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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조선일보]"北送 9명 중 8명이 내 친구들… 꼭 살리고 싶어"(2013.05.31)

'꽃제비'로 중국서 함께 생활, 작년 1월 한국 온 김강식씨
"11세 때부터 중국오가며 같이 구걸했던 아이들… 北送 직전에도 1명과 통화
평양가면 다시 나오기 힘들어… 국제사회가 도와달라"


 김강식씨 사진
북한 '꽃제비' 출신으로 중국과 라오스를 거쳐 작년 1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김강식(가명·23·사진)씨는 30일 "이번에 북송된 9명 가운데 8명과 알고 지냈다"며 "평양에 간 이들이 다시 나오기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북송된 탈북자들이 북에서 나올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번에 북송된 9명과의 관계는?

"내가 양강도 혜산 출신인데 거의 대부분이 아는 친구들이다. 11세 때부터 북한에서 구걸 생활을 했다. 이후 중국에서 왔다갔다할 때 만났던 친구들이다. 일부는 같이 학교 다니고, 어린 시절부터 알던 친구도 있다. 꽃제비, 한국말로 하면 노숙자 생활하면서 쓰레기장에서 주워 먹고 도둑질하면서 살았다."

―언제 한국에 왔나?

"나는 2010년에 9명이랑 함께 북한에서 나왔다. 이후 중국에 와서 도와주시는 주 목사님을 만났다. 그다음에 6명이 더 합류해서 15명이 한집에서 지냈다. 15명 중에서 조(組)를 짜서 나를 포함해 3명이 먼저 (한국에) 입국했다. 12명이 남아 있었는데 미국으로 3명이 갔다. 나는 중국에서 1년 7개월 있다가 2011년 중국에서 나와 2012년 한국에 왔다. 이번에 북송된 9명 가운데 1명은 나 있을 때는 없었다. 모르는 아이다."

―중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주 목사님이 도와주셔서 한집에 모여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했다. 수학, 한글, 성경, 영어 등을 공부했다. 밖에 돌아다니기 어려우니까 쉬는 날에는 TV를 봤다."

―다른 아이들은 어땠나?

"탈북하다가 붙잡혔던 적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북에서 맞아서 머리에 상처가 있는 아이도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 상태가 나빠서 나이보다 키가 작다. 여자 아이들과는 친하지 않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지는 못했다. 같이 지내다 보니까 남자 아이들끼리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랬다. 몇은 수학, 영어 등에서 공부를 잘했다."

―아이 가운데 일본인 어머니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다. A(23) 어머니가 일본 여자였고 일본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평양에 산다더라.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지나가는 소리로 언뜻 들었다. 아이들은 본인 이야기 잘 안 한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평양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A랑은 2010년에 만나서 이제 알아가는 중이었다."


 라오스·중국을 거쳐 한국에 오려다 최근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이 지난해 성탄절 이브 때 찍은 사진.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산타 모자를 쓰고 두 손을 든 발랄한 모습이다
라오스·중국을 거쳐 한국에 오려다 최근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이 지난해 성탄절 이브 때 찍은 사진. 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산타 모자를 쓰고 두 손을 든 발랄한 모습이다. /MBC 제공
―9명과는 언제까지 연락했나?

"중국에서는 계속 연락했다. 통화할 때 한국에 간다고 들떠 있었다. 온다니까 좋아하면서 웃기도 했다. 이번에 북송된 9명 중 1명과는 지난 8일 무렵에도 전화 통화 했다. 한국에 오는 과정이 너무 힘드니까 그냥 '중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도 하더라."

―북송된 친구들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평양으로 가면 정말 나오기 힘들다. 나는 (탈북하다 붙잡혔을 때) 양강도에 있어서 6개월 만에 나왔지만,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오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처형될 가능성?

"30% 정도 될 같다."

―한국에 오려는 꽃제비들이 많나?

"많지만 혼자는 힘들다. 나도 좋은 사람 만나서 가능했다. 지금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중국, 동남아 등에 많이 있다."

―인터뷰에 응한 계기는.

"동생들을 사랑하고, 보고 싶고 살리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 국정원에도 전화하고 하나원에도 전화했다. 그쪽에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바는?

"같은 사람인데, 한국에 오고 싶은 사람들인데, (한국이) 힘 좀 써주면 좋겠다."

