에 일본 이스즈에 계약 물량을 뺏기기도 했다.

한때 50%였던 현대 트럭의 알제리 시장 점유율은 최근 20%로 떨어졌다. 지난해 10월엔 공급 지연으로 쿠웨이트에 180만 달러(약 20억원)를 보상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전주공장의 생산량이 세계 11위에서 15위로 밀린 상태”라며 “그 사이 후발주자였던 중국 업체가 현대차를 추월했다”고 말했다.

김영훈.이가혁 기자 

2013년 2월 5일 화요일

생활비 비싼 도시 1위, 도쿄-오사카…서울은 생각보다 싸네!(2013.02.06)


도쿄 긴자 거리. 동아일보 자료사진


생활비 비싼 도시 1위와 2위에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가 나란히 뽑혔다. 

이는 지속적인 엔고가 현상으로 인한 결과로 보인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일(현지시간) 세계 도시의 생활비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EIU는 미국 뉴욕의 물가(100)를 기준으로 전 세계 97개국 131개 도시에서 식료품, 집세, 교육비 등 400개 이상의 품목 가격을 조사해 6개월마다 발표하고 있다.

생활비 비싼 도시 1위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 그 뒤를 이어 호주의 시드니와 멜버른이 각각 3, 4위를 차지했다. 공동 4위에는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올랐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 중에서 싱가포르도 3계단이 올라 6위를 차지했다.

생활비 비싼 상위 20위 중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11개 도시가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유럽은 8개 도시가 랭크인했으며 미국의 도시는 톱 20에 들어가지 않았다. 

한편 서울은 전체 생활비 기준으로 37위, 구매력 기준으로 33위에 올랐다.

남미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는 이전보다 25위 오른 9위를 차지했다. 

미국 달러와의 고정 환율이 유지되는 가운데 물가 상승률이 20%에 달했다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CNN은 전했다. 

북미 최상위는 캐나다 밴쿠버(21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은 동률 27위였다. 

한편 생활비 가장 싼 도시는 남아시아의 도시들이 차지했다.

▲생활비가 높은 도시 톱 10  

 1위, 도쿄 (일본) 152
 2위, 오사카 (일본) 146 
 3위, 시드니 (호주) 137
 4위, 오슬로 (노르웨이) 136
 4위, 멜버른 (호주) 136
 6위, 싱가포르 (싱가포르) 135
 7위, 취리히 (스위스) 131
 8위, 파리 (프랑스) 128
 9위,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126
 10위, 제네바 (스위스) 124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아침 편지]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을 기억하십니까?(2013.01.31)


꼭 12년 전인 2001년 1월 26일 저녁 7시 15분,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고(故) 이수현의 '이타적 살신'은 일본인의 마음을 뒤흔들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남에게 무관심한 일본 사회 풍조에서 타인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던진 사건은 충격 자체였다. 많은 일본인들이 말해왔다. 이수현 청년의 의로운 희생이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전통적 편협한 사고와 시각을 뿌리째 흔들었고, 일본에서의 한류 열풍과 한국 방문 열기 고조의 견인차가 되었다고. 그 허물어진 경계의 벽을 딛고 2002 한·일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열렸고, 한류 또한 그 순풍을 타고 일본을 뒤흔들며 '욘사마(배용준), 뵨사마(이병헌)' 같은 열기를 더해 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뜨겁던 추모 열기도 1주기를 정점으로 식어버렸다. 이에 다시 추모의 불씨를 지핀 것이 현 '이수현의인문화재단설립위'와 'LSH장학회'의 한·일 양국 인사들이 처음으로 모여 2004년 1월 26일 도쿄에서 개최한 '한·일 합동 3주기 추모제'였다. 당시 일본 측 대표를 맡았던 경제평론가 다케우치 히로시(竹內宏)는 "이수현 청년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이타적 희생을 몸으로 실천해 거대하면서도 공동화된 사회 도쿄, 옆집에 누가 사는지 흥미도 관심도 없고 항상 열쇠는 잠그고 다니며 자기와 친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친교가 없는 슬픈 일본 사회와 일본인을 반성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수현 사건은 생명의 소중함을 화두로 던져 이후 위기의 인명을 구하는 사례가 급증했고, 많은 변화도 가져왔다. '의사상자 예우법' 제·개정, 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설치,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설치, 각종 '의인상' 제정 등. 오늘 한국 사회도 자살 증가와 생명 경시 풍조, 왕따·폭력·성범죄, 급속한 개인주의화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수현의 희생이 보여준 '이타주의'는 인성교육의 산 표본이다.

