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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3일 수요일

[조선일보]1953년 5월(停戰협정 직전) 오작도 점령했던 우리軍, NLL(북방한계선) 긋기 직전 '눈물의 철군'(2013.07.04)

[본지, 최일도 목사 사진 입수]

우리 軍이 현재의 NLL 위쪽 서해섬 지킨 모습 첫 공개
유엔司, 北에 일부 섬 양보한 NLL 긋자 우리측 물러나

해군력 궤멸됐던 北, NLL 덕분에 유엔군 '해상봉쇄'서 벗어나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한 달 뒤에 설정된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한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던 일부 섬들을 북측에 양보한 것임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공개됐다.

본지(本紙)는 3일 북한 황해도 해안에서 불과 1.5㎞ 떨어진 오작도 등지에서 공산군과 유격전을 벌였던 특수부대인 8240부대원들이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5월 활동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24장을 최일도 목사로부터 단독 입수했다. 오작도는 현재 NLL 북쪽 해상에 있어 북한 영토로 돼 있으며, 지난 3월 김정은이 방문해 "명령만 내리면 적들을 모조리 불도가니에 쓸어 넣으라"고 지시했던 백령도 인근 월내도와 가깝다. 최 목사는 백령도 등 서해상 섬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8240부대 동키4부대 부부대장 출신이었던 아버지 최희화씨가 작고한 뒤 사진들을 보관해오다 정전협정 60주년을 앞두고 이날 공개했다.

38도선 이북 섬들도 유엔군이 점령

이날 공개된 사진들은 NLL이 오히려 북한을 배려해 설정됐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의 하나로 평가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당시 제공권(制空權)은 물론 제해권(制海權)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서해상 섬들도 대부분 한국군 해병대와 유격부대 등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6·25전쟁 발발 이전 우리나라가 관할하고 있던 백령도·연평도 등 38도선 이남의 섬들은 물론, 북한이 관할했던 석도, 용도, 초도 등 38선 이북의 섬들도 유엔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특수 유격부대인 8240부대원들이 오작도(烏鵲島)를 사수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특수 유격부대인 8240부대원들이 오작도(烏鵲島)를 사수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 (단기)4286.5.27.’이라는 표시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두 달 전에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뜻한다. 오작도는 북한 본토에서 1.5㎞ 떨어진 섬이다. 사진 뒤쪽에 북한 황해도 해안이 보인다. /최일도 목사 제공
정전협정 발효 시 육지의 경우 유엔군과 공산군 점령지역을 기준으로 DMZ(비무장지대) 경계선이 설정됐던 원칙을 바다에도 적용하면 오작도 등도 우리 영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53년 8월 30일 남북 간의 우발적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NLL을 설정하면서 백령도 등 서북 5개 도서와 북한지역의 중간선으로 결정했다.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폭 3해리 영해 원칙에 따라 서북 도서와 북한 지역의 대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하고, 한강 하구로부터 백령도 서북쪽까지 12개 좌표를 연결해 설정한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클라크 사령관은 유엔군이 점령했던 섬들을 모두 고수할 경우 북한지역 항구들이 봉쇄될 수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유엔군이 관할했던 일부 섬들을 북측에 양보했던 것이고 오작도도 그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당시 해군력이 궤멸돼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에 있었던 북한으로선 NLL이 울타리가 돼 유엔군 측의 해상봉쇄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8240부대는 정전협정에 즈음해 유엔군 지시에 따라 현재의 서해 5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에서 모두 철수했다. 북한은 NLL 설정에 따라 NLL 이북의 섬들과 해역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해역에서 해군 함정과 민간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 및 어로활동을 보장받게 됐던 것도 북한이 얻은 실리로 꼽힌다.