―친구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믿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북한 가면 못 만난다고 하지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조선일보][오늘의 세상] 라오스, 탈북자 9명 추방… 北이 비행기 태워 中으로 '압송'(2013.05.29)

15~23세인 탈북고아 '꽃제비' 출신 9명, 北送될 위기
한국측, 1~2주내 인도하던 관례 믿고 안이한 대응한 듯
北인권단체 "대사관, 18일간 탈북자 한번도 면회 안해"
탈북 단속 강화한 김정은 정권
라오스에 외교총력전 편 듯


 북송위기 탈북자 9명 이동 경로 지도
'꽃제비(탈북 고아)' 출신 탈북자 9명이 지난 10일 중국 국경을 넘어 라오스에 도착했으나 라오스 정부가 이들을 강제 추방 형식으로 북한 관계자들에게 넘긴 것으로 28일 알려졌다. 남북한은 탈북자 9명이 라오스에 도착한 직후부터 이 사건을 인지하고 외교전을 벌였으나, 라오스 정부는 북한 편을 들어줬다. 북한은 27일 탈북자들을 인계하자마자 이례적으로 비행기에 태워 중국으로 이송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이번 탈북자 중에 북한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넘겨줘서는 안 될 사람이 포함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외교전에서 北에 밀려

28일 탈북자 단체 등에 따르면, 문모(23)씨 등 15~23세 남자 7명, 여자 2명은 한국인 목사 장모씨 부부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탈출했다. 이들은 지난 10일 중국 남부에서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들어가다 경찰에 붙잡혔다. 장 목사는 체포된 직후 라오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했으나 대사관에서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일단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말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목사와 탈북자 일행은 16일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으로 이송됐다. 라오스 정부는 보통 탈북자를 체포한 후 1~2주 내에 우리 측에 신병을 넘기던 과거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이후 라오스 정부는 27일 문모씨 등 탈북자 9명을 '출발지인 인근국(중국)'으로 강제 추방했다고 우리 대사관에 사후 통보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 북한인권단체들은 "탈북자들이 이민국에 18일간 수용돼 있는 동안 주라오스 한국 대사관에서는 단 한 차례 면회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탈북자들은 27일 오후 중국 윈난성 쿤밍(昆明)에 도착했으며 현재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 소식통은 "북한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여러 사람이 탈북자들과 함께 이동 중"이라며 "북한 당국자들이 직접 호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북한 측은 라오스를 떠나기 전 탈북자들에게 합법적 여행 증명서와 여권 등을 소지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조만간 북송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라오스 이례적으로 비행기 압송 허용, 왜?

북한이 탈북자 문제에 신속하게 개입해서 이들을 인계한 후, 비행기에 태워 데려간 것은 이례적이다. 라오스 정부도 관례를 깨고 공항에서 바로 비행기에 태워 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북한 소식통은 "과거 김정일은 탈북자들에 대해 '배신자는 갈 테면 가라'는 식이었으나 김정은이 들어선 이후로는 단속과 통제가 심해졌다"며 "라오스 주재 북한 대사관이 이런 변화에 맞춰 열심히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입국 탈북자 수는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2706명을 기록했으나 김정은이 집권한 2012년 1509명으로 줄었고, 올해는 3월 현재 320명 선에 그치고 있다.


 탈북자들이 2007년 8월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 지역을 넘고 있다. 이번에 라오스에서 붙잡힌 탈북자 9명도 이와 비슷한 경로를 통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탈북자들이 2007년 8월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 지역을 넘고 있다. 이번에 라오스에서 붙잡힌 탈북자 9명도 이와 비슷한 경로를 통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용호 AD
이번 사건 배경에는 북한과 라오스의 전통적 우호 관계도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에서 우리 정부 당국이 평소처럼 인계될 것으로 보고 안이한 대응을 해서 탈북자들을 북송 위기에 빠뜨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탈북자들의 90%가량이 '북한→중국→라오스(이후 태국까지 가는 경우도 있음)' 경로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탈북자 송환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민주화 네트워크 등 북한인권단체들은 이날 저녁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체포 소식을 전해 듣고도 18일 동안 이들을 방치했으며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탈북자 9명이 현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이들이 북송된다면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4월 1일 월요일

[동아일보]다문화 국회의원 1호 이자스민 - 탈북 한의사 1호 김지은씨 ‘희망 토크’(2013.04.02)

다문화 국회의원 1호 이자스민 - 탈북 한의사 1호 김지은씨 ‘희망 토크’

본보 선정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을 소개합니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뒷줄 오른쪽)은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나란히 선정된 것을 계기로 소수자가 맘 편히 살 수 있는 한국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함께 만난 지구촌어린이집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두 사람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하는 듯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었다. 1995년과 2002년 각자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첫발을 들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필리핀 새댁’, 말투가 낯선 ‘북한에서 온 여자’로 불렸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생활 18년 차와 11년 차. 이젠 이름만 말해도 알아보는 이가 많다.