아직도 부산영락공원 이수현묘에는 일본인들이 두고 간 꽃송이가 끊이지 않는다. 모친 신윤찬(64)씨는 12년째 아들의 추모비가 서 있는 부산어린이대공원 옆에서 자비로 어르신 무료 점심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국자로 떠 그릇에 담아내는 국물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그리움 눈물이다. 이수현의 희생 정신을 모티브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부도리의 꿈'도 최근 개봉했다. 아베 내각 출범과 우익의 발호 등 다시 한·일 격랑이 예고되고 있는 이때, 고 이수현의 이타적 상생정신으로 현해탄 위로 어떠한 파고에도 휩쓸리지 않는 아름다운 우정의 무지개다리를 놓는 호메로스가 되는 것,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소명이 아닐까?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여의도포럼-이성낙] 독일을 보고 일본을 본다(2013.01.28)

“참회하는 독일,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 역사의 거울이 이토록 다를 수 있나” 

1960년 필자가 20대 초반의 독일 유학생 시절 이야기다. 교수와 대화를 나누던 중 독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대뜸 “유대인 문제와 얽힌 역사를 다룬 책을 읽는 것이 지름길”이라며 살아 있는 성인(聖人)이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1878∼1965)의 저서 ‘곡과 마곡(Gog und Magog)’을 권했다. 

그러면서 교수는 뜻밖에도 다하우 유대인강제수용소를 찾아보라며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곡과 마곡’은 너무 어려워 수년이 지나서야 읽었다). 당시에는 영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보고서야 나치 정권 아래 유대인이 겪은 고통과 수난을 이해하고, 그 문제의 깊이와 폭을 인식하던 수준이어서 교수의 말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얼마 후 뮌헨 근교에 위치한 다하우 유대인강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수용소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원형 그대로를 그때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수용소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고, 헐벗은 유대인을 집단으로 살해한 독가스실에서는 가스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시체를 화장하던 아궁이 앞에 수북이 쌓인 재가 있고 벽면에서는 탄내가 여전히 뿜어 나오는 듯했다.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유대인강제수용소의 생생한 느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들 전시장에는 독일 민족의 눈물겨운 참회와 고뇌가 절절히 녹아 있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결코 용서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이렇게 잔인할 수 있으니, 다시는 이러한 만행이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다짐합시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진솔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절규 이상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분명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임에도 패전의 전상(戰傷)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주로 일본 본토가 아닌 ‘역외’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갑작스럽게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전쟁과 관련한 참혹한 흔적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만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인의 과거 전쟁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얼마 전 일본 규슈 지방의 나가사키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 평화공원에 자리한 원자폭탄자료관은 전에 방문한 히로시마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료관에 전시된 자료들은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지녔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을 둘러본 후 전시를 한 목적이 일본 자국민이 전쟁에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고 ‘일본은 억울한 피해자다’를 외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류 역사에 대한 일말의 반성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독일에서의 기억과는 너무 달라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독일은 패전국의 아픔을 역사에 대한 경외심으로 달래면서, 나치 독일이 주변국들에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를 추호도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오로지 반성하는 것만이 준엄한 인류 역사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 결과 독일 통일의 결정적 길목에서 대전의 피해자인 주변국들의 큰 저항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두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에서 유대인강제수용소와 원자폭탄자료관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비친 모습은 너무 다르다. “외관이 거짓이면, 거울도 속인다(Der Schein betr몕gt, der Spiegel l몕gt)”라는 독일 속담이 있듯 거울은 비친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가르침이다. 언젠가는 일본도 인류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과거사를 인정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이성낙(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태평로] '일본 왕따' 외교는 안 된다(2013.01.23)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4강 중에서 맨 먼저 중국에 특사단을 보내자 일본이 내달 25일 대통령 취임식에 아베 총리가 불참하기로 하는 등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고 있다. 박 당선인은 일본이 보란 듯이 중국과 '밀월 무드'를 연출하고 있다. 당선 확정 다음 날 일본 대사보다 중국 대사를 먼저 만났다. 과거 대통령 당선인들은 미국 대사에 이어 일본 대사를 만났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이 중국에 밀려났다. 이어 박 당선인은 첫 특사 파견국으로 중국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당선 축하 화환과 메시지도 일본이 맨 먼저 보냈는데…" "한국에서 일본이 중국한테 밀린 것은 19세기 말 일청전쟁 이후 처음"이라는 등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일본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통령 당선인 특사가 어느 나라를 먼저 가느냐는 것은 의도와는 관계없이 해당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차기 정권의 외교 자세를 가늠하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읽힌다. 분명한 것은 박 당선인이 작년 여름 이후 악화일로를 걸어온 한·일 관계를 복원하는 데 일정한 배려를 하지 않겠느냐는 일본 측의 기대감이 급속도로 사그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한파(知韓派)'라는 일본인들도 "한국이 중국만 우대하고 일본을 무시하고 있다"며 섭섭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에서 주요국 국명을 언급할 때 '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순서가 '미국·중국·일본…'으로 바뀐 데 당혹감을 드러내고, 'G2(미국과 중국)'라는 표현에 대해선 거부감이 강하다.