북, 20년 동안 NLL 이의제기 안 해

북한은 NLL이 설정된 뒤 20년 동안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않다가 1973년부터 NLL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1959년 북한 조선통신사가 공식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은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해 이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 3월 11일 서해 월내도 방어대를 시찰한 뒤 목선을 타고 떠나는 모습.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 3월 11일 서해 월내도 방어대를 시찰한 뒤 목선을 타고 떠나는 모습. 월내도는 8240부대가 정전협정 전까지 전초기지로 삼았던 섬이다. /조선중앙통신
1963년 5월 개최된 군사정전위 회담에서 북한 간첩선의 침투 및 격퇴 위치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북한 측은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언급해 NLL을 사실상 인정했다. 1984년 여름 발생한 우리의 홍수 피해에 대해 북측이 수해 복구 물자를 지원해줄 때도 양측 호송단이 백령도 및 연평도 인근 NLL 선상에서 상봉해 수송 선박을 각각 인계·인수, NLL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2년 체결·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 불가침 부속합의서에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해 NLL이 해상 불가침 경계선임을 확인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11월까지 43차례에 걸쳐 NLL을 의도적으로 침범하는 ‘서해사태’를 일으킨 뒤 NLL 무력화 공세를 계속해 오고 있다. 남북 군사실무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문성묵 전 국방부 군비통제 차장은 “NLL은 우리와 유엔군이 북한에 양보한 것이고 당시 북한으로선 고마웠던 해상 경계선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는 데 오작도 사진 공개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조선일보][韓·中 정상회담] 朴, 중국어로 5분 인사말… 시진핑 "옛친구 만난 것 같소"(2013.06.28)

朴대통령, DMZ 세계평화공원 구상 밝히며 "시 주석께서 北에 잘 설명해달라"

- 시진핑, 최치원 詩 인용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萬里를 통하네' 읊어… "우린 中韓관계를 중요시"

- 朴대통령, 孔子 말씀 인용
"처음엔 내가 사람들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살핀다"
북한의 행동 변화를 강조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습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27일 오후 3시 45분(이하 현지 시각)부터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을 이렇게 시작했다. 시 주석은 "8년 전인 2005년 서울 63빌딩에 있는 백리향에서 만난 이래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고, 박 대통령이 5분 이상 중국어로 인사말을 이어가자 얼굴이 환해져서 활짝 웃었다.

공자와 최치원 인용

정상회담 전, 시 주석은 인민대회당 동문 광장에 미리 나와 박 대통령을 기다렸다. 환영식 후 동대청에서 시작된 단독 정상회담은 허심탄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였으며, 미리 예정한 45분을 15분 이상 넘겨 1시간보다 길어졌다.

단독회담에서 시 주석은 '북한에 대해 압력도 넣겠지만 설득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국 측 배석자가 전했다. 박 대통령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孔子) 말씀을 인용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행실을 살핀다." 북한이 핵개발과 도발을 거듭해 온 상황에서 북한의 진정성을 믿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中, 관례 깨고 장관급이 공항영접… 역대 최고 예우… 27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영접 나온 장예쑤이(張業遂)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방중 때는 그보다 직급이 낮은 부장조리(차관보급)가 맞이했다. 중국은 박 대통령에게 중국산 최고급 의전 차량인 훙치(紅旗) 리무진을 제공했다
中, 관례 깨고 장관급이 공항영접… 역대 최고 예우… 27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영접 나온 장예쑤이(張業遂)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방중 때는 그보다 직급이 낮은 부장조리(차관보급)가 맞이했다. 중국은 박 대통령에게 중국산 최고급 의전 차량인 훙치(紅旗) 리무진을 제공했다. /청와대 제공
오후 4시 56분 시작된 확대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한시(漢詩)를 인용하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시 주석은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은 중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라는 시를 쓰셨다"며 "중국은 중·한 관계를 대외관계의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조어대(영빈관)의 신록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했다. 두 정상은 오후 6시에 나란히 공동 기자회견장에 입장했고 표정은 밝았다.