다문화 국회의원 1호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36)과 남북한 한의사 1호인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47). 두 사람이 동아일보 창간 93주년 기획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추천위원들은 다문화 인구 130만 명, 새터민 2만5000명 시대에 두 사람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수자로 한국 사회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이 의원과 김 원장.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 난 한국 아줌마인데, 보는 눈길은…

이 의원은 올해부터 필리핀 생활보다 한국 거주 기간이 더 길어졌다. 학원(사교육) 문화는 안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지만 학교 임원을 하면 1점 더 준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한국 엄마. 김 원장도 마찬가지다. “이젠 북한에서 쓰는 단어를 들으면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하는, 그런 느낌이 나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움찔할 때가 가끔 있다. 이렇게 만드는 건 같은 한국 사람들이다. 이 의원은 2010년 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직후 “언제 돌아가느냐”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충격이었다. “15년의 내 인생이 다 여기에 있는데, 내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난 한국 사람인데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서러워만 할 뿐 말도 못했어요.”

김 원장이 맞장구친다. 북한에서 이혼했다고 밝히면 “에이, 거짓말”이라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북한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식이다. 살아 보지도 않은 이들이 이렇게 나오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쉽지는 않지만 북한에도 이혼은 있다. “제가 기쁨조를 하다가 밀려나서 도망쳐 온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을 원하는 건가….” 차분하던 김 원장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의원은 국회의원으로 유명해졌는데도 시선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고개를 젓는다. 얼마 전 축사 요청을 받아 행사에 참석했는데 주최 측 인사들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자신을 좋지 않게 얘기하더란다. 한국어를 못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까지 올려놓고 한국말도 못 할까 봐. 열이 나서 ‘한국말, 필리핀말, 영어 다 해요. 뭘로 할까요? 스페인어도 합니다’라고 쏘아붙였어요.”

이 의원은 국회의원 대접도 받지 못하는 편이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한테는 공손하게 ‘안녕하세요’ 하잖아요. 하지만 저를 처음 봤을 때는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얘기를 오래 해야 점점 허리가 숙여지죠.” 이 의원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사라는 행사는 다 다닌다.


▼ “다문화 2세들 위해… 공존 한국의 꿈, 결코 포기 못해요” ▼

■ 이자스민 의원-김지은 원장 희망 토크

○ 가급적 허리를 더 숙여야


요즘은 초등학생도 다문화라는 말을 안다. 한국 사회의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다.

이 의원은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며느리다. 이를 보고 옆집 아주머니가 “요즘엔 외국 며느리가 좋아. 애들한테 이중언어를 가르치고, 시부모도 잘 모시잖아”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농담 삼아 물었다. “막내아들 배필로 어느 나라 아가씨 소개해 드릴까요. 말씀만 하세요.”

칭찬 일색이던 아주머니는 이내 “아휴, 아니야. 내 아들은 한국 여자와 결혼시킬 거야”라며 손사래를 쳤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 된다? 이 의원이 절감한 한국 다문화의 현주소였다.

두 사람은 결혼이주여성과 새터민 사이에서 ‘희망 아이콘’이 됐지만 뜻밖의 상처를 줄까 봐 오히려 몸가짐을 더 조심스럽게 할 때가 적지 않다.

이 의원은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촬영장에 끌고 와서는 “봐, 너랑 같은 필리핀 사람인데 이 언니는 한국말 잘하잖아”라고 꾸짖더란다. 이 일로 이 의원은 다문화 여성에 대한 낮은 기대치를 높이는 자신이 비교 잣대로 바뀌면서 동료 이주 여성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지나 않을까 늘 돌아보게 됐다.

김 원장은 북한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일했다. 한국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의대 정규 과정을 다시 밟아 2009년 자격증을 땄다. 정말 어렵게 이뤄 낸 성취였지만 새터민 앞에선 잘 밝히지 않는다. “모든 새터민이 꿈을 갖고 한국에 와요. 그들이 얼마나 피땀 흘리며 애쓰는지 아는데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됐어’라고 감히 말 못 해요.”