박 당선인이 한·중 관계를 명실상부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겠다고 공약했고, 이에 따라 중국의 새 지도부와 협력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은 국익에 부합하는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액은 1302억달러로 수출 총액의 25%를 차지했다. 대일 수출액의 3.4배였다.

그렇다고 일본을 따돌리며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모습으로 비치게 해선 곤란하다. 한·중 관계는 한·미 동맹의 상위 개념이 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나치게 대미(對美) 일변도였기 때문에 미·중 간 균형 외교로 나가자는 주장도 나오는데, '중국 환상'에서 나온 잠꼬대 같은 소리일 뿐이다. 중국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 북한을 비호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 양국의 경제 관계가 발전해도 군사·안보 분야에선 분명한 대립 구도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동북아 균형자'를 자처하며 '미·중 균형 외교'를 펴다 한·미 동맹이 위기를 겪었던 상황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박 당선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일 외교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한·일 관계가 악화돼 있던 2006년 3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현 총리) 관방장관 등 일본 조야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나서 "과거사 문제만 빼면 경제·외교, 한·일 양국 간 교류 등 각 분야에서 뜻을 같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자서전에서 박 당선인은 손자병법을 인용하면서 "분개하는 마음으로 싸움을 하면 잠시 속은 시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뿐이다. 다른 어떤 나라와의 관계보다 인내심이 더 필요한 것이 일본과의 외교"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감정적인 반일(反日)은 속이 후련할진 몰라도 국익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日 15년만에 자살 10% 급감… 예방프로그램의 힘(2013.01.18)


지난해 3만명 밑으로 떨어져 상담·치료 민간단체만 554개
자살률로 지자체장 평가도

일본 경찰청은 17일 지난해 자살자 수가 전년 대비 9.4%(2885명) 감소한 2만7766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연간 자살자가 3만명 이하로 떨어진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다. 자살자가 가장 많았던 2003년 3만4427명보다 6600여명이 줄어든 수치다.

일본의 자살자 급감은 정부와 민간단체가 자살 예방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꾸준히 추진한 것이 효과를 본 것이라고 NHK는 전했다. 일본은 2006년 자살대책기본법을 만든 이후 내각부에 자살종합대책회의와 자살예방종합대책센터를 개설해 자살 방지 정책을 꾸준하게 추진해왔다.