"양국 관계 발전 중요 계기"

시 주석은 회담에서 양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내실화에 대해 "앞으로 양국 관계가 긴밀하고 건강하며 활기찬 관계가 될 것이다"고 했고, 박 대통령은 "경제 관계를 지금보다 훨씬 다변화하면서 강화해야 하고 인문(人文) 분야 유대를 더 심화시켜 나가야겠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어업과 관련해서 "앞으로 황해를 평화협력 우호의 바다로 만들자"고 했다. 박 대통령은 DMZ 세계평화공원 구상을 설명하면서 "시 주석께서 잘 지원해 주시고, 또 필요하면 북한 측에도 이러한 우리 취지를 잘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서 양국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며 양국이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긴밀한 공조를 양자 차원뿐만 아니라 지역과 세계로 넓히자는 논의를 했다고 윤병세 외교장관이 전했다.

최고 등급 경호에 장관급 영접

방중 첫날인 27일 중국은 이례적 의전(儀典)으로 박 대통령을 예우했다. 최고등급 경호를 했고 의장기도 통상의 4개에서 6개로 늘렸다.

박 대통령을 태운 공군 1호기(대통령 전용기)는 당초 예정보다 10분가량 이른 이날 오전 11시 10분쯤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장예쑤이(張業遂)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수석 부부장)과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 등이 나와 영접했다. 중국은 정상급 외빈을 맞을 때 대체로 지역을 담당하는 외교부 부부장(차관급)이 나와 영접하지만, 박 대통령을 맞은 장예쑤이 부부장은 장관급이었다.

중국 육·해·공군 의장대의 호위 속에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박 대통령은 영접 나온 중국 측 인사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중국 측이 준비한 중국 국산 의전 차량 훙치(紅旗) 리무진에 올라 베이징 시내 숙소로 향했다.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이 차를 썼다.

만찬에서 朴대통령 애창가요 합창

이날 밤 열린 만찬에선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가요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과 육영수 여사가 좋아했던 동요 '고향의 봄'을 한국어 전공 중국 학생들이 합창했다. 경극 공연에서도 박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첫사랑의 대상'으로 묘사한 조자룡이 등장하는 '장판파 전투' 장면이 묘사됐다. 박 대통령은 황금빛 도는 노란색 한복을 입었다.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조선일보]"김정일의 NLL法 포기 제안… 盧 前대통령 '예, 좋습니다'"(2013.06.21)

與정보위 "2007년 정상회담 대화록 원본·발췌본 열람서 확인"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은 20일 "지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공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37조 1항 3호에 근거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에 대한 열람을 국정원에 공식 요청했고, 이 공식 자료를 오늘(20일) 정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과 함께 열람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열람한 의원들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내가 봐도 NLL은 숨통이 막힌다. 이 문제만 나오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는데 NLL을 변경하는 데 있어 위원장과 내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췌본에는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평화협력지대로 만들자"고 하자 김정일이 "그것을 위해 쌍방이 실무적인 협상에 들어가서는 (NLL 관련)법을 포기하자고 발표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고,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예, 좋습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고 여러 정보위원은 전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미국의 북한에 대한 BDA(방코델타아시아) 제재와 관련, "분명한 미국의 실책"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남측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면 제일 미운 나라가 미국이다. 평화를 깨는 국가가 어디냐는 질문에도 미국이 1위로 나오고 그다음이 일본, 다음이 북측을 지목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은 이날 오후 4시쯤 국회 정보위원장실로 대화록 원본과 발췌본을 가져가 발췌본과 원본 일부를 40분간 여당 정보위원들에게 보여줬다. 서 위원장은 "야당에도 연락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조선일보]탈북자 9명 평양 압송… 유엔 '중대한 우려' 성명(2013.05.31)

라오스의 송환 조치 조사중
朴대통령, 시진핑에 '탈북자 보호' 요청할 듯

유엔난민기구(UNHCR)의 안토니오 구테레스 최고대표는 30일 라오스 경찰에 적발된 '꽃제비' 출신 탈북자 9명이 북송(北送)된 것에 대해 '중대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명하고 이들의 안전 보장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구테레스 대표는 이 성명에서 "UNHCR은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이 망명 심사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우려한다"며 모든 국가들이 난민을 박해받을 위험이 있는 국가로 추방 또는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킬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구테레스 대표는 이 성명에서 UNHCR이 라오스 정부의 송환 조치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테레스 대표의 성명은 9인의 탈북자가 북송된 후 유엔에서 나온 첫 번째 조치다.