○ 우리가 만드는 10년 뒤 희망

두 사람은 편견과 공격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다. 유서를 쓴 적까지 있다. 두 사람은 그런 순간 되레 한국을 끌어안았다.

김 원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 가장 낯선 게 명함 문화였어요. 언제 식사 한번 하자는데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처음엔 새터민이라고 무시하나 싶었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한국 사람과 멀어지잖아요.” 그는 하루에 받은 명함을 죽 펼쳐 놓고 먼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고마운 자리였다. 많이 배웠다’라고. 또 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웃었다. 그랬더니 무척 편하게들 생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덕분에 지금은 부르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친구가 많아졌다.

이 의원에게는 필리핀의 여유와 낙천성이 보탬이 됐다. “점심때, 한국 시어머니와 필리핀 엄마가 냉장고 문을 동시에 연다고 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으면 시어머니는 어떡하느냐면서 걱정해요. 친정 엄마는 점심을 제치고 저녁을 먹자고 하죠.” 이 의원은 지난해 외국인은 떠나라는 공격을 받고도 꿋꿋했던 친정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아직 할 일이 더 많다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년 뒤 다문화가정이나 새터민을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움을 아이들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다.

희망은 없지 않다. 이 의원의 아들 승근 군(17)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역시 다문화가정 애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어. 나도 외국인과 결혼해야지, 2세를 위해서.” 다문화가정 행사에 다녀온 뒤의 소감이었다. 승근 군은 혼혈이 예쁘니까 앞으로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다문화가정에서 나올 것이라고도 했다. 이 의원은 그런 아들에게 “이미 섞여 있어”라고 말해 줬다.

김 원장은 2년 전 탈북한 아들 혁진 씨(21)와 14년 만에 재회했다. 아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민족은 백의민족인데 어떻게 외국인과 함께 사느냐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나중에 아들이 결혼한다고 할 때 누굴 데려오든지 모든 조건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10년 뒤 한국 사회가 함께 사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혁진이가 살 사회는 경쟁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꼴찌에게도 박수쳐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매를 둔 이 의원이 맞장구친다. “치열하게 경쟁하다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과정에서는 똑같이 경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조선일보][단독] 무장한 북한군 12명, 국경지대서 돌연(2013.03.2)


중국군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돼
지난달엔 병사 2명이 상관 사살, 中으로 도주

훈련받는 북한군./조선중앙통신

이달 초 무장한 북한군 병사 12명이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으로 탈북했다가 중국군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지난달 말에는 병사 2명이 상관을 사살하고 지린성 창바이(長白) 인근으로 탈북하는 등 북·중 국경 지역의 북한군 내부에 '이상 조짐'이 감지된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이날 "북한 국경수비대 소속 병사 12명이 이달 초 무장한 채 5명과 7명씩 나눠서 탈북해 지안 쪽으로 넘어갔다가 중국군에 체포돼 북송됐다"고 말했다. 옌지(延吉)의 대북 소식통은 "2월 말 북한군 병사 2명이 상관을 쏴 죽이고 창바이 쪽으로 넘어와 인근 중국군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말했다.

북·중 국경 지역 북한군의 잇따른 탈북은 식량난과 관련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작년 4월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탄)급 장거리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이 크게 줄면서 북한군 식량 사정이 악화했다. 식량 배급이 평양과 휴전선 인근 부대를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북·중 국경 인근의 부대는 옥수수와 알감자 등으로 버티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춘궁기가 깊어지면 북한군 탈북이 더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간인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중국 옌지에서 현지 공안(경찰)에 체포된 탈북자 8명은 50여㎞ 떨어진 투먼(圖們)의 중국 측 탈북자 수용소로 이송된 뒤 지난 19일 전원 북송됐다고 대북 소식통이 밝혔다. 이들 중 5명은 10세 내외의 아이들이며, 부모가 없는 '꽃제비'(구걸하는 청소년)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들과 함께 체포돼 중국 공안의 조사를 받던 탈북자 출신 한국인 2명 가운데 1명은 체포 11일 만인 20일 추방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북한에 있던 가족의 탈북을 돕기 위해 중국에 입국했었다.