현재 일본에서 자살 방지 활동을 펴는 민간단체는 전국에 554개(2011년). 자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조기 발견해 상담과 치료를 돕는 자원봉사자 제도인 '게이트 키퍼'도 활성화돼 있다. 자살 방지를 위한 전화 상담 단체인 '생명의 전화'가 전국 52곳에 설치돼 있으며 자원봉사자 7300여명이 연간 75만건(2011년 기준) 전화 상담을 했다. 자살자 유족(suicide survivor)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소방관, 경찰관도 게이트 키퍼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는다. 자살자 가족이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자치단체도 자살 방지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도쿄 아라카와(荒川) 구청은 2010년부터 자살 시도자에게 전담자를 배정해 지속적인 상담을 해준다. 아라카와 구청은 또 경제적으로 곤란해 자살을 시도한 이에게는 시민단체와 협력해 직업훈련 시설을 소개해 주고 채무 관련 법률 상담도 지원해준다.

자치단체들이 자살 방지 대책에 힘을 쏟는 것은 일본 정부가 2010년부터 매월 기초자치단체별 자살 통계를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매년 자살이 증가한 자치단체, 줄어든 자치단체를 발표하기 때문에 자살 대책이 자치단체장을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09년 자치단체와 시민단체의 자살 방지 활동을 돕기 위해 100억엔(약 1200억원)으로 '지역자살대책긴급강화 기금'도 만들었다. 일본의 자살 대책 기본법은 자살 예방 활동을 하는 민간단체에 대한 지원을 국가 및 지방단체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 또 인터넷의 자살 관련 정보 유통도 차단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2010년 인구 10만명당 자살자는 33.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8년째 1위다. 전 세계에서는 리투아니아에 이어 2위다. 하루 평균 42.6명, 연간 1만60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매년 응급실을 찾는 자살 시도자는 1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높은 자살률에도 정부의 대책은 미흡하다. 정부는 2004년 "자살률을 20% 줄이겠다"는 목표로 자살 예방 1차 5개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자살률은 2004년 23.7명에서 2009년 31명으로 28%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자살 원인을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만 보고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소홀하게 다루는 대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안용민 교수는 "한국에서도 최근 그나마 자살률이 줄어든 지역은 대부분 지자체가 자살 예방 시스템을 만든 곳"이라며 "일본 등 다른 국가처럼 자살 문제를 사회문제로 보고 국가나 지자체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北과 통일된 한국· 핵무장한 일본과 함께 하는 아시아, 북미와 유럽 압도"(2012.12.12)


[美 국가정보위 미래 전망] 미리 보는 2030년
中, 美 추월해 최대 경제대국… 힘 분산 돼 절대 패권국은 없어
對美 이슬람 테러 사라지지만 개인 테러리스트는 더 늘 듯

"2030년에는 아시아가 북미와 유럽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파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가 10일 '글로벌 트렌드 2030' 보고서를 통해 내놓은 전망이다. NIC는 "하지만 향후 세계는 개인의 권한이 강조되고 국가권력은 분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중국이든 미국이든 '절대 패권국'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시아, '북미+유럽'을 압도한다
보고서는 "경제 규모, 인구, 기술 투자, 군사비 지출 등 측면에서 2030년이 되면 아시아가 북미와 유럽을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유럽, 러시아는 하강세를 지속하는 반면 아시아는 경제·군사력에서 여타 세계를 압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중국은 2030년 직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미국의 우위가 이어지던 시대를 뜻했던 '팍스 아메리카나'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등장했던 이른바 '유일 강국(unipolar)'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이는 중국이 지금의 미국 같은 지위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은 경제 규모에서 중국에 추월당하더라도 글로벌 문제에 대한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국제무대에서 중심적 지위는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고서는 전망했다. 이른바 '동급 최강(first among equals)'의 위치다. NIC 크리스토퍼 코짐 위원장은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미국의 역할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는 없다"고 했다.