 슬프도록 짧았던 자유… 다시 北으로 끌려간 아이들… 이들에게 한국은 너무 먼 나라였다. 중국,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오려다 강제 북송된‘꽃제비(탈북 고아)’출신 탈북자들이 작년 여름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중국의 한 도시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 신체 대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한 6명은 이미 한국 등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고,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탈북자 8명은 이번에 북송됐다. 이들 8명과 사진에 없는 1명 등 총 9명이 이번에 북으로 끌려갔다. 사진은 중국에서 이들과 함께 1년7개월 동안 생활한 탈북자 김강식(가명)씨가 TV조선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 김씨는“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같은 나이의 한국인보다 키가 작다”고 말했다
슬프도록 짧았던 자유… 다시 北으로 끌려간 아이들… 이들에게 한국은 너무 먼 나라였다. 중국,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오려다 강제 북송된‘꽃제비(탈북 고아)’출신 탈북자들이 작년 여름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중국의 한 도시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 신체 대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한 6명은 이미 한국 등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고,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한 탈북자 8명은 이번에 북송됐다. 이들 8명과 사진에 없는 1명 등 총 9명이 이번에 북으로 끌려갔다. 사진은 중국에서 이들과 함께 1년7개월 동안 생활한 탈북자 김강식(가명)씨가 TV조선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 김씨는“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같은 나이의 한국인보다 키가 작다”고 말했다. /중국서 함께 지냈던 탈북자 제공
이와 관련, 박근혜 대통령은 탈북자 9명이 북송됐다는 보고에 몹시 안타까워했으며, 6월 말 방중(訪中) 때 탈북자 보호 문제를 거론할 가능성이 크다고 정부 고위 관계자가 30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탈북자 북송) 보고를 받고 마음 아파했다"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할 때 전반적인 탈북자 문제를 의제로 올리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한·중 양국은 6월 말 정상회담을 갖기로 하고 의제를 최종 조율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달 초 방미(訪美) 중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탈북자 북송은 "인도적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중국이 남한으로 보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탈북자를 직접 북한 당국자들에게 넘긴 라오스에 대해서는 외교부를 통해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라오스를 통한 탈북 경로는 그동안 비교적 잘 유지돼 왔는데 북한이 보통 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인 배경을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오늘과 내일/하태원]남북정상회담, 그 실패의 기록(2013.02.26)

통치행위로 여겨지는 남북정상회담은 추진단계부터 극소수 내부자만이 정보를 공유하는 비밀의 영역이다. 평양에서 진행된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양측 수뇌부가 나눈 대화 내용 중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 합의문에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문구가 담기기까지의 내막을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다면 2007년 우리 대통령이 서해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까.

그런 면에서 이명박(MB) 대통령이 퇴임 직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발된 2009년 정상회담 추진상황을 자진해서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우리가 원칙을 고수하며 정상회담에 목매지 않자 2009년 가을 북한이 중국을 통해 먼저 정상회담을 타진해 왔고, 정상회담 대가로 5억∼6억 달러 규모의 현물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회담이 무산됐다는 게 요지다. 5년 대북(對北)정책이 총체적 실패라는 평가를 인정할 수도 없었고, 그런 소리도 듣기 싫었기 때문에 비밀의 한 자락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과거 5년의 행적을 쫓다보면 MB 정부가 정상회담의 효능을 인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최대의 역량을 쏟아부었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천안함 폭침이 있었던 2010년 가을 김숙 당시 국가정보원 1차장은 3, 4차례 평양으로 가 극한 대결로 치닫고 있던 남북관계 출구전략과 정상회담 추진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결과는 실패. 천안함 폭침에 대한 입장표명과 관련한 북한 실무진의 재량범위가 극히 좁았던 탓이 컸다.