A씨는 "조선족인 공안이 조사할 때 '당신 탈북자였던 것 안다. 제대로 말하면 한국으로 보내고, 아니면 북송하겠다'는 협박을 여러 차례 했다"고 말했다. A씨와 함께 체포된 장모(36)씨는 현재도 공안의 조사를 받고 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2013한국 ‘탈북자 간첩’ 딜레마]간첩 정체 알고보니 탈북자 위장 北화교 ‘경악’(2013.01.22)

구속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위장탈북 행적 드러나
北서 태어난 화교… 中 친척집 왕래하다 한국행
南 정착후 中여권으로 방북… 北보위부에 포섭
정보당국 신분 눈치챘지만 버젓이 공무원 임용


탈북자들의 인적 정보를 북한으로 빼돌리다 체포된 서울시청 공무원 유모 씨(33)는 탈북자로 가장해 위장 입국한 북한 화교 출신인 한족(漢族)으로 21일 알려졌다. 이번 사건이 ‘탈북자 간첩사건’이 아닌 ‘화교의 탈북자 위장 입국 및 간첩활동’ 사건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보 21일자 A1면 참조… [단독]서울시 '탈북 공무원'이 간첩? 첫 구속 ‘충격’
▶본보 21일자 A2면 참조… 신상 노출 탈북자 협박대상 될수도


한 소식통은 “국가정보원이 약 5년 전부터 유 씨가 탈북자가 아니며 북한도 몰래 다녀온다는 신고를 받고 감시하다 이번에 증거를 잡고 체포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2011년경에도 경찰과 기무사가 신고를 받고 유 씨의 내사에 착수했다가 손을 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보당국이 주시하는 기간에도 유 씨는 탈북자 담당 공무원에 버젓이 임명돼 수천 명의 목숨과 직결될 수도 있는 민감한 탈북자 정보들을 빼돌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보당국이 탈북자 정보 유출의 파장보다는 ‘실적 만들기용’ 덫을 놓는 데 집착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한 탈북단체장은 “유 씨처럼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에 정착한 북한 출신 화교들이 여러 명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 관계당국에 제보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유 씨는 최근 여동생까지 탈북자로 위장해 북한에서 빼내 한국에 데려왔으며 이 여동생은 현재 관계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씨의 북한 및 한국 내 행적을 관련 소식통들의 설명을 빌려 종합해 재구성한다.

유 씨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2004년 4월.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 57기로 졸업한 그는 대전에 정착했다. 싹싹한 성격에 반한 담당 형사는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이후 서울 소재 모 명문사립대 중국어과에 입학하면서 서울 서대문구와 송파구에서 살았다. 

유 씨는 서울시 공무원이 되기 전 중국에서 장뇌삼이나 그림을 가져와 북한산이라고 주장하며 팔았다. 2008년엔 환치기 수법으로 26억 원을 중국에 보내려다 적발돼 서울동부지검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환치기 업자들은 벌금형을 받았지만 유 씨는 단순 가담자라는 이유로 큰 처벌은 면했다.

유 씨는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북한에 3, 4번 밀입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첫 밀입국은 2006년경으로 어머니 사망 소식을 듣고 방북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교인 유 씨는 중국 여권을 보유하고 있고, 북한엔 화교로 등록돼 있어 중국을 거쳐 남북을 오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유 씨는 이때 북한 보위부에 포섭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과 중국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화교 중엔 북한 보위부 첩자로 암약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보위부는 이들의 통관 편의를 봐주는 대신 중국과 한국의 탈북자 정보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씨 역시 부친의 장사 편의를 봐주고 아무 때나 북한에 와서 가족을 만나도 된다는 회유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 유씨, 청진의대 나왔다는 말도 거짓말 ▼
이후 유 씨는 한국에서 한 남북청년모임 회장을 맡는가 하면 한국의 각종 북한 인권단체에 가입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유 씨가 화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한 탈북자는 “그는 북한인권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까지 갈 정도로 열성이었다”며 “화교가 탈북자 인권활동을 벌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유 씨의 북한 생활