◇'중국 경제 침체' 올 경우 동아시아 위기
중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도 함께 제시됐다. 보고서는 "중국의 경제가 침체되는 상황이 올 경우 동아시아 전체의 동요로 이어지고, 이는 내부 불안과 함께 역내 파급효과에 대한 불안감을 키울 것"이라고 했다. 보고서는 또 "빈부 격차로 인한 분열이 생기고, 티베트·신장 같은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강화될 수 있다"며 "중국 지도부가 국내 문제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점점 더 예측할 수 없고 공격적인 행동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일본과 관련해 보고서는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해 국력이 서서히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동북아에서 미국의 역할이 축소되고 이 지역 국가 간 힘겨루기가 진행되는 '힘의 균형' 상황이 오면 일부 국가는 미국이 제공해오던 안보를 대체하기 위해 핵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는 일본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테러 패러다임도 바뀔 듯
현재와 같은 '종교 전쟁' 성격의 이슬람 무장세력의 대미(對美) 테러는 2030년까지 대부분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국가의 전유물이었던 살상 무기 제조법 등에 대해 개인들의 접근이 확대되면서, 다수의 '개인 테러리스트'가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서는 내다봤다. 즉 '개인 역량강화(individual empowerment)'의 확산으로 테러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이다.

현재 71억명인 세계 인구는 2030년 83억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물·식량·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각각 35·40·50%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인도 등의 국가는 늘어나는 부(富)를 바탕으로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할 것이고, 이는 국제 식량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저소득 국가의 사회 불만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는 미국 정보 당국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 산하기관으로 중·장기 전략 마련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NIC는 새 행정부의 장기 전략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에 정보 당국의 정보와 전 세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매경시평] 실패로부터 배우는 사회(2012.12.02)

필자가 만나 본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실패가 오늘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실패를 통해서 깨닫고 더 큰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남의 어려움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공한 기업들도 평탄하게 성장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열악한 환경과 실패를 이겨내면서 경쟁력을 얻게 되고, 편한 환경에 안주하던 기업을 따돌린 것이다.

엊그제 나로호의 발사가 또 연기되어 국민이 실망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발사 실패와 연기를 우주항공시대를 열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으로 이해하고 관용하는 것 같다. 반면 원자력발전소의 고장이나 비리검사들에 대해서는 국민은 냉정하다. 원자력발전의 경우에는 잘못될 경우 파국을 초래하므로 작은 오류이지만 반복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검찰은 스스로 변화하려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패를 변화의 계기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얼마 전에 발생한 우리 공군의 블랙이글 항공기 추락 사고를 조사한 결과 정비사의 실수가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인 원인일 뿐이다. 깊이 들어가면 구체적인 행동수칙, 시스템의 구축과 운영, 핵심가치 등에서의 문제가 원인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담당자나 책임자에 대한 문책으로 유사한 사례의 재발을 막을 수는 없다.

선진 사회는 실패를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발전을 위해 약이 되는 긍정적인 실패에 대해서는 관용과 격려가 있어야 하고 패자부활전의 기회까지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발전에 독이 되는 부정적인 실패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핵심가치나 문화까지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긍정적인 실패까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대학생들은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기보다는 학점 세탁에 열중하고 있다. 직장인들은 실패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윗사람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고, 공직자들은 감사에서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오는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유 있는 실패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하나의 발전과정의 양면이다. 실패는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 오히려 실패가 없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거나, 미래의 큰 실패가 잠자고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실패에 대한 지나친 불이익은 성공을 위한 도전 의지를 꺾는다.

우리가 앞서 가는 것을 따라가는 시대에서는 주어진 목표를 실수 없이 빠르게 달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에는 스스로 방향을 잡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배울 곳도 베낄 곳도 없는 첨단에 서 있을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다. 과학자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실험실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기업도 조직 내부와 시장에서의 실험을 통해 실패를 수용하고 내재화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실패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실패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북한 스타일의 조직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의사결정도 늦어 도태되게 되어있다. 지도자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조직을 발전시켜 나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또한 조직이 성공에 안주하거나 자만하지 않도록 지도자 스스로가 깨어 있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 청년들의 지나친 현실 안주를 걱정한다고 한다. 우리 지도자들은 젊은이와 기업인들이 꿈과 용기를 갖고 미래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적 여건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곽수근 서울대 교수]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크리스천투데이]“일본 기독교, 신자는 1%지만 영향력은 결코 1% 아니다”(2012.11.26)


하라 마코토 교수, 국제선교학술대회서 ‘일본교회 역사와 현황’ 발표
▲하라 마코토 교수(도시샤대 신학부). ⓒ신태진 기자
일본 기독교 역사학자인 하라 마코토 교수(도시샤대 신학부)가 26일 장신대 국제선교학술대회에서 ‘일본교회 선교의 역사와 현황’을 발표했다.