정전선언 이후 우리 영토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 공격으로 기록된 연평도 포격까지 당한 뒤에도 정상회담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MB가 2011년 5월 베를린 연설에서 이듬해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한 것을 계기로 남북은 개성 베이징 등을 오갔다. 2011년 6월 판문점, 8월 평양, 2012년 3월 서울 등 연쇄정상회담 시간표까지 논의될 정도로 구체적이었지만 천안함 사과가 또 발목을 잡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를 직접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응당 정상회담에 나서려 했겠지만 MB는 이 시점에 뜻을 접은 것 같다. 김태효 전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은 “북한의 전략적 목표에 봉사하느니 정상회담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는 말로 당시 기류를 설명했다. 천안함 폭침은 부인으로 일관하고 ‘비핵화’ 세 글자만 써주고는 ‘이제 논의 끝’이라는 북한의 태도에서 정상회담을 할 아무런 메리트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정상회담을 남북관계 돌파구의 최종병기로 여기는 사람들이 들으면 ‘궤변’이라 할 소리지만 MB 정부 사람들은 “남들 하는 식으로 하면 우리도 정상회담 할 수 있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은 “만나주는 것 자체를 시혜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 결국 회담 불발의 본질적 이유”라고 했다. 원칙을 지킨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악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계기를 마련한 것인지 아니면 남북관계 진전의 호기를 놓친 실책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성사되지 못한 세 번의 정상회담 시도 과정에서 남북 간에 은밀하게 벌어졌던 일들을 세밀하게 복기하고 전략적 실패는 없었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일은 어제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몫이다. 이를 위해 MB 정부 정상회담 ‘실패의 기록’이 가감 없이 새 정부에 넘겨져야 한다. 우리 대표단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 요구 시 내걸었던 조건도 밝혀야 한다. 박 대통령이 꿈꾸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의 출발점도 결국은 과거 정부에서 남북 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팩트 파인딩’이라고 본다.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국정원의 대화록 발췌문 본 검찰, '盧 NLL포기' 사실상 확인(2013.02.22)


[정문헌의 '盧 NLL 포기' 발언… 왜 무혐의 결정했나]
국정원, 南北정상회담 대화록 발췌 작년12월 검찰제출
검찰, 수사 발표하며 구체적 발언 내용은 공개 안해
월간조선의 보도에 대해서도 '허위 아니다' 입장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작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서해북방한계선)을 남측이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의혹 제기가 '허위가 아니다'라고 검찰이 결론을 내린 것은 뒤집어 얘기하면 그런 취지의 발언이 실제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 사건은 민주통합당이 고발할 때 '허위 사실 유포'라고 문제 삼았기 때문에 실제 노 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는지가 뜨거운 관심사였다. 명예훼손 사건에선 허위 사실을 말했더라도 그 경위가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혐의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대화록 발췌본을 열람한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혀, '허위 사실이지만 무혐의 처리'하는 경우가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번 사건은 지난 대선을 뜨겁게 달군 이슈이기도 했다. 정문헌 의원이 작년 10월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NLL은) 미국이 땅따먹기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다.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 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안보 문제가 대선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정 의원은 이어 작년 12월엔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작계5029(북한 급변 사태를 대비한 군사작전 계획)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요구를 막아냈다'고 했고, '경수로는 미국을 제치고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며 추가 폭로를 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재단과 당시 정상회담에 관여했던 인사들이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정 의원 발언은 허위"라고 했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역시 같은 쪽에 섰다. 문 후보는 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민주통합당이 정 의원을 고발한 이후 3개월간 수사한 검찰은 그동안 국가정보원이 작년 12월 17일 검찰에 낸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 등을 검토하고, 정 의원 등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거쳤다.
외부로 공개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정 의원이 주장한 것 외에도 더 있었다. 월간조선은 2월호에서 노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달 초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국격이 떨어지는 내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은 수사 발표를 하면서 발췌본과 노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국가 기밀'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런 발언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검찰은 "그 부분은 수사 대상이 아니어서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월간조선 보도 등에 대해서는 '허위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 의원과 함께 고발당한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과 박선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이 '남북 정상회담 준비 회의에서 NLL 관련 논의가 있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2007년 8월 18일 준비(대책) 회의가 개최됐고, 그 회의에서 NLL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돼 허위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2013년 1월 2일 수요일