유 씨는 모범적인 정착 사례로 한국의 여러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했다. 유 씨는 함경북도 청진시를 고향이라고 소개했고 청진의대를 나온 뒤 외과의사를 1년간 하다 탈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유 씨의 고향은 두만강 옆 함경북도 회령시 오봉리이며 1990년대 초반 회령시내 성천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족인 유 씨의 할아버지 이름은 류린당이며 부모 역시 한족으로 알려졌다. 유 씨의 본명은 류광일이다. 북한에서는 유 씨의 성을 류 씨로 표기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화교들은 일반 북한 주민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가난했다. 하지만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한 뒤 화교들도 1990년대부터 급속히 부를 축적했다. 지금은 북한에서 가장 선망받는 집단으로 떠올랐다. 자유롭게 중국을 왕래할 수 있는 화교들은 중국 공산품과 북한 농수산물을 거래하는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성천동에는 화교가 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유 씨 집안은 크게 사업을 벌인 다른 두 가족보다는 사정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높은 담장을 세우고 사나운 개를 키울 정도로 동네 주민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유 씨는 청진시 포항구역 수북동의 화교 학교에서 6년간의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북한에선 중국 국적자인 화교는 일반 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다. 또 원칙적으로 대학도 다닐 수 없다. 유 씨가 졸업했다고 거짓 증언한 청진의대는 화교 학교 바로 옆에 있다.

유 씨는 중국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한국의 발전 소식을 접한 뒤 다른 탈북자들 틈에 섞여 한국으로 왔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실정을 잘 알고 있어 관계기관을 속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상 노출 탈북자 협박대상 될수도(2013.01.21)

 탈북 공무원 간첩 혐의 구속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 유모 씨가 간첩 혐의로 구속되면서 탈북자 지원과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공안당국은 유 씨가 관리하던 서울 소재 탈북자 명단과 주소가 북한에 넘겨졌을 경우 탈북자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큰 사안으로 보고 있다.

유 씨가 관리해 온 탈북자 정보는 1만여 명분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2만4000여 명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주소 및 신상정보가 노출되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 우선 위협받게 된다. 북한은 가족을 인질로 삼아 탈북자를 회유하거나 협박해 간첩활동을 지시할 가능성이 크다. 가족을 죽인다고 협박하면서 간첩활동을 강요하면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어렵다. 과거 탈북자 간첩사건들도 북한 보위부가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한 사례가 대다수다. 지난해 북한으로 재입국한 박인숙 씨와 김광혁 고정남 부부도 가족을 처벌한다는 압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북한이 주시하는 몇몇 주요 탈북자는 1997년 이한영 씨 피살사건 같은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탈북자 대다수는 임대아파트에서 살기 때문에 쉽게 이사 갈 처지도 못 된다.

이번 사건으로 말단 계약직공무원이 국가 안보에 중요한 극비 정보를 빼낼 수 있도록 방치된 관리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안유지를 위해서는 탈북자 정보를 소수의 제한된 공무원만 다루도록 해야 하는 게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탈북자의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선 지자체 단위의 행정업무가 필요해 정보가 지자체 단위에까지 공유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우선적으로 계약직원에게 맡겨진 탈북자 정보관리 업무를 상위 정규직에게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 씨가 어떤 이유로 간첩활동을 했는지도 중요한 포인트다. 당국은 “간첩 임무를 위해 위장 탈북했다”는 주변 탈북자들의 참고인 진술로 미뤄 유 씨가 처음부터 위장 탈북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탈북 이후 유 씨 가족이 있는 함경북도 보위부에 의해 포섭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국정원은 유 씨가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기려는 목적으로 서울시 공무원에 지원했는지, 공무원이 된 뒤 포섭이 됐는지를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유 씨는 서울시에 취직한 뒤 야간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주말에는 ‘영한우리’라는 남북 청년모임을 만들어 탈북 대학생들의 정착을 돕기도 했다.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름을 알린 것도 탈북자 정보 수집에 도움을 준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이번 사건은 탈북자들의 정착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잇따라 터지고 있는 탈북자 간첩사건과 재입북사건은 편견과 불신에 시달리는 탈북자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궁지에 몰린 탈북자들을 간첩으로 활동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단독]北 엘리트 의사, 탈북후 北에 넘긴자료 보니…(2013.01.21)