일본의 개신교회는 1872년 주로 미국에서 온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선교사들은 전도와 함께 교육, 사회, 복지활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고, 일본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1%에 불과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가 가진 영향력은 결코 1%가 아니다. 일본 기독교계는 교회가 일본사회 각 방면에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는 것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 특성과 현재 상황을 전했다.

일본의 ‘근대’는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의한 개국으로 시작됐다. 봉건시대의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했었지만, 메이지덴노(일왕)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수용했다. 근대화 속에서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소극적 수용이었다. 주로 舊 도쿠가와측에 있다가 몰락한 젊은 사족들이 서양 학문을 통한 가문의 부활을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들의 기독교 이해는 애국적이며 문화교양주의적이었다. 일본 1세대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과 신학은 ‘두 개의 J’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Japan의 J’로 일본고유 문화에 대한 심취이며, 다른 하나는 ‘Jesus의 J’로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우치무라의 정신은 근대 메이지 시대의 기독교적 과제를 잘 나타낸다. 1세대 기독교인들은 근대일본에서 기독교가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전력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대만과 한국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며 ‘황민화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기독교의 과제는 일본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방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조합기독교회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기독교 입장에서 공헌하고자 ‘조선전도’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은 종교인에게 있는데, 그것은 일본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일본 국민이 되게 하는 것은 일본 종교인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신민’을 만들기 위한 전도였던 것이다.

1937년 총독부는 일장기 게양, 조서봉독, 동방요배, 신사참배, 고신에(덴노와 그 아내의 사진) 예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17세 이상 조선인 남성을 지원에 의해 병적에 편입시키는 제도)를 실시했으며, 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1939년에는 창씨개명, 국민징용령을 내려 위안부를 필두로 강제 연행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하고 있던 총독부가 추진하는 ‘내선기독교일체운동’에 호응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국교회에 일본기독교연맹의 도미타 미쓰루 목사를 파견했다. 도미타 미쓰루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라 하는 이상,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며 일본의 정책을 거드는 말을 했고, 같은 해 조선의 기독교 각파 대표가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하게 됐다.

일본의 패전 직후 연합군은 통제법, 탄압법인 치안유지법, 종교단체법을 폐지하고, 신도지령(국가·신도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및 운영을 폐지하는 정교분리 법령)을 발표했다. 종교단체법의 폐지에 따라 침례교회와 루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서 이탈했지만, 주요교파인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계 교회, 성결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 그대로 남아 연합교회로서 오늘까지 이른다.

전쟁 패배 후 군국주의 및 천황신격화의 가치관이 붕괴되자 정신적 공백을 메울 것으로 공산당과 기독교가 주목을 받았다. 교회는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의 쇼윈도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청년들은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국헌법의 제정으로 교회는 ‘제한된 종교의 자유’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 일본 기독교인들 반전운동을 주도했으며, ‘야스쿠니신사국가수호법안’의 폐지를 촉구했다.

현재 일본교회의 신자 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약 106만 명이다. 일본의 가장 큰 연합교회인 일본기독교단의 신자 수는 완만한 감소 추세에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현재 17.8만 명이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도 가맹 교회도 마찬가지 추세다. 다만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가입되어 있는 일본복음동맹(JEA) 소속 교회는 소폭 증가하고 있다.

하라 마코토 교수는 “기독교는 일본 사회 속에서 역사적 유산으로 정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또 ‘부드러운 천황제’가 현재에도 민족주의적 실제로 존재하며 작동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복음이 현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 선교의 기본적 주제인 ‘사회의 주변, 소수자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신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