[단독] "北, 정상회담 뒷돈 요구하길래 거절하자 천안함 폭침"(2013.01.03)


2009년 10·11월 비밀접촉 결렬→2010년 1월 해안포 발사→3월 천안함→11월 연평도 포격

[MB정부 인사, 뒷얘기 밝혀]
"北 유화제스처 속뜻 알아야" 朴당선인 향한 메시지인 듯
"정상 회담 성사 조건으로 쌀·비료 5억달러 요구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 정부가 북한의 경제 지원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북한이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수차례 시도했으나 북한이 요구한 정상회담 '대가'를 거부하자 북한이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 도발했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이후 북한의 의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이 발언은 북한 권력자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다음 날 나온 것으로 북한에 대해 '유화 제스처의 속뜻을 간파하고 있다'는 경고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조만간 북한과 맞닥뜨리게 될 박근혜 당선인과 그 참모들을 향한 메시지 성격도 있다.

"정상회담 하려면 쌀·비료 내놔라"

이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여러 번 북한과 만나 얘기했다"며 "그러나 북한이 정상회담 성사 조건으로 쌀 수십만톤, 비료 수십만톤을 요구했고 우리는 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정상회담 성사 조건으로 쌀과 비료 등 총 5억~6억달러 정도의 현물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북한이 '뒷돈'으로 현금을 요구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11일 만에 배 들어간 리설주, 해산하고 바로 공개석상 나왔나…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리설주 부부가 지난 1일 모란봉 악단의 신년 경축공연을 관람하고 있다<오른쪽>. 최근까지 출산이 임박한 것으로 추정돼온 리설주의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다. 지난달 21일에만 해도 리설주의 배는 많이 부풀어 있었다<왼쪽 사진>. /조선중앙TV
그는 "남북관계에서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가장 큰 분수령이었다"며 "천안함 이후에도 대화가 이뤄졌지만 북한이 '천안함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회담 논의는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중단됐다. 이 관계자는 "2011년 12월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로는 정상회담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북, 남측의 경제 지원 쉽지 않자 도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8·15 경축사에서 "언제, 어떤 수준에서든 남북 간 모든 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력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1주일 뒤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서울에 온 북한 조문단은 이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해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측 통일전선부장의 싱가포르 비밀 접촉은 이런 분위기 속에 성사됐다. 이때도 북은 식량·비료 지원을 당연한 일처럼 요구했고 이것을 들어주려면 5억달러, 우리 돈으로 5000억원 이상이 필요했다.

그해 11월 7일과 14일 개성 모 여관에서 열린 남북 당국 간 후속 비밀 회담은 최종 결렬됐다. 소식통은 "당시 북측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차관급)은 정상회담 합의문 초안까지 내밀었는데 정상회담 대가로 수십만톤의 쌀과 비료를 내놓으라는 내용이라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른 소식통은 "만약 북의 식량·비료 지원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정상회담까지 가는 단계마다 '현금' 같은 뒷돈 요구도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관련 비밀 회담이 결렬되고, 더 이상 우리 측에서 경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직후인 2010년 1월 '보복 성전(聖戰)'을 거론하며 서해 북방한계선(NLL)으로 무더기 해안 포를 쏴댔다. 이어 두 달 뒤인 3월 26일 천안함을 폭침했고, 그해 11월엔 연평도 민간 지역에까지 포격을 퍼부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는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주면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수는 없었다"고 했다.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은 북쪽에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