탈북자 1만명 정보 통째로 北에 넘긴 정황
2004년 탈북후 北 드나들어 2011년 서울시 계약직 취업



탈북자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현직 서울시 공무원이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 탈북자 출신 공무원이 간첩 혐의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는 탈북자 명단과 이들의 구체적인 동향이 통째로 북한에 넘겨진 정황도 포착돼 정부의 탈북자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국가정보원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지령에 따라 자신이 관리하는 탈북자 명단과 한국 정착 상황, 생활환경 등 관련 정보를 북한에 넘긴 혐의(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특수잠입·탈출, 회합·통신) 등으로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 주무관 유모 씨(33)를 구속해 수사 중인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국정원은 유 씨가 내사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뒤 달아나려 하자 11일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체포한 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상호)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유 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위부 소속 간첩들이 위장 탈북했다가 국정원 합동심문센터 심문 과정에서 적발되거나 간첩활동 중 검거된 경우는 있었지만 탈북자 출신 공무원이 검거된 것은 처음이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2004년 혼자서 탈북한 유 씨는 함경북도 청진의대를 졸업한 뒤 1년간 외과 의사를 한 엘리트였다. “밀수를 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독재정권의 폐쇄성이 북한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게 유 씨가 밝힌 탈북 이유였다. 탈북 후 명문 사립대에서 중문학과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고 유창한 영어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무역회사에서 근무했다. 가족은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1년 6월 탈북자 대상 서울시 특별전형에 2년 계약직으로 합격해 최근까지 1만여 명의 서울 거주 탈북자 지원 업무를 전담해 왔다. 주 2, 3회 탈북자 가정을 방문해 면담하고 탈북자 전화상담을 하는 업무여서 탈북자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국정원은 유 씨가 간첩활동을 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서울시 공무원시험에 지원을 했는지와 보위부의 지령을 받아 탈북자 정보를 북한 쪽에 넘긴 과정 등을 수사 중이다. 특히 북한에 넘긴 정보의 내용과 유출 경로 등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있다. 유 씨는 탈북 이후 중국을 거쳐 여러 차례 북한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국정원은 1차 수사가 마무리되는 이달 말경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에 송치할 예정이다.

2013년 1월 1일 화요일

[크리스천투데이]북한 지하교회 성도들 실제 예배 영상, 첫 공개돼(2013.01.02)


예배 전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떼내… 무릎 꿇고 기도

▲청진 한 가옥에서 기도드리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모습. ⓒTV조선 캡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예배 모습이 최초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조선일보와 TV조선은 지난 2007년 촬영된 북한 성도들의 기도모습 등을 1일 공개했다.

북한선교단체인 서울USA가 제공했다는 이 영상은 65분 분량이며, 함경북도 청진의 한 주민이 집에서 비밀리에 예배드리거나 기도하는 모습을 담았다.

화면 속 3인의 성도들은 두 손을 모은 채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나라 공민들 앞길이 점점 비참해지는데, 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아니합니까. 김정일이 살아있는 한 진짜 이 나라 공민들은 밝은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입 벌리기만 하면 내일은 잘 산다, 내일 내일 하면서…. 1년 넘게 기도를 드리건만 왜 자비를 안 베풀어 주십니까”라고도 했다.

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 남성 2인과 여성 1인은 예배를 드리기 전 벽에 걸려있던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를 벽에서 떼내 얼굴을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바닥에 놔두기도 했다.

한 여성의 별도 기도 영상에서는 “이 나라는 독재정치가 판을 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감옥에 들어가 매 맞고 병에 걸려도 약을 쓰지 못하고 죽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당신의 아들 딸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으십니까” 라는 기도 내용도 방영됐다.

서울USA 폴리 현숙 회장은 “영상에 등장한 교인들은 2007년 붙잡힌 뒤 모두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TV조선 앵커는 이들이 모두 처형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이들이 성경과 찬송을 접한 경로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드는 브로커들의 ‘보따리’이다. 미국이나 한국 선교단체들에 고용된 브로커들은 KBS <겨울연가>, <아이리스>, TV조선 <한반도> 등 드라마 DVD를 USB 등을 통해 들여보내면서 북한 주민들을 위한 설교 영상들을 편집해 끼워넣고, 탈북시 구조요청 연락처 등도 담아놓았다. 한류와 현금을 통해 북한 선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에서는 브로커로부터 이 보자기를 건네받은 북한측 인사가 현직 군인으로 확인돼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DVD가 북한에 유입된 이 경로를 되밟아, 이번 예배 영상 뿐 아니라 굶주린 북한 주민들의 모습과 결혼식 영상 등도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이를 이 매체는 북·중 국경지대의 ‘바이블 루트’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서울USA 폴리 현숙 회장은 “영상에 등장한 교인들은 2007년 붙잡힌 뒤 모두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TV조선 앵커는 이들이 모두 처형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 美 풀러신학교 통계에 따르면 북한 지하교회 성도는 13만 5천여명, 순교자는 1만 6천명 이상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이러한 움직임들을 ‘남조선발(發) 황색문화’라며 철저한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북한 내부문건에는 “USB 기억매체를 통하여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상 문화가 류포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규률을 철저히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인권선교회 김희태 목사는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이고, 끼니는 굶어도 한국 드라마 DVD를 몰래 구하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며 “한국 드라마를 본 북한 주민이 절반 정도로 추정될 만큼 인기가 좋아, 한국 드라마를 이용하면 뭐든 위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012년 12월 15일 토요일

[크리스천투데이]북한인권운동 앞장서던 김상철 장로, 13일 소천(2012.12.16)


198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 그 이후는 북한민주화 운동

 
북한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김상철 장로(65)가 13일 오후 11시 지병으로 소천했다.

김 장로는 짧은 공직생활 후 탈북난민 돕기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매진했다. 1999년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현 세이브엔케이)를 설립하고, 국내외 1180만명의 서명을 유엔 등 국제사회에 전달, 탈북민들이 국제법적으로 난민 지위를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2002년에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을 창간하고 북한인권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힘썼다. 교계에서도 북한구원운동을 설립하고 전국을 돌며 북한 주민 구원과 탈북자 돌보기 운동에 앞장서 오다 쓰러져 투병생활을 해 왔다.

평북 태천 출신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김 장로는 1973년 서울형사지법에서 판사로 공직활동을 시작했지만, 1975년 ‘김대중 사건’을 빨리 처리하라는 정권 압력을 거부하며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980년 독일 연수 중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군사정권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며 변호사가 됐다. 대우자동차 파업사건과 김근태 고문, 권인숙 성고문, 박종철 고문치사 등 굵직한 시국사건 변호를 도맡았고,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는 여야 개헌협상이 결렬 위기에 놓이자 타협안을 내놓기도 했다.

민주화가 되고 나자 운동권이 과격한 반미운동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 1990년대부터는 한·미 동맹 강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다. 그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46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시장에 임명됐으나 그린벨트 훼손 논란으로 7일만에 사임했다. 그는 그 전후 이야기를 신앙적으로 녹인 <7일간의 서울시장>을 집필하기도 했다.

유족은 부인 최원자(65)씨와 아들 세호(38·AT커니 이사), 딸 민정(36)씨, 사위 김범수(39·미래한국 사장)씨가 있다.

빈소는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7일 오전 10시 대치동 서울교회에서 진행된다(02-2258-5940).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박지웅 목사의 시편] 하늘의 만족감(2012.12.09)

언젠가 우리 교회의 부교역자 초빙을 위한 이력서를 받는데 특이한 이력서 한 통이 있었다. 지원자는 40대 초반의 탈북하신 여전도사님이었는데, 그의 자기소개서가 나의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함경도 청진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엘리트였지만 90년대 말 전염병이 북한을 휩쓸고 가던 때 교수 월급으로도 살 수가 없어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했다.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다롄공항에서 그만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을 당하게 된다.

끔찍한 시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데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다. 자기를 구금했던, 악랄하기로 유명한 북한 경찰 간부가 친히 보증을 서면서 풀어주더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경찰 간부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이었다.

그가 고문했던 한 청년이 죽음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를 전하더라는 것이다. 가소로운 마음에 말할 기회를 줬더니 청년은 성경을 줄줄 외면서 전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 바람에 재판도 없이 총살을 시켜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죽어가면서 전했던 청년의 말이 이 고문 경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의 마음을 강하게 두드린 것은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평안함과 만족감이었다. ‘마음의 심연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평안과 만족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문 경찰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결신을 하면서 신앙을 갖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죽인 청년을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얼굴에 비취는 하늘의 만족감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언젠가 영화 속에 나온 한마디 대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딴 여자를 만나는 것도 배신이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하고 슬퍼하는 것, 이 또한 배신입니다.” 그렇다. 배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대방을 차버린 것도 배신이지만 상대방의 사랑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 역시 배신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 이 역시 배신이다.

마더 테레사가 신임 수녀들을 뽑을 때 선발 기준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족감이 참 신자의 표지라는 통찰력 때문이다. 나의 얼굴에는 하늘의 만족감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의 배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